헐값에 덤까지 얹혀 해외매각 추진… 정부 압력설 나돌고 AIG는 딴소리 횡표
정부가 국제통화기금(IMF) 졸업을 공식선언한 지난 8월 23일 여의도 금융감독원 청사 9층 기자실. 오후 1시가 가까워지면서 주위가 갑자기 소란스러워졌다. 이미 이곳저곳에 방송사 카메라가 배치된 뒤였다. 기자실 한편에 자리잡은 발표장은 방송·신문·외신기자들로 북새통을 이루기 시작했다. 약속시간에 맞춰 이우철 금융감독위원회 감독정책2국장이 단상에 모습을 드러낸 뒤에도 어수선한 분위기는 한동안 이어졌다. ¨빨리, 빨리 보도자료 줘야지.˝¨아~이, 이쪽은 왜 안주는 거야.˝¨뒤쪽으로도 좀 넘겨주세요.˝
정부·AIG컨소시엄의 양해각서 체결
소동이 다소 잦아들 무렵 이윽고 이우철 국장이 발표문을 읽어내려갔다. ¨정부는 현대주타신탁증권(이하 현투증권)의 경영정상화를 위해 미국 AIG컨소시엄과 공동출자한다는 양해각서(MOU)를 체결…정부와 AIG컨소시엄은 출자구조 등 세부협의를 거쳐 올해 10월 말까지 본계약을 맺고 11월 말까지 출자대금을 납입할 계획….˝ 좀 딱딱한 발표문인데, 간단히 요약하면 현투증권을 미국 회사에 팔아넘긴다는 얘기가 된다.
은행 거래나 할 뿐 주식시작이나 투신사 근처에도 가보지 않은 이들은 이 대목에서 다소 의아한 생각이 들 수도 있을 것 같다. 증권사 한곳 팔아넘기는 게 뭐 그리 대수라고 호들갑인가. 또 이름으로 보아 현대그룹이 주인인 민간회사일 듯한데, 왜 정부가 나서고 난리를 친단 말인가. 현투증권의 뿌리는 198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회사 이름은 국민투자신탁. 은행과 증권사 등 국내 금융기관들이 중심이 돼 자본시장 육성을 위해 설립했다. 흔히 국투로 불리며 한국투신, 대한투신과 함께 투신권의 3대축을 이뤘다. 외환위기를 맞기 전인 97년 3월 현대그룹에 인수된 뒤 국민투자신탁증권(주)으로 상호가 바뀌었다. 이는 투신사 지분제한 규정을 피하는 동시에 수익증권(투신사 상품) 판매·운용조직의 분리를 꾀하는 정부 방침에 맞추기 위한 것이었다. 이듬해 자회사로 운용전문회사(현대투자신탁운용)를 설립했으며 99년 4월 현대투자신탁증권(주)으로 이름을 다시 바꾸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어찌됐건 문제의 현투증권은 하이닉스반도체(옛 현대전자) 41.9%, 현대증권 18.6%, 현대중공업 6/1% 등 현대 계열사들(69.1%) 소유로 돼 있다. 원칙적으로는 문을 닫든 팔아먹는 현대그룹 소관인 셈이다. 그런데도 정부가 이 문제에 엮인 것은 어찌된 사연일까. 현투증권은 현대그룹에 인수되기 오래 전부터 부실채권 편입과 주식시장 침체로 누적손실을 잔뜩 안고 있었다. 여기에 99년 8월 대우사태 여파로 자기자본을 홀랑 까먹는 지경에 이르렀으며 특히 지난해 현대그룹 경영권 분쟁, 현대건설 유동성 위기에 따른 신뢰 추락으로 자금이 줄줄이 빠져나갔다. 99년 말 22조원에 이르던 수익증권 수탁고가 지난해 말 12조 6천억원, 올해 7월 말 12조 5천억원으로 반토막이 났다. 경영사정이 더욱 악화됐음은 물론이다. 자기자본 잠식 규모가 3월 말 현재 1조원을 웃돌고 있다. 사정이 이러한데도 유동성 위기를 겪고 있던 현대그룹으로선 이를 자체적으로 해결할 능력을 잃고 있었다. 정부가 민간기업 매각에 나선 까닭은
그렇다면, 문을 닫으면 그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지도 모르겠는데 문제가 그렇게 간단치 않다. 현투증권의 수탁고가 반토막났지만 여전히 12조원을 넘는다. 이 돈은 물론, 고객들의 맡긴 것이다. 회사가 문을 닫을 경우 고객들이 한꺼번에 몰려들어 돈을 내놓으라고(환매) 요구할 게 뻔하다. 이렇게 될 경우 금융시장은 일대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다. 고객의 환매요구에 맞닥뜨린 현투증권과 운용사인 현투운용은 주식, 채권 등 운용자산을 시장에 내다팔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물론 그러고서도 미처 지불을 못해 파산을 선언하게 될 공산이 크다. 파산은 여기사 끝나지 않고 한국투신, 대한투신 등 비슷한 형편의 다른 회사들에 불똥이 튈 개연성이 높다. 이 때문에 정부로선 팔짱만 끼고 지켜볼 수만은 없는 것이다.
