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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한국호 체질개선 ‘빨간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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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1-09-19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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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의존도 높은 허약체질 그대로 노출… 크리스마스·연말 특수도 물건너가

사진/ 미국의 테러참사를 돌파할 뾰족수를 찾아라! 금대중 대통령이 지난 9월 14일 청와대에서 열린 경제장관·경제단체장 특별간담회를 주재하고 있다.(청와대사진기자단)
미국에 대한 테러공격의 파편은 한국경제에도 곧바로 날아들었다. 단순히 파편을 맞은 정도가 아니다. 최초 진앙지에서 시작된 해일의 파고가 점차 높아져 마지막 상륙지점에서는 가공할 파괴력을 지니듯, 미국 테러사태의 파장은 우리 경제에 너무도 큰 충격으로 다가온다.

정부는 재정적자의 확대를 감수한 내수진작 방안을 ‘특별 경제대책’이라며 내놓았지만 갑자기 몰아닥친 외부충격을 조금 누그러뜨리는 수준이라는 게 경제전문가들의 평가이다. 재정경제부 관계자는 “앞으로 전개될 또다른 충격의 폭과 강도를 봐가며 추가대책을 마련하겠다”고 밝혔지만, 사실 정부로서는 아무리 머리를 짜내봐도 뽀족한 대응수단을 찾기 어려운 처지이다.

수출피해 속출… 주가하락폭 세계 최대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에 ‘모범적’으로 순응한 지난 3년 반 동안 우리 경제는 바깥 형편에 기대는 정도가 너무 커져버렸다. 아직도 맹위를 떨치고 있는 구호 ‘수출만이 살 길’이라는 기준으로 현실을 한번 돌아보자. 국내총생산(GDP)에서 수출이 차지하는 비중이 얼추 절반(올 1분기 현재 49.4%) 수준이다. 외환위기 직전인 1997년(30.6%)에 견줘 18.8%포인트, 98년(38%)보다 11.4%포인트나 치솟은 것이다. 이에 따라 무역의존도(수출입/GDP)는 97년 59.3%에서 98년 71%, 지난해 72.7%로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조조의 연환계(連環計)처럼 끈끈하게 얽혀 서로서로 기대고 있는 게 오늘날 국제 경제의 현실이긴 하지만 나라마다 정도가 크게 다르다. 미국의 무역 의존도는 20.1%에 지나지 않으며 일본(18.1%), 중국(36.4%)도 우리보다 훨씬 낮다. 세계경기가 시들해질 경우 다른 나라들이 움찔하는 정도의 충격을 받는다면, 한국경제는 거친 풍랑에 요동을 치고 자칫 풍비박산에 이를 수도 있는 조각배와 같은 처지이다.

우리 경제의 이런 허약한 외부 의존 체질은 미국에 폭탄테러가 가해진 바로 다음날 주식시장에서 그대로 보여줬다. 주식시장이 오전(9월12일)에 열리지 못하는 사상 초유의 일이 벌어졌으며 오후에 열린 장에선 주가가 대폭락하며 시세판을 시퍼렇게 물들였다. 이날 국내 증시의 주가 하락폭은 전세계에서 최대 기록을 세웠다.

즉각적 충격은 금융부문에만 머물지 않는다. 수출로 대표되는 실물경제도 곧바로 영향권에 휘말렸다. 바이어 상담용 샘플의 운송이 늦어지고 수출품 선적이 차질을 빚는 일이 속출했다. 산업자원부와 무역협회 집계에 따르면, 미국 테러참사에서 빚어진 수출 피해가 9월12∼14일 사흘 동안만 81개사에 423건, 3314만달러에 이르렀다.

길게 내다볼 때 사실, 이런 충격은 그다지 큰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 바깥으로 나가는 길이 일시적으로 막힌 것은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해소될 것이기 때문이다. 정작 문제는 가뜩이나 얼어붙은 수출 수요가 이번 사건으로 더욱 위축될 것이란 음울한 전망에서 비롯된다.

특히 우리나라 자동차와 반도체 등의 최대 수출시장인 미국의 소비위축이 큰 걱정거리이다. 정보기술(IT)산업의 거품 붕괴와 주가 하락세가 이어진 가운데서도 미국 경기의 버팀목 구실을 했던 소비나 서비스업 경기는 이번 테러 대참사의 여파로 크게 위축될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를 비롯해 세계 각국이 기대하고 있던 미국의 크리마스, 연말특수도 이제는 물건너간 것으로 봐야 한다는 전망이 많다.

