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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노인을 위한 보험은 없다

일반 보험보다 보험료 2~4배 높고 보장 범위 좁은 무심사 고령자 보험… 실제 혜택 거의 없는데도 규제 풀어 거드는 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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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3-09-17 16:02 수정 : 2013-09-27 1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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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선물로 아버지 보험에 가입하려고 하는데요.”

“네, 아버님 연령이 점점 높아지니까 따님 입장에선 마지막을 생각 안 하실 수가 없죠? 아버님 마지막 가시는 길에 병원비, 간병비, 장례비로 쓰시라고 생명보험금을 드리는 무심사·무진단 보험이 있거든요.”

“아버지가 고혈압과 통풍이 있으신데 괜찮나요?”

“아버님은 정말 저희 무심사 보험 외에는 안 되실 거 같아요. 이 상품은 계약일로부터 2년만 넘기면 (아버님이) 그냥 주무시다가 돌아가시든, 앓고 계신 질병으로 돌아가시든지에 상관없이 현금 1천만원을 드려요. 만에 하나 인명은 재천인지라 2년 안에 돌아가셔도 매달 납입했던 보험료는 10원도 빠짐없이 돌려드리고요. 이 혜택을 받는 데 최초 10년 동안은 매달 5만6천원씩만 내시면 되세요.”

“가입 절차는요?”

“따님 대리 녹음으로도 가능하세요. 아버님하고 통화는 5초도 안 해요. 그냥 ‘예’라고 한마디만 하시면 돼요. 저희가 보험금을 드릴 때도 무심사예요. 딴죽 걸지 않아요. 아버님에게 무슨 일이 생겨서 저희에게 전화주시면, 사망보험금을 하루 안에 따님 통장으로 넣어드려요.”

새로운 수익원 찾아 고령자 보험 눈독


고령자 보험 상담은 상냥하고 신속했다. 지난 9월11일 한 보험회사로부터 전화 상담을 받아보니,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다’는 광고 문구가 과장이 아니었다. 상담사는 나이가 많고 질병이 있다는 이유로 고령자의 보험 가입을 거절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보험에 꼭 가입해야 남은 가족들의 경제적 부담을 덜어줄 수 있다며 진심인 양 걱정해주기까지 했다. 게다가 가입 절차도 일사천리라니 절로 솔깃해졌다. ‘이참에 아버지 보험을 하나 들어드릴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지금껏 나이가 많고 병에 걸리기 쉽다는 이유로 노인을 박하게 대했던 보험회사들이 이제 와서 이렇게 친절해진 건 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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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는 2006년에 시작됐다. 후발주자인 외국계 보험회사들이 해외에서 판매되던 ‘무심사 보험’을 들여온 것이다. 사망 위험이 높아지는 50살 이상도 아무런 건강 진단 없이 고객으로 받아들인 뒤 실제 사망하면 보험금을 지급하는 정기보험(일정 기간에만 사망보험금을 주는 사망보험)이 대표적이다. 처음엔 손해율(수입보험료 대비 지급보험금)이 높다는 이유로 거들떠보지도 않던 국내 중·소형 보험회사들도 하나둘 무심사 보험 시장에 진입했다. 실제 2007년 20만 건에 불과하던 계약 건수가 지난 6월 말에는 41만3천 건으로 2배 가까이 늘었다.

지난해 하반기부터는 고령자 보험 시장이 더 급격히 커졌다. 일부 만성 질환에 대해선 심사를 면제해주는 ‘간편 심사 보험’이 잇따라 개발되기 시작한 것이다. 61살 이상 노인들이 고혈압·당뇨병에 상관없이 가입할 수 있게 한 실버암보험이 주를 이룬다. 무심사 보험 시장의 성장을 주도한 라이나생명, AIA생명 외에도 신한생명, 흥국생명, NH농협생명 등이 최근 실버암보험을 내놨다. 삼성생명, 한화생명 등 대형 보험회사들도 올해 안에 유사한 상품을 내놓을 것으로 알려졌다.

