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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미국 신경제 벼랑에 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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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1-08-29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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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밋빛 전망 시들고 대다수 불행으로 내몰아… 불확실성 확산하는 금융시스템 도마에 올라

사진/ 미국 신경제 기관차 구실을 해온 뉴욕증시는 올 들어 FRB의 잇단 금리인하 조처에도 맥없이 무너지고 있다.
미국의 수도 워싱턴 한복판에 자리잡고 있는 세계은행에 들어서면 ‘우리의 꿈은 빈곤으로부터 해방된 세계’(Our dream is a wolrd free of poverty)라는 구호를 만난다. 하지만 바깥에서는 세계은행이 ‘빈곤을 세계화’시킨 주범으로 꼽혀, 9월 말 연차총회를 앞두고 분위기가 삼엄하다. 세계 각국에서 반(反)세계화 단체들이 워싱턴으로 몰려들어 세계은행과 국제통화기금(IMF)을 집중 성토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이 두 기관이 주도적으로 심어놓은 ‘세계화의 덫’이 구체적으로 세계경제를 어떻게 바꾸어놓았는지 한번 살펴보자. 러시아는 옛 소비에트연방이 해체된 뒤로 국제금융자본에 체제전환을 맡겨놓은 결과 1990년 이후 2000년 말까지 11년 동안 무려 1500억달러어치의 자본이 바깥으로 빠져나갔다. 이에 따라 러시아 국민 3명 중에 1명은 월 38달러 미만으로 생활을 하고 있다고 있다. 평균수명이 5년이나 낮아졌고 자살, 폭력, 알코올중독, 취약한 의료시스템 등 사회적 동기로 사망한 성인이 지금까지 1200만명을 넘어선 것으로 국제연합(UN)은 추정하고 있다.

미국 따라가기가 낳은 서글픈 현실들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초래한 재앙은 러시아에만 떨어진 게 아니다. 유엔개발계획(UNDP)의 보고에 따르면, 전세계 최고 갑부 200명의 순재산은 96년부터 99년까지 4년 만에 두배나 늘어나 평균 50억달러, 우리돈으로 64조원에 이른다. 이들 200명의 재산총액은 전세계 최빈인구 25억명의 재산을 합친 것과 같다. 전세계에 걸쳐 80개국에서 지난 10년 동안 실질GDP(국내총생산)가 줄었으며, 세계 인구의 절반인 30억명이 하루에 2달러 미만으로 생활하고 있다. 상위 20%의 부자나라 소득과 하위 20%의 가난한 나라 소득간 격차는 1900년 5배에서, 1960년 20배, 지금은 40배나 벌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세계화를 좀더 현실적으로 풀이하면 ‘미국 따라가기’이다. 미국식 체제와 제도, 경제활동방식을 갖춰 미국처럼 잘살아보자는 게 세계화의 논리이다. 미국에서는 이를 ‘신경제’라고 자랑한다. 정보통신기술의 끊임없는 혁신을 바탕으로 거래비용은 줄고 노동생산성은 높아져 낮은 인플레 속에서도 고성장을 지속하는 게 신경제이다. 앨런 그린스펀 미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은 “신경제는 슘페터가 말한 ‘창조적 파괴’, 즉 새로운 기술이 낡은 기술을 밀어내는 계속적 순환에 의해 생산단위당 노동비용을 줄임으로써 기업에 높은 수익을 지속적으로 제공해준다”며 경기순환에 따른 불황 가능성이 영원히 사라질 것처럼 선전해왔다. 실제로 올해 초까지만 해도 그린스펀 의장의 말은 ‘진리’로 통했다.

