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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쌀이 쌓이면 농민은 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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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1-09-05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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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급과잉으로 쌀값 폭락해 농촌대란 우려… 정부의 안정대책도 미봉책에 그쳐

사진/ 지난 8월 30일 전북 정읍시 이평면에서 열린 '쌀 전량 수매와 생산비 보장 궐기대회'(전농 제공)
중년을 넘긴 사람들 사이에 ‘그 시절을 아십니까’류의 대화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말이 있다. “배 꺼질라 뛰지마라”는 게 그것이다. 먹고살기 힘들었던 시절의 한 풍경이지만 지금은 걱정이 정반대로 뒤바뀌었다. 창고에 그득히 쌓인 쌀이 썩어날 정도로 넘쳐나 쌀값 폭락이 또다른 걱정거리가 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올해도 풍년이라고 하지만, 가을걷이를 코앞에 둔 농민들의 마음은 우울하기만 하다. 지난 8월30일에는 풍성한 황금빛 들녘 옆에서 전국농민회총연맹(이하 전농) 전북도연맹이 쌀가마를 불에 태우며 쌀값 안정대책을 요구하기도 했다. 물론 공급이 많으면 가격이 떨어지는 게 당연한 이치 아니냐면서 시름에 잠긴 농민들의 쌀값 보전 요구를 ‘무리한 것’이라고 일축해버릴 수도 있다. 그러나 쌀은 ‘단순한 상품’이 아니다. 여전히 한국인의 주곡인 쌀은 식량안보나 논이 갖는 환경적 가치를 감안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수요공급에 따른 시장질서에만 맡겨놓았다가는 국가의 근간이 흔들릴 수 있다. 쌀 수매물량과 수맷값을 국회에서 정하고, 농민들과 정부 사이에 쌀값 안정대책을 둘러싼 갈등이 터져나오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소비량 줄어들고 쌀농사는 늘어나


올 수확기는 물론 그뒤로도 쌀값이 크게 떨어질 것이라는 최근의 우려는 심각한 쌀 과잉공급에서 비롯된다. 쌀이 얼마나 넘치기에 아우성일까. 올해 말 쌀재고량은 유엔식량농업기구(FAO)가 권장하는 적정재고량(1년 소비량의 17∼18%인 550만∼600만섬)을 400만섬 정도 초과한 989만섬에 이를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96년 168만섬에 불과하던 쌀 재고량은 지난해 679만섬으로 늘었다. 최근 5년 연속풍작으로 해마다 생산량이 소비량을 초과하고 있는데다 우루과이라운드(UR) 농산물협정에 따른 외국쌀 의무수입량인 최소시장접근물량(MMA)이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올해 최소시장접근물량은 전체 소비량의 2.5%인 12만8천t, 89만섬에 이른다.

이런 와중에 올해 예상되는 생산량은 3650만섬으로, 이중 정부 수매물량 575만섬과 농협 및 민간 수매물량 750만섬, 농가소비 1122만섬을 빼고 나면 시장에 유통되는 건 1223만섬이다. 이 정도 쌀이 그대로 시장에 풀린다면 쌀값 폭락은 불을 보듯 뻔하다. 게다가 세계무역기구(WTO)와 합의한 농산물 국내보조금(AMS: 대표적인 것이 정부 추곡수매)감축 일정에 따라 추곡수매량은 지난해 629만섬에서 올해 575만섬으로 줄어들었다. 반면 1인당 연간 쌀 소비량은 지난 90년 119kg에서 올해는 90kg으로 줄어들 전망이다.

쌀 과잉공급이 빚어진 데는 이같은 쌀 소비량 감소 외에도 농산물시장에 대한 수입개방 탓이 크다. 작물마다 죄다 개방되면서 가격이 폭락하자 그나마 아직 완전개방되지 않아 안정적인 수입을 보장해주는 쌀로 농민들이 몰린 것이다. 쌀 소비가 급격히 줄고 있는데도 지난 97년 이후 쌀 재배면적이 오히려 늘고 있는 점이 이를 보여준다. 전농 이호중 정책부장은 “UR협상에 따른 시장개방조처로 외국산이 밀려들면서 가격폭락 사태를 맞자 농민들은 정부가 가격을 지지해주면서 수매해주는 쌀 재배로 몰리고 있다”고 말했다.