보험회사들이 고령자 보험에 새삼 눈독을 들이는 건 새로운 수익원이 필요해서다. 건강하고 젊은 기존 고객들이 살기가 팍팍하다는 이유로 보험을 꺼리면서 보험가입률이 지속적으로 하락하자, 위험이 높은 노인이라도 고객으로 확보해야 할 절박함이 커진 것이다.

보험회사의 의도가 어떻든 간에, 보험 가입의 길이 열린 노인들은 고령자 보험에 대한 관심이 매우 높다. 김철민(60·가명)씨 사례가 그렇다. 지난 20년간 고혈압을 앓아온 탓에 보험 가입은 엄두도 못 냈던 그는 최근 실버암보험 견적서를 뽑아봤다. 만 61살이 되는 내년부터 가입할 수 있고, 한 달 4만7천원을 내면 암에 걸렸을 때 2천~4천만원까지 보장받을 수 있었다. “만 61살 생일이 되는 내년 1월에 당장 실버암보험에 가입할 예정이다. 회사를 다닐 때는 그나마 노후 의료비에 대한 두려움이 적었다. 그런데 이제 고정적 수입이 끊기니 의료비 부담이 가장 크다. 암보험에라도 가입해두면 한시름 놓을 수 있을 것 같다.”

사망 뒤 받는 보험금 규모도 크게 달라

그러나 보험회사의 친절을 누리려면 노인들은 적잖은 대가를 치러야 한다. 보험회사들이 손해율을 조금이라도 낮추기 위해 고령자 보험에 대해선 일반 보험과 비교해 여러 차별적인 조처를 두고 있는 까닭이다. 일단 보험료가 비싸다. 무심사 정기보험은 일반 장기 보험보다 보험료가 적어도 2~4배 높은 것으로 금융감독원은 보고 있다. 무심사 보험의 대표 격인 ‘라이나 무배당 OK실버보험(갱신형)’을 예로 들어보자. 이 상품은 50~81살 노인이 가입하고 2년 뒤 재해로 사망하면 2천만원, 그 밖의 일반적인 이유로 사망하면 1천만원을 지급한다. 이 사망보험금을 받기 위해 55살인 남성은 10년간 매달 5만3700원, 여성은 2만5800원을 내야 한다. 하지만 같은 회사의 유사한 일반 정기보험의 보험료는 남성이 한 달 7800원, 여성은 3500원으로 아주 저렴하다. 간편심사 보험인 실버암보험도 일반 암보험에 비해 적어도 5~10%는 보험료가 비싸다.

보장 범위도 매우 좁다. 대부분 무심사 보험은 오로지 사망보험금을 지급하는 역할만 한다. 일반 정기보험이 주계약이나 특약으로 수술비·입원비 등을 보장해주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50~70살을 대상으로 한 ‘AIA 무배당 바로가입 YES정기보험(갱신형)’은 가입자가 특정 조건에 사망하면 보험금 1천만원을 주는 상품이다. 딱 여기까지다. 그러나 같은 회사의 일반 정기보험 상품인 ‘AIA 무배당 평균정기보험’은 특약으로라도 가입자가 재해 등으로 고도의 장해를 입었거나, 특정 수술을 받았을 때 수술비와 입원비 등을 지급하고 있다. 무심사 보험은 고객의 선택권이 거의 없는 것이다.

[%%IMAGE2%%] 사망한 뒤 유가족이 지급받는 보험금 규모도 크게 다르다. 대부분 무심사 보험의 사망보험금은 1천~3천만원이다. 남은 가족의 생계를 위해 가입하는 사망보험의 취지가 무색할 정도로 적은 금액이다. 병원비를 치르거나 장례비에 보태는 수준이다. 그러나 비슷한 보험료를 내더라도 일반 정기보험은 사망보험금이 1억~3억원이다.