현투증권 처리과정에서 미국의 보험그룹인 아메리칸 인터네셔널 그룹(AIG)이 주연배우로 등장한 것은 지난해 6월, 금감원과 현투증권이 경영정상화를 위한 경영개선협약을 맺은 뒤였다. 당시 협약에서 현투증권은 2000년 말까지 유상증자, 외자유치를 통해 자본잠식 1조 2천억원을 메우기로 했다. 이를 지키지 못할 경우 담보로 제공된 계열사 보유주식 1조7천억원어치를 처분한다는 약속도 여기에 포함됐다. 대신 금융당국쪽에선 부실금융기관으로 지정하는 조처를 미뤄줬다.
현투증권이 경영정상화 방안의 핵심으로 외자유치를 제시한 뒤 물고 들어온 게 AIG였으며 6월22일 현대와 AIG컨소시엄 사이에 양해각서를 맺는 진전이 이뤄졌다. 이 양해각서에서 AIG, 로스앤컴퍼니를 비롯한 6개 투자기관으로 짜여진 컨소시엄은 8억 1500만달러(9천억원)를 투자, 현투증권·운용의 경영권을 인수키로 했다. 그렇지만 양해각서는 법적구속력이 없는 것이어서 이후에도 숱한 우여곡절을 겪게 된다.
문제는 그 우여곡절이라는 게 단순히 인수조건의 변화에 머물지 않았다는 점이다. 인수대상에 갑자기 현대증구너이 추가로 포함되고 정부가 공동 출자자로 엮이는 아주 희한한 모양새로 귀결된 것이다. 더욱이 그 조건이라는 게 가관이다.
지난해 8월 2차 양해각서가 체결된 지 꼭 1년 만에 맺어진 올 8월의 양해각서 내용을 보자. AIG는 투자금 1조1천억원 가운데 6천억원은 현투증권에 직접 출자하고 4천억원과 1천억원은 각각 현대증권과 현투운용에 출자한뒤 현투증권에 재출자하는 방법으로 현대증권·현투증권·현투운용을 모두 인수하기로 했다. 이 가운데 현대증권 주식 인수가격은 기준가격 대비 10% 할인된 주당 8940원으로 정해졌다. AIG로선 1조1천억원을 들여 현투증권·운용뿐 아니라 멀쩡한 현대증권을 덤으로 챙긴 것이다. 더욱이 9천억원의 공적자금 투입을 이끌어내 안전장치까지 확보하는 성과를 거뒀다. 현대와 AIG 사이의 2차 양해각서 체결 되 협상의 주체로 떠오른 정부가 철저히 농락당했다는 평가가 나오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책임은 없고 권리만 있는 대주주?
AIG컨소시엄이 현대증권에 4천억원을 출자하고 받게 될 신주의 조건을 보면, 이번 양해각서가 얼마나 엉터리인지 명백해진다. AIG쪽이 받는 신주는 최저 5%의 배당과 의결권까지 붙어 있는 우선주이다. 우선주는 보통주보다 '우선' 배당을 받기 때문에 통상 의결권이 없다는 점과 대조적이다. 더욱이 기준가보다 10% 싼값에 배정되는 주식이란 사실을 감안해야 한다. AIG컨소시엄은 경영에 문제가 생겨 회사를 청산할 때도 남은 재산 분배과정에서 우선순위에 서게 되므로 리스크(위험)가 거의 없다고 볼 수 있다. 권리는 많고 책임은 적은 대주주가 되는 셈이어서 도무지 안뒤가 맞지 않는다.