소수의 수혜자, 다수의 빈곤층

사진/ 신경제의 그늘이 갈수록 넓어지고 있다. 미국 대도시 어디에서나 거리의 걸인들을 쉽게 볼 수 있다.
70∼80년대 내내 투자부진과 제조업의 경쟁력 약화에 시달리던 미국경제는 90년대에 극적으로 고성장, 저물가, 그리고 높은 생산성 향상을 보여줬다. 실업률도 2000년에 사상 최저수준인 4% 미만으로 떨어진 적도 있다. 그러나 2000년 가을부터 닷컴 거품의 붕괴를 시작으로 성장은 둔화되고 실업률은 다시 높아져 신경제에 멍이 들기 시작했다. 지난해 5%에 이르던 GDP 성장률은 올해에는 1% 이하로 떨어질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이렇게 되면 미국은 1974∼75년 석유파동 이후 가장 극심한 경기하강 충격을 맞는다. FRB는 이런 충격을 막고, 무엇보다 신경제를 살려내기 위해 올 들어 7차례나 금리를 내렸지만 매번 별 신통한 효과를 얻지 못하고 있다. 금리를 내려 돈이 많이 풀리게 하면 주가가 오르고 소비도 늘어나야 하는데, 오히려 정반대이다. 그린스펀 의장이 말한 ‘신경제의 순환’을 미국의 주식투자자나 소비자들이 믿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요즘에는 미국 언론들에서는 ‘번영의 신경제’(New Economy of Prosperity)가 아니라 ‘불확실성의 신경제’(New Economy of Uncertainty)라는 말이 더 유행이다.

지난 10여년 동안의 신경제도 미국 안에서는 일부 계층만 실감을 했지 대부분 국민들에겐 사실 ‘빛좋은 개살구’였다. 미국 경제전문잡지 <포브스>에 따르면, 미국 내 최고갑부 400명의 재산은 1997∼99년에 평균 9억4천만달러나 늘어난 반면에 소득순위 하위 40% 가계의 순재산은 90년대 10년 동안 80%나 줄었다. 이 결과 현재 상위 1% 가계의 순재산이 나머지 95% 가계의 그것을 합친 것보다 더 많다. 98년 이후 마이크로소프트 빌 게이츠 회장의 연간소득은 미국 전체 45%의 하위계층 가구가 1년 동안 벌어들이는 소득을 몽땅 합친 것과 맞먹는다. 월트 디즈니사의 최고경영자(CEO) 마이클 아이스너 회장의 연봉은 그 회사 종업원들의 평균임금의 2만5천배에 이른다.

단지 상대적 빈곤의 문제가 아니다. 절대빈곤층의 비중이 크게 늘어나고 있다. 미국의 신경제 호황이 최고조에 이르던 지난 99년 9월, 미국 정부는 충격적인 경제수치 하나를 발표했다. 당시 정부가 정한 최저생계비(연 1만9500달러)에도 미치지 못하는 소득으로 살아가는 국민이 4600만명이라는 것이다. 이는 전체인구의 17%를 차지했는데, 사상 최고치이다. 벌어들이는 소득이 기초적인 생활비에도 못 미치면 결국 빚을 내 살아갈 수밖에 없다. 실제로 미국사람들 대부분은 주택할부금융과 자동차 할부금융, 신용카드 구매 등 미리 빚을 내서 물건을 구입한 뒤 돈을 버는 대로 갚아나가는 빚쟁이 생활에 익숙해 있다. 이런 소비자금융이 신경제의 빛이 어렴풋이 보이기 시작하던 90년대 초반부터 크게 늘었다. 급기야 99년 2분기부터는 가계의 평균가처분소득보다 소비지출이 더 많아져 평균저축률이 마이너스로 떨어졌다. 그해 미국 내 개인파산신청자 수는 140만명. 올 들어서도 미국 내 전역에서 개인파산신청자가 1시간에 7천∼1만명에 이른다고 한다.