그나마 사망보험금을 모두 제대로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대부분 무심사 보험은 계약 뒤 2년이 지나야 약속한 사망보험금을 지급하고 있다. 만약 가입자가 2년 전에 사망하면 이미 납입한 보험료 정도만 돌려준다. 노인이 처음 몇 달만 소액의 보험료를 내고 사망했는데도, 거액의 보험금을 지급해야 하는 상황을 방지하기 위한 조처다. 반면 일반 정기보험은 가입자가 사망하면 계약 뒤 가입 기간과 상관없이 처음 약정한 사망보험금을 군말 없이 내준다.

한 보험설계사(FC)의 설명이다. “민간 보험회사는 국민건강보험공단이 아니다. 고령자를 건강검진도 안 하고 받는다는 건 굉장한 리스크를 떠안는다는 것이다. 당연히 젊고 건강한 사람보다 보장 혜택은 줄이고, 보험료는 높인다. 사망보험이라고 해도 보험금이 1천만원 정도여서 업계에서는 그냥 ‘장례보험’이라고 부른다. 실버암보험 같은 건강보험 역시 노년기에 찾아오는 뇌출혈이나 급성심근경색 등 치명적인 부분은 다 보장에서 빼버린다. (고령자 보험은) 실제 혜택은 거의 없는데, 다들 불안감을 없애려고 가입하는 것이다.”

정부, 노후 수단으로 민영보험 추천

문제는 노인이나 자녀들이 이런 한계를 제대로 알지 못한 채, 막연한 기대를 품고 보험에 가입하고 있다는 것이다. 남재일 경북대 교수(신문방송학)의 경험을 들어보자. 그의 어머니는 79살이던 2007년 ‘5년 만기 순수 보장성 상품’인 무심사 보험에 가입했다. 5년 동안 매달 8만원가량 보험료(총 500만원)를 내되, 그 안에 사망하면 1천만원의 사망보험금을 받는 상품이었다. 대신 5년이 지나도 가입자가 사망하지 않으면 사망보험금은커녕 이미 낸 보험료도 전혀 돌려받을 수 없도록 설계됐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는 이런 사실을 잘 몰랐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남 교수는 보험회사에 ‘불완전 판매’라며 항의했지만, 보험회사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당시 녹취를 들어보면) 어머니가 몇 번씩이나 (사망보험금 1천만원을) 다 주냐고 물어보는데, 상담사는 ‘그렇다’는 뉘앙스로 답을 했다. 그러나 가입 뒤 2~5년 사이에 (어머니가) 꼭 사망해야만 보험금이 나오는 구조였다. 팔순의 노인이 이해하기에는 어려운 설명이었다. (금감원에) 문제제기를 하니까 그냥 소송을 하라더라.”

고령자 보험 시장은 계속 확대될 전망이다. 정부가 고령자의 노후 준비 수단 가운데 하나로 민영보험을 추천하는 까닭이다. 지난 7월에는 금감원이 ‘고령자 보장성보험 활성화 방안’을 내놓기도 했다. 이 방안은 보험회사들이 적극적으로 다양한 고령자 보험 상품을 출시할 수 있도록 각종 규제를 풀어주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앞으로는 보험회사들이 납입보험료보다 사망보험금이 적은 상품을 설계할 수 있고, 고령자에 대해선 ‘안전 할증 범위’를 30% 이내에서 50% 이내로 늘릴 수 있게 된다. 또 노인이 보험에 가입한 뒤 30일 이내에 앓는 질병에 대해선 보장해주지 않아도 된다. 한마디로 고령자 보험의 보험료는 높아지고 보장 범위는 더 줄어들게 된 것이다. 금감원 관계자는 “그간 고령자를 위한 보험상품의 종류는 제한적이었다. 이에 고령자 보험을 활성화하려면 규제를 풀어줄 필요가 있었다. 민영보험을 통해 고령자는 노후를 준비하고, 정부는 (고령자 의료비에 대한) 부담을 덜 수 있다”고 설명했다. 진정 노인을 위한 보험은 언제나 나올까.

서보미 기자 spri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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