현대증권쪽은 어떤가. 아무것도 얻는 게 없다. AIG쪽에 최소 5%의 확정배당을 해줘야할 짐을 고스란히 떠안는데다 경영권이 넘어가는데도 들어오는 돈은 한푼도 없다. AIG컨소시엄의 출자금 4천억원은 모두 현투증권(순자산가치가 마이너스인)으로 쏙 빠져나가게 설계돼 있기 때문이다. 소액주주들이 엉뚱하게 피해를 입게 된다는 점도 중대한 사안이다. 회사에 실질적으로 자금이 유입되지 않는 유상증자로 인해 주식물량이 늘어나는 만큰 지분이 대폭 희석돼 주주들이 재산손실을 입게 되는 것이다. 현대증권 이사회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할 충분한 사유가 된다.
현대증권쪽은 왜 이처럼 납득하기 어려운 조건을 받아들였을까. 이 대목에선 금감위와 현대증권 내부의 얘기가 엇갈리며 이는 앞으로 두고두고 말썽을 일으킬 것으로 보인다.
현대증권 고위관계자는 "현대증권은 이번 협상에서 완전히 배제됐다"며 "금감위가 (신주배정에 관하) 모든 조건을 적은 서류를 준비해와 현대증권쪽에선 서명만 하도록 요구했다"고 말했다. 이 관게자는 "(금감위가 협상타결을 발표하기 전날이) 22일에는 오후 2시부터 2시간 동안, 이어 저녁에 다시 한번 임원(등기임원)들이 금감위에 불려갔다"고 털어놓았다. 금감위가 AIG와 벌인 협상에서 밀려 현대증권에 압력을 행사했다는 것이다.
본계약까지의 험난한 여정 불보듯 뻔해
이에 대해 금감위 관계자는 "현대증권 임원들이 그날 금감위에 들어온 건 사실이지만 '건의할 게 있다'며 (그쪽에서 재발로) 찾아온 것"이라며 압력설을 전면 부인했다. 그는 또 신주배정과 관련한 협상은 전적으로 현대증권과 AIG 사이에 이뤄졌다는 점도 덧붙여 강조했다.
지금으로선 양쪽의 주장을 명확히 가리리 어렵다 .하지만 현대증권 관계자는 "나중에라도 크게 말썽이 될 때를 대비해 모든 증거자료를 확보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압력설을 터무니없다고 보기 어려운 대목이다. 더욱이 첨여연대가 (금감위 압력설을) 기정사실로 못박고 나선 점이 주목된다. 참여연대는 협상타결 발표 직후 내놓은 논편을 통해 "정부는 22일에 현대증권 이사들을 금감위로 불러들여 이사회 개최와 협상 승인을 강요하고 23일 정부 발표에 맞춰 오전중 이사회를 열도록 강요, 부당한 '압력'을 행사했다"고 주장했다. 첨여연대는 "우량한 상장기업에 부당하게 압력을 행사해 부실계열사를 지원하고 주주이익을 침해하게 한 것은 정부의 개혁정책을 스스로 포기한 것"이라고 비난했다.
첩첩산중이라고,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이미 맺은 약속이 터무니없는데다 이마저 깨질 가능성이 고개를 들고 있는 것이다. AIG는 정부의 협상타결 발표 다음날 공식자료를 내고 "현대증권 이사회가 결정한 신주 발행조건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선언했다 주당 8940원이 너무 비싸다는 것이다. 전날 금감위 이우철 국장이 "이번 양해각서는 구속력 있는(binding) 것이어서 이 조건 그대로 본게약(10월)까지 갈 것"이라고 한 발언은 이 한방으로 간단하게 뒤집혔다. 금감위는 AIG컨소시엄이 현대증권 이사회 의사록을 확인한 뒤 양해각서를 보냈다고 밝히고 있지만, AIG쪽에선 다른 목소리를 내고 있으며 발행가격을 주당 7천원으로 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신주 발행가격을 7천원으로 낮출 경우 가뜩이나 들끓고 있는 헐값매각 시비가 더욱 거세질 게 뻔하다. 더욱 문제는 기준가대비 할인율이 30%에 달해 제3자 배정 때 10% 안쪽으로 묶고 있는 법규에 정면으로 위배된다. 적어도 발행가격면에서는 정부나 현대증권이 더이상 양보할 수 없다는 것이다. 반면, AIG로서는 컨소시엄에 끌어들인 주자자들의 수익률을 맞춰주기 위해 최대한 발행가격을 낮춰야 할 처지인 것은 물론이다.
어쩌다 일이 이 지경으로 꼬였을까.