한국경제의 우울한 항로는 올해 경제성장률 전망에서 그대로 나타난다. 애초 6∼7% 전망에서 시작해 5∼6%, 다시 4∼5%대로 정부의 성장률 기대치는 슬금슬금 낮아져왔다. 그런데 이마저도 미국의 테러사태라는 돌발 악재를 만나 달성하기 어려운 수치가 돼버렸다. LG경제연구원은 ‘테러쇼크가 몰고올 경제적 파장’이란 보고서를 통해 “이번 테러사태로 하반기 수출은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13.9% 감소하고 연간으로도 9.6%가량 줄어들 것”이라고 예측했다. 이에 따라 경상수지 흑자는 지난해 110억달러에서 올해는 99억달러 수준에 머물 것으로 전망됐다. 나라 밖 사정이 나빠지면 국내 소비심리도 빠르게 위축될 게 뻔하며 설비투자 역시 더욱 감소할 수밖에 없다. LG경제연구원은 이처럼 수출 및 내수가 쪼그라들면서 올 하반기 경제성장률은 상반기보다 감소한 1.7%를 기록, 연간으로는 성장률이 2.4% 수준에 지나지 않을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현대경제연구원은 올해 경제성장률 전망을 애초 3.8%에서 0.5∼0.8% 포인트 떨어진 3.0∼3.3% 수준으로 예상하고 있다. 이는 테러 충격에 따른 국제유가의 오름세,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시장 전체의 경기위축으로 수출이 줄어 경상수지가 악화될 것이란 분석에 바탕을 두고 있다.

한국호가 안개권을 벗어날 수 있는 시점도 점점 뒷걸음질치고 있다. 올해중 반전의 기회를 맞게 될 것이란 기대는 쏙 들어가고 내년 상반기에도 회복이 어려울 것이란 예측이 득세하고 있다. LG경제연구원은 “세계 경기침체의 여파로 수출 감소세가 내년 상반기까지 지속될 것으로 보이며 유가 상승에 따라 수입이 늘어나면서 수출입차가 급격히 줄어들 것”이라며 “적어도 내년 상반기까지는 국내 경제가 이번 테러 충격에서 벗어나긴 어려워보인다”고 전망했다.

사태의 심각성을 반영하듯 정부는 초비상 상태에 빠져 있다. 각 부처에 비상대책반을 꾸렸으며 한국은행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한 자금공급 통로를 확보하고 있다. 이미 지난 3월부터 미국 경기회복 지연에 대비해 단계별 비상대응계획(컨틴전시플랜)을 세워놓은 터에 이번 테러사태를 맞아, 위기감은 어느 때보다 높다. 그래서 경제운용의 중심축은 ‘구조조정’에서 ‘경기진작’으로 빠르게 옮아갈 듯하다. 삼성경제연구소 정문건 상무는 “미국의 테러참사는 경제정책의 줄기를 확 바꿔야 할 정도로 심각한 돌발 변수”라며 “만약 사태의 여파가 장기화하는 가운데 내수마저 계속 가라앉아버리면 IMF 사태 직후의 대규모 기업도산 사태가 다시 나타날 것”이라고 경고했다.

구조조정에서 경기진작으로 정책 전환

정부의 고민은 급속한 경기냉각의 방지와, 지속적인 구조조정 추진이라는 두 가지 상충하는 과제를 동시해 수행해야 한다는 데 있다. 만약 이번에 경기진작에만 매달리고 대우차와 하이닉스반도체, 현대투신 등 부실기업 처리를 미적거리면 그동안 이뤄놓은 금융과 기업구조조정의 미약한 성과마저도 빛이 바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무엇보다 정부의 운신폭이 제한적일 수밖에 없는 근본적인 이유는 ‘모든 게 미국에 달려 있다’고 할 정도로 미국 의존도가 높은 국내 경제의 구조적 결함 탓이다. 재경부 관계자도 “미국의 ‘전쟁선포’가 적당한 선에서 마무리되고 세계 각국이 보조를 맞춰 공동으로 경제적 어려움을 헤쳐나가기를 바랄 뿐”이라고 말했다.

유종일 한국개발연구원(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는 “이번 테러사태 ‘자체’의 영향이 문제가 아니라 (나라 안팎 경제가) 전체적으로 좋지 않은 상황에서 또 하나의 충격을 받았다는 데 심각성이 있다”며 “이래저래 국내 경제의 어려움이 상당히 오래 갈 것”으로 내다봤다.

박순빈 기자 sbpark@hani.co.kr
김영배 기자 kimy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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