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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지방은행은 애물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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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1-09-26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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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경제·금융 발목잡는 시중은행 대형화… 지방은행의 경쟁력 키워 금융접근성 보장해야

우리나라 전문가들은 흔히 일본의 지방은행은 망하고 있다고 거침없이 진단한다. 그러나 현 시점까지 드러난 일본 지방은행의 실상은 결코 그렇지 않다. 지난 10여년에 걸쳐 장기불황이 계속되고 있음에도 일본의 지방은행은 비교적 잘 버티고 있다. 버블이 붕괴한 이후 대형 도시은행들은 부실자산문제로 심각하게 몸살을 앓다가 급기야 미즈호 등 4대 금융그룹으로 재편되었지만, 지방은행들은 90년대 초의 구도를 비교적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고사 위기에 몰린 우리의 지방은행

제1지방은행권은 여전히 64개 체제를 고수하고 있고, 제2지방은행권은 투기행각에 빠졌던 몇몇 은행들이 정리되기는 했지만 52개라는 결코 적지 않은 은행들이 버티고 있다. 국제통화기금(IMF) 사태 이후 지방은행을 마치 용도 폐기하려는 듯한 우리나라의 사정과는 극히 대조적이다. 규모에서도 일본의 지방은행은 대형 도시은행에 결코 밀리지 않는다. 수신규모는 비슷하고, 여신규모는 다소 밑도는 수준이다. 그 반면 우리나라 지방은행은 여수신에서 공히 시중은행 합계치의 10분의 1에도 못 미치고 있어 일본과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무엇이 양국간에 이처럼 극단적인 격차를 유발한 것일까.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일본에는 단단한 지방경제가 있기에 지방은행이 융성한 것이고, 우리나라에선 지방경제가 워낙 취약하기에 지방은행이 고사 직전에 몰리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실로 우리나라의 지방경제는 악순환의 고리에 빠져 있다. 경제규모가 작기 때문에 꼭 필요한 인프라 개발이 지연될 수밖에 없고, 기업들이 지방으로 모여들지 않는다. 이로써 인재와 자금이 외부로 유출되고 역내 기업의 부가가치 창출이 미진하다보니 지방의 금융은 제대로 뿌리를 내릴 수 없다.

반면 일본은 중세 봉건 막부체제 때부터 지방자치의 전통이 강해, 이것이 지역경제를 꾸준히 발전시켰고 메이지시대 이후에는 자연스럽게 지방은행의 태동과 발전으로 이어졌다. 일례로 시모노세키 근방의 야마구치은행은 무려 130년의 역사를 가지고 지역경제를 이끌고 있고, 교토은행은 교세라, 닌텐도, 와콜, 롬 등 세계적인 기업이 지역에서 자라나는 데 크게 기여했고, 여전히 견고한 거래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렇다고 일본의 지방은행이 안심할 수 있는 사정은 아니다. 무엇보다 도시은행의 시장 침탈은 일본의 지방은행을 압박하고 있다.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일본은 만성적 자금부족시대로부터 자금과잉시대로 이행했고, 도시은행의 주고객층인 대기업은 종래 은행 의존의 간접금융에서 자본시장 의존의 직접금융방식으로 자금조달 패턴을 바꾸고 있다. 이로써 도시은행은 지방은행의 주무대인 소매금융시장, 특히 중소기업 대출시장에 깊게 침투하기에 이르렀다. 올 3월 말 통계로 중소·중견기업에 대한 대출 비중은 도시은행이 62.3%로 제1지방은행의 65.7%, 제2지방은행의 72.0%에 상당 수준 육박해 있다.

따라서 일본의 지방은행은 경쟁력의 문제, 특히 원가경쟁력의 문제를 정면으로 돌파하지 않으면 안 되는 형편이다. 도시은행의 원가가 1.0이라면 지방은행은 1.5 수준이므로 획기적인 비용절감의 대책을 마련하지 않으면 안 된다. 가장 쉽게 동원할 수 있는 대책은 점포와 인원을 삭감하는 것이지만, 일본의 지방은행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지역밀착과 고객밀착이 최대의 경쟁력이므로 조밀한 점포망과 유대관계가 공고한 서비스 인력을 줄이는 것은 ‘제살파먹기’라고 판단하고 있다.

이에 일본의 지방은행은 본사비용을 절감할 목적으로 지방은행간에 지주회사를 설립한다거나, 전자결제제휴를 맺는다거나, 정보기술(IT) 공동개발을 시도하는 등 다양한 전략적 대안을 실천에 옮기고 있다. 특히 독자경영을 전제로 대형 도시은행의 슬하에 들어가 어려운 고비를 넘기겠다는 전략도 눈에 띈다. 국제금융, 투자신탁 등 고도의 전문인력을 필요로 하는 분야를 독자적으로 끌고 가는 것이 힘겹기 때문일 것이다.