정부는 지난해 4월 투신사 지원방안을 발표하면서 한투, 대투와 달리 현대투신에 대해선 지원을 유보했다. 뚜렷한 대주주가 있는 현투에는 공적자금을 투입할 명분이 없었다는 점에서 이런 방침은 일면 타당성이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렇지만, 이는 두고두고 현투 처리과정에서 걸림돌로 작용했다. 문을 닫을 수는 없고 정부지원도 없는 상태에서는, 외자유치라는 외길 수순을 밟을 수밖에 없었다. AIG컨소시엄은 이런 약점을 십분 활용, 현대증권을 챙기고 정부로 하여금 1조원에 가까운 공적자금을 투입토록 하는 수완을 발휘했다. 결국, 정부로선 줄 건 다 주고 공적자금 투입을 않는다는 애초의 약속도 지키지 못하고 말았다.
누가 이런 불행한 사태를 만드었나
물론, 이를 두고 마냥 정부의 협상력 부재라고 몰아치기는 어려울 것이다. 현대투신문제를 가능한 한 빨리 매듭지어 금융시장 안정을 꾀해야 한다는 절박한 상태에서 선택의 폭이 그다지 넓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외자유치라는 단일안에 목을 매는 방식으로 진행시킨 데 따른 필연적인 귀결 아닌가 하는 안타까움이 남는다. 여기에는 정부가 IMF 부채상환 시기에 맞춰 성공적인 외자유치와 투신 구조조정으로 호도하기 위해 협상을 무리하게 진행한 것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도 덧붙는다. 현대투신증권 처리과정을 보면서, 이와 마찬가지로 해외매각에 목을 매고 있는 대우자동차의 우울한 앞날을 떠올린다면 너무 지나친 비관일까.
김영배 기자 kimyb@hani.co.kr

사진/ 현투증권의 양해각서 체결은 누가 주도했는가. 해외매각을 둘러싸고 '헐값 논란'이 일고 있는 현투증권.(강창광 기자)
은행 거래나 할 뿐 주식시작이나 투신사 근처에도 가보지 않은 이들은 이 대목에서 다소 의아한 생각이 들 수도 있을 것 같다. 증권사 한곳 팔아넘기는 게 뭐 그리 대수라고 호들갑인가. 또 이름으로 보아 현대그룹이 주인인 민간회사일 듯한데, 왜 정부가 나서고 난리를 친단 말인가. 현투증권의 뿌리는 198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회사 이름은 국민투자신탁. 은행과 증권사 등 국내 금융기관들이 중심이 돼 자본시장 육성을 위해 설립했다. 흔히 국투로 불리며 한국투신, 대한투신과 함께 투신권의 3대축을 이뤘다. 외환위기를 맞기 전인 97년 3월 현대그룹에 인수된 뒤 국민투자신탁증권(주)으로 상호가 바뀌었다. 이는 투신사 지분제한 규정을 피하는 동시에 수익증권(투신사 상품) 판매·운용조직의 분리를 꾀하는 정부 방침에 맞추기 위한 것이었다. 이듬해 자회사로 운용전문회사(현대투자신탁운용)를 설립했으며 99년 4월 현대투자신탁증권(주)으로 이름을 다시 바꾸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어찌됐건 문제의 현투증권은 하이닉스반도체(옛 현대전자) 41.9%, 현대증권 18.6%, 현대중공업 6/1% 등 현대 계열사들(69.1%) 소유로 돼 있다. 원칙적으로는 문을 닫든 팔아먹는 현대그룹 소관인 셈이다. 그런데도 정부가 이 문제에 엮인 것은 어찌된 사연일까. 현투증권은 현대그룹에 인수되기 오래 전부터 부실채권 편입과 주식시장 침체로 누적손실을 잔뜩 안고 있었다. 여기에 99년 8월 대우사태 여파로 자기자본을 홀랑 까먹는 지경에 이르렀으며 특히 지난해 현대그룹 경영권 분쟁, 현대건설 유동성 위기에 따른 신뢰 추락으로 자금이 줄줄이 빠져나갔다. 99년 말 22조원에 이르던 수익증권 수탁고가 지난해 말 12조 6천억원, 올해 7월 말 12조 5천억원으로 반토막이 났다. 경영사정이 더욱 악화됐음은 물론이다. 자기자본 잠식 규모가 3월 말 현재 1조원을 웃돌고 있다. 사정이 이러한데도 유동성 위기를 겪고 있던 현대그룹으로선 이를 자체적으로 해결할 능력을 잃고 있었다. 정부가 민간기업 매각에 나선 까닭은


사진/ "헐값이라도 좋다. 해외에 팔 수만 있다면…?" 현투증권의 해외매각 성사를 발표하는 금감위 이우철 감독정책2국장.(강창광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