물론 정부가 가격을 떠받쳐주면서 생산된 쌀을 모두 수매해주면 농민들로서는 걱정할 게 없다. 그러나 국내보조금 감축에 따라 정부 수매량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고, 올해 수매물량은 생산량의 15%에 불과하다. 결국 쌀값문제는 민간 유통기능에 달려 있는 셈인데 재고량이 과잉상태가 되면 민간의 쌀 유통기능은 크게 위축될 수밖에 없다.

여기에서 등장하는 게 쌀의 계절진폭이다. 계절진폭은 수확기에 농민한테 쌀을 사들인 뒤 나중에 팔아 이익을 얼마나 남길 수 있는지를 재는 척도로, 수확기 쌀값과 이듬해 단경기(수확기 직전) 쌀값과의 차이다. 물론 수확기에는 공급이 넘쳐 쌀값이 싸고 단경기에는 반대로 쌀값이 오르는 게 당연한데 이 진폭이 크지 않으면 민간에서 쌀을 사들일 리 없다.

그러나 계절진폭은 지난 98년 평균 13.3%에서 올 들어 1.3%까지 떨어져 가격차이가 거의 없어진 상태다. 쌀 재고량이 넘쳐나기 때문이다. 결국 미곡종합처리장(RPC: 농협 및 민간의 쌀 저장시설) 등 민간 쌀 유통부문은 올 수확기에 매입을 꺼릴 수밖에 없고 농가에서는 막상 수확을 하고서도 쌀을 팔 데가 없는 상황이 닥치게 된다. 게다가 정부 수매물량이 축소된 만큼 수매량을 해마다 늘려온 전국의 미곡처리장은 계절진폭 축소와 재고누적으로 이미 파산이 속출하는 등 경영난에 허덕이는 실정이다.

재고누적 한계 이르러… 농촌경제 무너질 위기

사진/ 쌀 공급과인은 쌀 소비량 감소외에 농산물시장 수입개방 탓이 크다.(씨네21 정진환 기자)
그렇다면 쌀농가의 소득은 얼마나 될까. 지난해 쌀농가 평균재배면적 1ha(3천평)에서 생산비와 자가노력비 등을 뺀 쌀 재배농가당 순수입은 503만원으로 나타났다. 그런데 쌀 재고량이 그대로 방출되면 쌀값은 현재 80kg짜리 한 가마(16만원가량)가 내년에 12만∼13만원대까지 폭락할 것으로 우려되고 있다. 이렇게 폭락하면 1년 농가수입이 300만∼400만원대로 떨어져 농촌경제 자체가 무너지는 위기를 맞을 수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 농림부는 지난 8월30일 쌀값 안정대책을 내놓았다. 수확기에 쌀 매입량을 예년보다 200만섬 정도 늘리고 대신 정부의 추곡수매물량 방출은 줄이겠다는 게 골자다. 정부수매, 미곡종합처리장 자체 매입, 그리고 농협 시가매입 등 총 1325만섬의 벼를 수매하고, 민간업자들이 쌀을 많이 매입할 수 있도록 계절진폭을 늘리겠다는 것이다. 농림부 식량정책과 관계자는 “계절진폭이 적어도 3%대는 유지되도록 수급을 조절해나갈 방침”이라며 “재고가 넘치고 있지만 시장방출을 제한해 쌀값을 안정시켜나갈 것”이라고 설명했다. 농림부는 특히 쌀값 대책으로 △수탁판매제 △시가매입·시가방출제(조정보관제) △휴경보상제 등을 새로 도입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농민들은 시큰둥 하다못해 “정부가 쌀 정책을 포기하고 쌀값 하락의 부담을 농민에게 떠넘기려는 것”이라고 크게 반발하고 있다. 우선 수탁판매제를 보자. 이는 수확기에 미곡종합처리장에 벼 판매를 위탁하고 선도금으로 70%를 받은 뒤 나중에 내다팔 때 시장가격에 따라 나머지 금액을 정산하는 것이다. 수탁물량을 일정기간 시장에서 격리시켜 쌀값 안정을 꾀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쌀값 하락과 계절진폭 축소가 우려되고 이에 따라 농가손실이 뒤따를 게 뻔하기 때문에 정부의 손실보상약속이 없는 한 농민들이 수탁판매에 참여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농민단체는 “나중에 쌀값이 많이 오르지 않으면 정산할 때 미곡처리장에 들인 보관비와 이자를 농민이 부담해야할 판”이라며 “쌀값 하락의 위험과 미곡처리장 운영적자 책임을 농민에게 떠넘기려는 것”이라고 반발하고 있다.

