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은행·석진강 변호사의 치열한 법정다툼… 누가 61억원 예금계좌를 차지할 건가
서울역 앞 대우센터빌딩의 하나은행 대우센터지점. 대개 은행이 건물 1층에 있는 것과 달리 이 은행 점포는 11층 한쪽 구석에 ‘조용히’ 자리잡고 있다. 11층에 있기도 하거니와 작은 입간판 하나뿐인 입구에 드나드는 고객도 뜸한 탓에 거기 있는 듯 없는 듯한 게 아무래도 일반손님은 도무지 신경쓰지 않는 눈치다. 그런데 이 점포에 있는 61억원짜리 예금계좌를 놓고 1년 넘게 은행쪽과 한 변호사가 치열한 법정다툼을 벌이고 있다.
대우그룹과 무관한 김 전 회장 개인 계좌
흥미로운 건, 다툼은 불꽃 튀게 전개되고 있지만 양쪽 당사자 모두 이 법정싸움이 바깥 세상에 알려지는 것을 꺼린 채 조용히 끝나기만 바란다는 점이다. 마치 이 점포가 조용히 자리잡고 있듯. 그런데 정작 흥미를 끄는 건 또다른 데 있다. 이 예금계좌의 주인이 바로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라는 사실이다. 덧붙여 이 돈은 순전히 김 전 회장 개인 이름의 계좌로, 대우그룹과는 무관하다.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던 김우중 전 회장은 넓은 세계를 ‘도망자 신세’로 떠돌며 자신이 ‘이미 했던 일’을 정리하는 회고록을 쓰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예금의 주인은 해외 도피중인데 주인이 빠진 상태에서 왜, 어떻게 예금을 둘러싼 다툼이 빚어지고 있는 것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돈은 이미 예금주인 김 회장의 손을 떠났고, ‘그뒤’ 누가 새 주인이 될 것인지를 가리고 있는 중이다. 그 내막을 들여다보자. 이 61억원짜리 예금을 놓고 싸우고 있는 양쪽 당사자는 김 전 회장의 법률대리인인 석진강(62) 변호사와 하나은행이다. 석 변호사는 김 전 회장과 ‘친구’ 사이로 24년째 대우그룹 법률고문을 맡고 있다. 법정다툼은 지난해 4월 석 변호사가 법원으로부터 이 예금에 대한 채권압류 및 전부(轉付)명령 집행문을 발부받으면서 시작됐다. 전부는 갑이 을의 채권자이고 을 또한 병의 채권자일 때 갑이 을 대신 제3채무자인 병으로부터 채권을 변제받는 것이다. 석 변호사는 김 전 회장이 자신에게 끊어줬다는 61억원짜리 약속어음을 근거로 법원에서 전부명령을 받아낸 뒤 문제의 예금을 자신에게 지급하라고 하나은행에 요구했다. 둘 사이에 약속어음이 오고간 과정에 대해 석 변호사는 <한겨레21>과 만나 이렇게 말했다. “대우가 한창 잘 나갈 때 내 돈 50여억원을 김 회장한테 맡겼다. 변호사 일을 하면서 돈을 얼마 벌지 못했는데 당시 대우가 개발사업도 많이 하던 때라 맡기면 두배 이상 불려서 줄 것으로 믿고 맡긴 것이다. 그런데 그동안 김 회장이 이 돈에 대해 아무런 말도 없다가 덜컥 대우사태가 터지고 말았다. 그래도 내 몫은 김 회장이 따로 챙겨놨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아무것도 해놓은 게 없었다. 서운했다. 그래서 맡긴 돈에 대한 채권으로 대신 약속어음을 건네받은 것이다.” 맡긴 돈을 돌려주지 못하게 되자 김 전 회장이 대신 그 돈에 대한 변제에 갈음하는 약속어음을 발행해줬다는 얘기다. 그는 또 당초 김 전 회장한테 50여억원을 맡겼지만 그동안의 이자 등을 감안할 때 61억원 이상은 받아야 한다고 덧붙였다. 약속어음이 발행된 날짜는 지난 99년 10월1일로, 김 전 회장이 한국을 떠나기 10일 전이다. ‘발행인 김우중, 수취인 석진강’이라고 적힌 이 약속어음의 액면가는 61억원으로 김 전 회장의 예금계좌에 든 돈과 정확히 일치한다. 이에 대해 석 변호사는 “당시 김 회장이 ‘하나은행에 내 돈 60여억원이 있으니 찾아써라’고 하면서 백지 약속어음을 발행해 줬다”며 “은행에 확인해보니 원래 예금 60억원이 이자가 붙어 61억원으로 늘어나 있었고 그래서 내가 어음에 61억원이라고 적어 넣었다”고 말했다. 출국 직전 석 변호사에게 약속어음 발행
그런데 다툼이 생긴 건 그때부터. 석 변호사가 하나은행에 예금지급을 요청했으나 은행쪽은 이미 내부적으로 창구에 지급정지 조처를 내려놓은 상태였다. 하나은행은 왜 그런 조처를 취했던 것일까. 하나은행쪽의 설명을 들어보자. “하나은행도 대우계열사에 막대한 돈을 대출해주고 못 받고 있는 채권금융기관이다. 우리가 대우계열사에 돈을 대출해줄 때 김 전 회장이 연대보증을 섰다. 그래서 보증채무자인 김 전 회장의 예금이라도 대출채권 대신 회수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지급정지를 시켜놓았던 것이다.”