금융거품 걷어내면 속 빈 강정

사진/ 미국 신경제는 절대다수의 빈곤과 소수의 성공으로 빛과 그늘이 뚜렷하게 갈리게 했다. 시카고의 한 공원에서 이민노동자들이 직장 내 차별에 항의하는 사위를 벌이고 있다.
미국 신경제의 두축은 정보통신기술과 주식이나 채권을 투자하는 직접 금융시장이다. 미국은 만성적인 무역수지 적자국가이다. 달마다 수백억달러씩 적자를 낸다. 올 들어 경기가 뚜렷한 하강국면에 접어들어 수입수요가 둔화되었다고 하지만 지난 6월 무역수지 적자는 294억달러로, 5월의 284억달러보다 더 늘었다. 여기에다 국가전체의 저축률도 마이너스이다. 국민 단위에서 보거나, 국민 개개인을 봐도 들어오는 돈보다 나가는 돈이 더 많은데 어떻게 견딜 수 있을까? 달러가치가 떨어지지 않는 게 의아하다. 탈출구는 세계금융의 중심이라는 뉴욕의 월가에 있다. 미국의 주식과 채권에 잔뜩 장밋빛 전망을 덧붙여 국내외에서 돈이 들어오게 하는 것이다. 해외자본의 유입과 개인투자자들의 투자열기는 주가상승을 통해 이른바 ‘자산효과’(Wealth Effect)를 낳는다. 투자해놓은 주가가 오르거나 또는 미래에 오를 가능성을 믿고 소비지출이 크게 늘어나 경기호황의 선순환이 이어져 온 것이다. 그러나 지난해 하반기부터 주가가 곤두박질친 다음부터는 자산효과에 따른 경기선순환은 완전히 사라졌다.

최근 우리나라에 소개된 <월스트리트>의 저자 더그 헨우드는 “신경제의 본질은 금융거품”이라고 분석한다. 즉 실물경제의 수익성보다 훨씬 높이 치솟은 주가에 뒷받침된 소비지출과 미국으로의 세계자본의 유입이 거품을 만들어내고, 바로 이 거품이 90년대 미국경제 호황의 배경이라는 얘기이다. 하지만 주가폭락에 따라 이제는 역(逆)자산효과가 나타나, FRB가 돈을 싸게 빌릴 수 있게 하고 부시 정부가 세금환급을 해주더라도 소비는 더욱 위축되고 기업수익 악화로 투자도 함께 감소함으로써 불황에 접어들었다는 게 헨우드의 분석이다. 여기에 사상최대의 경상수지 적자가 곧 초래할 달러화 가치하락과 자본유출이 가세하면 미국경제는 그야말로 수렁에 빠질 가능성이 높다. 미국경제가 헤어나기 어려운 수렁에 빠진다는 것은 곧 세계대공황을 의미한다. 신경제와 세계화의 특징중 하나가 ‘미국 금융시장을 중심으로 한 전세계 경제의 네트워크화’이다. 미국 월가에서 기침소리가 나면 국내 금융시장은 곧바로 ‘독감’에 걸려버리는 게 현실이다.

다수의 불행을 언제까지 즐길 건가

사진/ 미국 경제대통령으로 불리는 앨런 그린스펀 FRB 의장도 경기순환에 따른 불황을 막지 못하고 있다.(GAMMA)
미국은 지금 신경제의 희망을 다시 한번 되살리느냐, 아니면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 하느냐는 중대한 기로에 서 있다. 경제전문가들 사이에 논쟁이 활발하게 벌어지고 있지만 엇갈리지 않는 한 가지 지적은 ‘럭비공처럼 어디로 튈지 모르는 금융시스템’을 고쳐야 한다는 것. 모든 금융재원이 월가의 수익성 잣대로만 움직이는 시스템을 근본적으로 뜯어고치지 않고서는 경기가 회복되더라도 활황국면은 그리 오래가지 못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아직 미국의 여론은 신경제의 거품에 대한 미련을 떨쳐버리지 못한 것 같다. 얼마 전 미국 노동부는 7월 말 실업률이 4.5%로 높아졌고, 제조업 부문에서 4만9천명이 해고되었다는 통계를 발표했다. 이 발표는 뉴욕증시에 찬물을 끼얹었다. 애초에 주식애널리스트들이 예상했던 실업사태보다 그리 심각하지 않고, 따라서 FRB의 금리 추가인하 가능성이 낮아졌기 때문이다. 지금 미국의 월가는 ‘더욱 많은 사람들의 경제적 불행’에서 새로운 희망의 싹을 찾고 있는 중이다.

워싱턴·뉴욕=글 박순빈 기자 sbpark@hani.co.kr/
사진 강재훈 기자 k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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