지방은행 생존법 모색… 중앙을 위한 사고들

사진/ 누가 지방은행은 망한다고 했는가. 국내 지방은행이 시중은행 대중화 틈새에서 협공을 당하는데 비해 일본의 지방은행은 꿋꿋하게 버티고 있다.(박승화 기자)
이러한 일본의 사정을 들여다볼수록 우리나라 지방은행의 장래는 더욱 갑갑해진다. 일본과 마찬가지로 대형 시중은행들은 거의 전적으로 소매금융을 선언하면서 지역시장을 침투할 태세를 정비하고 있고, 점포망이 극히 조밀한 농협은 무차별 공세를 감행하고 있다. 일본에 비해 지방경제의 규모는 극히 일천한데 경쟁의 파고는 더 높게 일고 있으니, 지방은행이 과연 독자의 수익모델을 확보할 수 있을지 큰 의문이다.

더구나 지방은행에 대한 지역민과 중앙의 시각은 냉혹하다. 물론 지역에 따라 정도의 차이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적지 않은 지역민들은 지방은행에 대해 비판적이며, 차제에 정리되어도 개의치 않겠다는 입장을 서슴없이 내놓기도 한다. 이들은 지방은행이 지역중소기업의 육성이라는 당초의 설립목적에 충실히 부응하기는커녕 지역자금의 역외이탈을 방조하고, 대주주의 사금고 역할을 하는 데 치중했다고 비판한다.

중앙의 사고는 대형화 일변도이다. 지역에 금융서비스 수요가 있으면 이는 누군가에 의해 공급되면 되는 것이지 이를 꼭 지역의 금융기관이 맡아야 할 이유가 없다는 주장이다. 특히 정보기술이 금융서비스에 접목됨으로써 조밀한 점포망을 가져야 할 이유도 없게 되었으니, 전국적인 시중은행이 지방으로 내려가 과잉점포, 과잉인력, 과잉경쟁의 폐해를 청산하고 효율화하는 것이 오히려 바람직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그러면 한국의 지방금융을 시중은행에 상당 수준 맡겨도 무방한 것일까. IMF 사태 이후 지방은행을 위시한 지역금융기관이 대거 퇴출되면서 서울로의 자금집중 현상이 가속화하고 있다. 부가가치 창출기준으로 서울의 경제규모는 전국의 25% 수준인데, 자금의 절반이 서울에 집중되고 있다. 이는 지역자금이 서울로 이탈하고 있음을 방증하는 것이다. 금융기관 전체로 볼 때 지역자금의 역외유출은 1995년에 29.7% 수준이었는데, IMF 사태 이후 한때 40%를 넘어섰다가 지난해부터는 37%라는 현저히 높은 수준에서 안정세를 보이고 있다.

흔히 금융경제학자들은 금융시장에서 지역적 차별성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자본의 이동이 전적으로 자유롭기 때문에 한 지역 내에서 자금수요와 자금공급이 불일치하는 경우는 발생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 있어 금융기관은 신용정보를 수집하는 데 비용이 발생하고, 수집한 정보를 평가하는 데 불확실성이 개입하게 된다. 따라서 금융이 중앙에 집중될수록 중앙과 지방의 차입자간에는 정보의 비대칭성문제가 발생하게 되고, 지방은 금융접근성에서 피해를 입게 마련이다.

각국의 실증조사는 이를 뒷받침한다. 최근 일본 국민생활금융공고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대형 도시은행의 경우 “날씨가 좋을 때에는 양산이 되어주지만, 날씨가 나빠지면 우산을 거두어버린다”라는 응답이 지배적이었으며, 우리나라 지방 중소업자들 역시도 IMF 위기 이후 지방은행에 비해 시중은행의 대출태도가 좀더 엄격화했다고 불만을 표시하고 있다.

지금 지방은행을 살려야 하는 이유들

사진/ 일본의 한 지방은행
바로 이 때문에 선진 각국에서는 전국규모의 메이저리그와 지방에 소재한 마이너리그가 공존하고 있다. 흔히 미국에는 JP모건이나 시티은행과 같은 초대형은행이 주름잡고 있는 듯하지만, 미국 내 총 1만여개의 은행 중 95%는 지방은행이고, 금융대형화 추세로 지역경제와 지역금융이 위축되는 것을 막기 위해 클린턴 행정부는 1995년에 지역재투자법(Community Reinvestment Act)을 대폭 강화하기도 했다. 독일에선 은행권 총자산의 65%가 지방은행의 몫이며, 독일의 연방 및 주정부는 지방은행의 대명사인 저축은행(sparkassen)을 사실상 소유함으로써 신용력과 위상을 높여주고 있다. 이제 우리 정부는 은행대형화 일변도의 정책, 지방은행 폐기처분의 정책을 심각히 재고해야 한다. 실물경제와 유리된 금융개혁은 국민경제의 내적인 연관성을 파괴하고, 지방경제를 더욱 위축시키며 일자리의 전망을 극히 어둡게 하고 있다. 고용의 82%를 담당하는 중소기업에 어떻게 금융서비스를 제공할 것이며, 특히 지방 중소기업에 어떻게 금융접근성을 높일 수 있는가를 고민해야 한다.

이찬근/ 인천시립대 무역학과 교수·국제금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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