일이 꼬이게 되자 석 변호사가 즉각 법적 대응에 나선 건 그의 직업만 보더라도 당연한 일이었다. 석 변호사는 약속어음을 받은 지 한참 지난 지난해 4월3일 국내에 있는 김 전 회장의 비서(김 전 회장의 법률대리인 자격)와 함께 공증인사무실을 찾아가 이 어음에 대한 공증을 받았고, 다시 이 약속어음공정증서를 근거로 지난해 4월17일 법원으로부터 전부명령 집행문을 받아내 강제집행에 나섰다. 갑(석 변호사)은 약속어음을 근거로 을(김 전 회장)의 채권자이고 을은 또 예금계좌를 근거로 병(하나은행)의 채권자인데, 전부조처를 통해 문제의 예금계좌에 대한 채권자 지위를 김 전 회장에서 석 변호사에게 이전하라는 게 전부명령이다. 여기까지 간단히 정리하면, 하나은행과 석 변호사는 둘다 김 전 회장의 채권자인데 맡긴 예금과 관련해 김 전 회장은 예금 지급의무를 진 하나은행에 대해 채권자이기도 한 셈이다.
그러나 여기서 일은 다시 한번 꼬이게 된다. 이틀 뒤인 4월19일, 법원으로부터 느닷없이 전부명령 집행문을 송달받은 하나은행쪽이 이날 즉각 이 예금을 대우계열사에 대한 대출채권과 상계처리해버린 것이다. 물론 법률상 제3자로부터 전부명령이 도달했더라도 송달받은 쪽이 해당 예금에 대해 그 전에 발생한 기존 채권을 갖고 있다면 상계처리할 수 있다. 하나은행은 “김 전 회장은 하나은행이 대우계열사에 빌려준 대출채권의 보증채무자인 만큼 은행이 문제의 예금을 얼마든지 상계처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하나은행, 대우계열사 대출채권과 상계처리
그러나 석 변호사쪽은 “하나은행이 상계처리할 수 없는 처지인데도 부당하게 상계처리했다”고 맞받아치고 있다. 대우계열사가 기업개선작업(워크아웃)에 들어가면서 모든 채무변제가 2004년까지 유예됐는데 하나은행도 채권금융기관으로 워크아웃 협약에 참여한 이상 채무변제 날짜가 아직 도래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주채무자인 대우계열사의 채무변제 날짜가 2004년 이후로 늦춰진 만큼 연대보증인인 김 전 회장의 채무도 함께 미뤄진 것인데 하나은행이 부당하게 상계처리했다는 얘기다.
이렇게 되자 석 변호사는 그 즉시 지난해 5월, 하나은행이 상계처리한 김 전 회장 예금을 자신에게 돌려달라며 서울지방법원에 전부금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이 소송은 아직까지 판결나지 않은 채 공방만 전개되고 있다. 공방의 쟁점은 △석 변호사와 김 전 회장 사이에 실제로 자금 거래관계가 있었는지 △하나은행이 전부명령 도착 즉시 상계처리한 게 효력이 있는지 여부인 것으로 알려진다.
우선 하나은행은 “어떻게 상식적으로 재벌회장이나 되는 사람이 61억원에 불과한(?) 돈을 변호사한테 꿀 수 있느냐”며 “사실은 실질적인 대차관계도 없이 약속어음이 발행된 것같다”고 주장하고 있다. 61억원짜리 약속어음 자체가 허위로 발행된 가장채권이라는 것이다. 하나은행쪽은 특히 “김 전 회장이 예금을 직접 달라고 하기에는 사회적 이목 등 여러 껄끄러운 점이 있어서 직접 반환청구를 못하고 대신 석 변호사를 끼워넣어 있지도 않은 허위채무를 부담한 것처럼 속인 뒤 약속어음을 발행한 것 같다”며 “석 변호사가 김 전 회장의 노후자금을 관리해주려는 의도를 갖고 있는 건 아닌지 의문이 든다”고 주장했다.