시가매입·시가방출제는 농협중앙회가 자체자금으로 미곡처리장이 없는 농협을 통해 200만섬을 시가로 매입해 시장으로부터 격리시킨 뒤 단경기에 미곡처리장에 시가로 파는 것이다. 그러나 전농은 “산지가격으로 매입하는 것인 만큼 올 수확기에 폭락한 가격으로 쌀을 팔 수밖에 없는 상황이 올 것”이라고 예상했다. 경기도 안성에서 농사를 짓는 김동혁씨도 “수확기에 쌀값이 폭락하더라도 당장 돈을 마련하지 못하면 농가부채 상환압박에 시달리기 때문에 울며 겨자 먹기로 팔아넘길 수밖에 없다”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휴경보상제도는 일정기간 일정지역에서 쌀 농사를 짓지 않을 경우 보상을 해주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농촌경제연구원 박동규 박사는 “휴경보상제는 단기적인 과잉생산일 때 쓸 수 있지만 과잉이 지속되면 발을 빼기도 어렵다”며 “휴경보상제에 따른 생산감소분을 2004년 쌀 재협상 이후에 외국산 쌀이 대체해버릴 경우 정부는 돈만 날리는 격이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전농은 결국 “정부가 쌀문제를 시장기능에 맡기는 쪽으로 나아가고 있다”며 생산감축 운운하는 건 쌀산업 포기를 유도해 2004년 쌀개방 재협상에서 관세화로 개방하려는 게 아니냐는 의혹까지 제기하고 있다. 농협중앙회 이경원 양곡조사팀장은 “세계무역기구 출범으로 어쩔 수 없이 정부의 역할이 축소되자 농림부가 정부개입을 최소화하면서 대신 농협이 생산자단체로 시장에 개입해 쌀값 안정역할을 해주기를 바라고 있는 형편”이라고 말했다.

“쌀문제는 시장기능에 맡길 수 없다”

아무튼 외국쌀에 비해 6∼7배 비싼 우리쌀은 재고 급증에다 2004년 쌀 재협상을 앞두고 중대기로에 놓여 있다. 농민단체는 정부가 언발에 오줌누기식으로 대응하다가는 농촌이 살아남을 길이 없다며 재고 쌀을 북한에 지원하는 등 특단의 대책을 요구하고 있다. 경북대 김충실 교수(농업경제학)는 “정치권에서 선심성 정책으로 농가문제를 해결해주는 척하거나 농민을 동정의 대상 또는 선거철에 표를 의식한 흥정의 대상으로 보는 것부터 바꿔야 한다”며 “그래서인지 문제가 터지면 적당히 봉합하고 마는 정책만 나오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런 가운데 농림부 관계자는 “내년 추곡수매 자금 마련을 위해서라도 재고 쌀을 무작정 갖고 있을 수 없는 형편”이라며 “올 수확기는 넘긴다 해도 1년 지나면 또 재고가 꽉 찰 텐데 벌써부터 걱정”이라고 볼멘소리를 했다.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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