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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친박’으로 발맞추나?

삼성 사장단 회의 강사로 친박 정치평론가 고성국 박사 초빙돼… 삼성이 박근혜 정부와 ‘코드 맞추기’에 나섰다는 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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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3-04-12 14:47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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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3일 서울 서초동 삼성 사옥에 ‘친박’으로 통하는 정치평론가 고성국 박사가 나타났다. 이날 열린 삼성그룹 사장단회의에서 ‘한국 정치의 이해’란 제목으로 강연하기 위해서다. 최근 KBS 시사 프로그램 진행자로 발탁된 뒤 노조의 반발을 사 결국 하차가 결정될 정도로 친박 성향인 그가 과연 삼성 사장들과 무슨 말을 했을까.

삼성 쪽은 정치적 해석을 경계했다. 삼성그룹 관계자는 “정치도 우리 사회의 중요한 이슈이며 이에 대한 사장들의 이해를 높이기 위해서 마련한 자리”라며 “보수뿐만 아니라 진보 강사도 여러 번 강의를 한 적이 있다”고 말했다. 강연 때 무슨 이야기가 오갔는지에 대해서는 “한국 정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고만 했다. 고성국 박사도 “열띤 분위기 속에 강연이 이뤄졌고 활발하게 토론도 이뤄졌다. 다들 정치 상황에 관심이 많더라”는 이야기 외에는 말을 아꼈다. 어쨌든 박근혜 정부의 탄생과 발맞춰 친박 정치평론가를 불렀다는 사실은 삼성이 박근혜 정부와 ‘코드 맞추기’에 나섰다는 해석을 낳고 있다.

삼성그룹 사장단회의의 분위기가 확 바뀐 것은 2011년 초 이후로, 이때부터 외부 강사가 많이 등장하고 강의 주제도 경영·경제 분야에 국한되지 않고 리더십·역사·인문학 등으로 다양화됐다. 외부 강사로 나섰던 장하준 영국 케임브리지대 교수와 김호기 연세대 교수, 정치평론가 고성국 박사(왼쪽부터). 한겨레 김정효 기자, 한겨레 강창광 기자, 한겨레 이정아 기자
삼성의 고민 엿볼 수 있는 바로미터

삼성은 매주 수요일 계열사 사장을 모두 모아 사장단회의를 열고 있다. 공휴일이나 선거일 등 특별한 날을 빼고는 어김없이 진행된다. 사장단회의가 진행되는 곳은 서울 서초사옥 삼성전자동 39층 강의실이다. 42층이 이건희 회장실, 41층이 이재용 등 부회장단 사무실, 40층이 그룹을 총괄하는 미래전략실이니 이를 제외하고는 가장 높은 곳에서 열리는 셈이다. 사장단회의는 선대인 이병철 회장 때 시작됐는데 너무 오래돼 언제부터 열렸는지 자료가 남아 있지 않다고 삼성 쪽은 밝혔다.

원래 사장단회의는 계열사별로 현황을 보고하고 향후 전략을 논의하는 자리였다. 이병철 회장은 사장들끼리 편하게 이야기하라는 뜻에서 회의에 거의 관여하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건희 회장이 사장단회의를 직접 챙기면서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사장단회의가 다양한 분야의 지식을 배우고 이를 통해 새로운 사업 전략을 찾는 단초를 마련하는 자리로 고정된 것이다. 사장단회의의 분위기가 확 바뀐 것은 2011년 초 이후로, 이때부터 외부 강사가 많이 등장했고 강의 주제도 경영·경제에 국한되지 않고 리더십·역사·인문학 등으로 다양화됐다. 하일성 전 한국야구위원회(KBO) 사무총장(프로야구 600만 관중의 성공 비결), 김난도 서울대 교수(2011년 한국 청춘들), 산악인 엄홍길(극한에의 도전), ‘나는 가수다’ 김영희 PD(세상을 바꾸는 혁신적 아이디어) 등 일반인에게 익숙한 이름들이 사장단회의 강사로 등장한 것도 이 시기 이후다.