“일반 채권자 무시한 예금 독차지는 불법”
그러나 석 변호사쪽의 반박도 만만치 많다. 석 변호사는 “하나은행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데, 문제의 돈은 하나은행이 주장하듯 ‘빌려준’ 돈이 아니라 ‘맡긴’ 돈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석 변호사쪽은 아직까지 김 전 회장에게 돈을 맡겼다면 그 과정에서 주고받았을 수 있는 증서 등은 법원에 제시하지 않거나 못하고 있다. 이에 대해 석 변호사쪽은 법원에 제출한 변론 준비서면에서 “약속어음이 허위라는 하나은행쪽 주장은 전부금 청구를 거절할 수 있는 법률상의 주장이 될 수 없다”면서 “억측에 불과하다”고 일축했다.
또다른 쟁점인 전부명령 도착 즉시 하나은행이 상계처리한 조처의 효력을 다투는 부분은 천문학적 규모의 대우 분식회계사건과 맞물려 있다. 석 변호사쪽은 대우계열사의 워크아웃으로 채무변제가 유예된 만큼 하나은행이 대우계열사 대출금 채권과 김 전 회장의 예금을 상계처리한 것은 무효라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하나은행은 “당시 상계처리에는 아무런 하자도 없다”며 “설사 대출채권과 상계처리가 어렵더라도 대우계열사의 대규모 분식회계가 드러난 만큼 분식회계에 따른 불법행위채권과 상계할 수도 있다”고 응수하고 있다. 대우가 재무상태상 정상적으로는 도저히 대출받을 수 없는 처지였는데도 김 전 회장이 계열사 사장단에 분식회계를 지시한 것으로 드러났다는 점을 강조하고 나선 것이다. 즉, 회계장부를 조작하는 방식으로 하나은행을 속여 대출받았기 때문에 대출시점 자체부터 불법행위가 있었고 은행은 이런 불법행위를 근거로 얼마든지 상계처리해 채권을 회수할 수 있다는 게 하나은행쪽 논리다.
이 싸움은 지난 6월 이번에는 하나은행이 석 변호사를 상대로 사해(詐害)행위취소청구소송을 제기하면서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다. 약속어음이 허위로 발행된 것이고 따라서 법원이 이미 내린 채권압류 및 전부명령을 취소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하나은행도 약속어음이 허위로 발행됐다는 점을 입증할 뚜렷한 근거자료는 제출하지 못하고 있다.
맞소송을 제기한 하나은행쪽은 특히 약속어음 부분말고도 김 전 회장이 사해행위를 했다고 주장한다. 하나은행은 소장에서 “김 전 회장은 분식회계 지시를 통해 금융기관의 대출채권 회수를 불가능하게 만든 불법행위책임이 있을 뿐만 아니라, 약속어음이 진정으로 발행됐다 하더라도 하나은행 등 다른 채권자들이 있는 줄 알면서도 악의적으로 석 변호사한테만 채무를 갚으려고 한 만큼 일반 다른 채권자들의 이익을 해친 사해행위를 저질렀다”고 주장했다. 김 전 회장과 석 변호사간에 실제로 채권채무관계가 있다손치더라도 채권을 일반 채권자들하고 공평하게 나눠가져야 하는데 의도적으로 석 변호사에게만 갚으려 했다면 불법이라는 얘기다.
그러나 하나은행쪽의 이런 논리는 은행 자신에도 해당되는 측면이 있다. 왜 그럴까. 이는 석 변호사는 그렇다치고 하나은행은 왜 이 싸움이 ‘조용히’ 해결되길 바란 것일까, 하는 대목과 무관하지 않다. 하나은행도 속사정을 들여다보면 복잡한 구석이 적지 않다. 문제의 하나은행 김 전 회장 계좌는 대우채권단도 모른 채 하나은행만 알고 있는 돈이다. 그런데 이 남아 있는 대우 재산이 바깥에 알려지면 다른 채권자들하고 나눠야 하는 사태가 빚어질 수도 있다. 하나은행이 걱정하고 있는 건 바로 이 점이다. 하나은행으로서는 슬그머니 대출채권의 일부나마 김 전 회장의 예금과 상계해 회수하려 했는데 불쑥 석 변호사가 끼어들어 어음을 내밀면서 “내 돈이니까 내놓아라”고 하면서 일이 틀어지고 만 것이다.
슬그머니 61억원을 챙기려 했던 이유
이처럼 이 싸움은 어찌보면 단순한 것 같지만 찬찬히 들여다보면 여러 가지 복잡한 구석이 얽히고 설켜 있다. 앞으로 판결이 어떻게 날지 모르지만 석 변호사는 “판결을 기다려보자”고 말했고, 하나은행쪽은 “우리가 이길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이런 가운데, 꼭 그런 건 아니지만, 어느 정도 싸움의 열쇠를 쥐고 있는 김 전 회장은 여전히 해외를 떠돌고 있다.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사진/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의 61억원 예금계좌를 독차지하라? 김우중씨 뒤에 있는 사람이 24년째 대우그룹 법률고문을 맡고 있는 석진강 변호사이다.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던 김우중 전 회장은 넓은 세계를 ‘도망자 신세’로 떠돌며 자신이 ‘이미 했던 일’을 정리하는 회고록을 쓰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예금의 주인은 해외 도피중인데 주인이 빠진 상태에서 왜, 어떻게 예금을 둘러싼 다툼이 빚어지고 있는 것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돈은 이미 예금주인 김 회장의 손을 떠났고, ‘그뒤’ 누가 새 주인이 될 것인지를 가리고 있는 중이다. 그 내막을 들여다보자. 이 61억원짜리 예금을 놓고 싸우고 있는 양쪽 당사자는 김 전 회장의 법률대리인인 석진강(62) 변호사와 하나은행이다. 석 변호사는 김 전 회장과 ‘친구’ 사이로 24년째 대우그룹 법률고문을 맡고 있다. 법정다툼은 지난해 4월 석 변호사가 법원으로부터 이 예금에 대한 채권압류 및 전부(轉付)명령 집행문을 발부받으면서 시작됐다. 전부는 갑이 을의 채권자이고 을 또한 병의 채권자일 때 갑이 을 대신 제3채무자인 병으로부터 채권을 변제받는 것이다. 석 변호사는 김 전 회장이 자신에게 끊어줬다는 61억원짜리 약속어음을 근거로 법원에서 전부명령을 받아낸 뒤 문제의 예금을 자신에게 지급하라고 하나은행에 요구했다. 둘 사이에 약속어음이 오고간 과정에 대해 석 변호사는 <한겨레21>과 만나 이렇게 말했다. “대우가 한창 잘 나갈 때 내 돈 50여억원을 김 회장한테 맡겼다. 변호사 일을 하면서 돈을 얼마 벌지 못했는데 당시 대우가 개발사업도 많이 하던 때라 맡기면 두배 이상 불려서 줄 것으로 믿고 맡긴 것이다. 그런데 그동안 김 회장이 이 돈에 대해 아무런 말도 없다가 덜컥 대우사태가 터지고 말았다. 그래도 내 몫은 김 회장이 따로 챙겨놨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아무것도 해놓은 게 없었다. 서운했다. 그래서 맡긴 돈에 대한 채권으로 대신 약속어음을 건네받은 것이다.” 맡긴 돈을 돌려주지 못하게 되자 김 전 회장이 대신 그 돈에 대한 변제에 갈음하는 약속어음을 발행해줬다는 얘기다. 그는 또 당초 김 전 회장한테 50여억원을 맡겼지만 그동안의 이자 등을 감안할 때 61억원 이상은 받아야 한다고 덧붙였다. 약속어음이 발행된 날짜는 지난 99년 10월1일로, 김 전 회장이 한국을 떠나기 10일 전이다. ‘발행인 김우중, 수취인 석진강’이라고 적힌 이 약속어음의 액면가는 61억원으로 김 전 회장의 예금계좌에 든 돈과 정확히 일치한다. 이에 대해 석 변호사는 “당시 김 회장이 ‘하나은행에 내 돈 60여억원이 있으니 찾아써라’고 하면서 백지 약속어음을 발행해 줬다”며 “은행에 확인해보니 원래 예금 60억원이 이자가 붙어 61억원으로 늘어나 있었고 그래서 내가 어음에 61억원이라고 적어 넣었다”고 말했다. 출국 직전 석 변호사에게 약속어음 발행

사진/ "61억원은 내 돈이라니까!" 김우중 전 회장이 석진강 변호사에게 끊어줬다는 약속어음(위)과 석 변호사가 제기한 전부금청구소송 소장(오른쪽).

사진/ 하나은행은 김우중씨 예금에 대해 지급정지 조처를 내려놓았다. 사진은 대우센터빌딩 11층에 있는 하나은행 대우센터지점.(임종진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