강연하려는 사람 줄 섰다는 소문도

사장단회의의 강사와 강의 주제는 삼성이 현재 어떤 것을 고민하는지 엿볼 수 있는 바로미터다. 2012년 한 해 동안 이뤄진 44차례의 회의를 주제별로 구분하면 경영 관련이 11차례로 가장 많았고, 국제사회 이해에 대한 강의가 9차례로 그 뒤를 이었다. 특히 중국은 4차례나 주제로 다뤄지면서 삼성이 가장 많이 연구하는 지역으로 꼽혔다. 소통(4차례), 리더십(4차례) 등도 삼성이 깊이 고민하는 주제였다. 노자, 한비자, 역사, 한시 등 인문학 강의도 종종 눈에 띈다. 통섭, 융합, 창조적 파괴가 경영의 최고 화두가 된 덕분이다. 최진석 서강대 교수는 5월과 10월 ‘노자에게서 배우는 경영의 지혜’ ‘노자에게 배우는 리더십’이라는 사실상 똑같은 주제로 앙코르 강연을 하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강연 주제는 어떻게 정해질까. 삼성 쪽은 다양한 분야에서 추천을 받기도 하고 ‘지금 필요하다’ 싶은 분야를 특정해 강사를 찾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사장단회의를 진행하는 팀이 있긴 하지만 섭외와 회의 준비 등 실무만 담당하고 있다. 그 시기 가장 ‘핫’한 이슈를 정하는 게 기본이다. 지난해 말 중국에서 시진핑 체제 구성이 완료된 시기에 맞춰 12월12일 조영남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를 불러 ‘중국 제5세대 지도부 등장과 정책 전망’을 듣는 식이다. 지난해 총선 직후인 4월18일 김호기 연세대 교수를 불러 ‘우리 사회의 시대정신’이라는 주제로 강의를 듣기도 했다. 김호기 교수는 총선에서 민주통합당의 공천심사위원을 맡는 등 선거를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사람이다. 섭외는 보통 한두 달 전에 이뤄진다고 하니 삼성이 민주당의 승리를 예측한 것인지, 패배를 예견한 것인지는 미지수다.


강사는 대부분 대학교수다. 지난해 44차례 회의 중 26차례나 대학교수가 강사로 나섰다. 삼성 사장단회의는 예전에는 ‘강사의 무덤’이라고 불릴 정도였다고 전해진다. 삼성 사장들의 위세에 위축되는 측면도 있지만, 강의를 듣는 사장들의 호응이 별로 없어 강사의 진을 빼놓기 일쑤였다. 하지만 최근엔 관심 있는 주제가 나오면 질문이나 토론으로 이어지기도 하는 등 분위기가 달라지고 있다는 귀띔이다. 한 강사는 “그리 특별한 것은 없었다. 강의실같이 생긴 방에서 열심히 공부하는 듯한 분위기였다. 하지만 그 사람들이 대한민국에서 제일 바쁘고 몸값 높은 사람들이라는 생각을 하면 기분이 묘했다”고 말했다. 최근엔 삼성 사장단회의에서 강연을 했다는 것이 알려지면 당장 이름값과 몸값이 확 뛰기 때문에 강연을 하려는 사람이 줄을 잇고 있다는 소문도 나돈다. 물론 원한다고 아무나 설 수 있는 자리는 아니다. 강연료는 ‘시장가격’에 맞춰 지급된다고 삼성 쪽은 설명했지만 ‘삼성 프리미엄’이 조금 얹힌다는 후문이다. 강의가 끝나고 가끔 내부 전달사항 등이 발표되기도 하지만 늦어도 오전 10시 정도면 회의는 끝난다. 대부분의 경우 사장들은 1층에 진을 치고 있는 기자들의 질문 공세를 뚫고 각자의 회사로 돌아간다.

사장단회의의 변화 예고하는 걸까?

강사 명단을 살펴보면 삼성 쪽의 설명에 고개가 끄덕여지는 부분이 있다. 김호기 교수뿐 아니라 지난해 9월19일 ‘한국 경제의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강연한 장하준 영국 케임브리지대 교수 등은 대표적인 진보 학자로 꼽히는 인물들이다. 사실 눈에 띄는 보수 인사는 고성국 박사가 처음이다. 매주 회의가 끝날 때마다 브리핑을 통해 강사의 이름과 주제가 발표되기 때문에 대놓고 정치 편향을 드러내기 힘든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고성국 박사가 한국 정치를 설명하기 위해 등장했다는 것이 사장단회의의 변화를 예고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지나친 억측일까.

마지막으로, 통화가 된 몇 명의 강사들은 모두 사장단회의의 분위기나 질의 내용 등에 대해 굉장히 말을 아꼈다는 점을 밝히고 싶다. 삼성이라는 이름이 주는 ‘무거움’ 탓인지, 다른 이유가 있는지는 모르겠다.

이형섭 기자 한겨레 경제부 sub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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