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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반도체가 미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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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1-08-14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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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악의 경기 침체로 경제 기반 흔들려… 비메모리 분야 취약해 불황 극복 미지수

사진/ 컴퓨터 수출이 줄어드는 등 반도체 경기가 최악의 침체에 빠졌다.(장철규 기자)
지난해 9월부터 본격 하강국면에 들어간 뒤 최근 15년 만에 최악의 침체를 보이고 있는 반도체 경기로 온 나라가 난리법석이다. 올 7월 반도체 수출액이 지난해 7월보다 무려 20%나 줄어 월별 통계가 남아 있는 지난 67년 1월 이후 가장 큰폭의 수출 감소세를 보인데다 5개월 내리 마이너스 행진중이다. 물론 가장 큰 이유는 무엇보다 반도체 가격 폭락이다. 실제 반도체 수출은 지난해 7월 24억달러에서 올 7월에는 9억달러로 63%나 감소했다. 반도체와 반도체의 주수요산업인 컴퓨터 수출만 지난해 수준을 유지했어도 우리나라의 수출은 증가세를 이어갔을 것이란 얘기다.

대체 반도체가 뭐기에 한 나라 경제를 죄지우지하는 것일까? 반도체 가격에 울고 웃는 ‘반도체 공화국’은 지금 하늘을 바라보며 비가 내리기만 고대하는 ‘천수답 경제’처럼 속살이 터져 나가고 있다.

D램 업계, 생존게임 본격화


사진/ 삼성전자가 지난 7월 제품개발에 성공한 그래픽 전용 세계 최고속 300MHz급 128Mb(4M×32) DDR SD램.(삼성전자제공)
지난해 9월 이후 내림세로 돌아선 뒤 지난 5월까지 완만한 하락세를 보이던 D램 가격이 6월부터 급락세를 보이고 있다. 최근 들어 가격 하락세가 완만해지기는 했으나, 이미 심리적 마지노선으로 여겨지던 128메가SD램 2달러선과 64메가SD램 1달러선이 붕괴된 지는 오래됐다. 약 2년 전만 해도 무려 100달러를 상회하던 256메가SD램도 5달러 미만에 거래되고 있다. 이 정도의 가격이라면 세계 최고의 생산성을 자랑하는 삼성전자를 포함해 전 업체들이 생산할수록 손해를 보는 상황이다.

이 때문에 세계 D램 업계는 죽느냐 사느냐 하는 갈림길에서 한판의 생존게임을 치르고 있다. 이미 하이닉스반도체(옛 현대전자)는 미국의 유진공장 가동을 중단하면서 64메가D램 생산량을 절반 수준으로 줄였다. 일본의 NEC와 도시바, 후지쓰, 미쓰비시 등 주요 반도체 업체들과 대만의 윈본드, 뱅가드 등도 이미 감산에 들어갔다. 감가상각이 안 끝난 상황에서의 감산은 가격이 반등하지 않을 경우 치명적일 수도 있지만, 생산할수록 적자폭이 커지는 상황을 감당하기는 쉽지 않은 노릇이다.

이들 업체의 감산 노력은 수요가 늘기만을 기다리기보다 공급량을 줄여 수급균형을 맞추기 위한 전략으로 볼 수 있다. 과거에도 이러한 전략의 효과를 본 적이 있다. 지난 85년 극심한 불황기에 세계 1위의 반도체 업체인 인텔이 D램사업을 포기하면서 반도체 업계는 V자형 회복곡선을 그렸다. 95년 D램 호황기에 20여개 업체가 경쟁하던 시장이 96년부터 98년까지의 불황과정에서 일본, 미국 업체가 사업을 포기 또는 축소하면서 상위 6개사가 시장의 약 80%를 차지하는 과점시장으로 재편됐다. 96∼98년 불황 극복기에는 한국 업체와 일본 업체의 동반 감산이 큰 효과를 보기도 했다.

그러나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어렵기는 마찬가지 입장인 삼성전자는 현재까지 감산 의지가 없어 보인다. 오히려 256메가SD램 생산원가를 128메가SD램 2개를 합한 가격보다 낮은 수준으로(비트 크로스) 만들어 가격을 추가 인하함으로써 후발 업체들을 고사시키려는 공격적 성향까지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상황이다. 국제금융시장에서 자본유치와 내부 현금유보를 통해 각각 수십억달러에서 수억달러를 확보한 미국 마이크론과 독일 인피니온도 감산에 동참할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경기가 호황이든 불황이든 세계 1위 업체와 선두권 업체들은 큰 걱정이 없다. 호황기에 번 돈으로 불황기를 충분히 넘길 수 있고, 불황기를 극복하지 못해 사라진 업체들의 시장까지도 추가로 접수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이닉스를 비롯한 여러 업체들의 눈물겨운 노력에도 불구하고 반도체 가격 조기 회복이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이는 이유이기도 하다.

엇갈리는 반도체 가격 바닥론

사진/ 반도체업계는 감산으로 위기극복을 꾀하기도 한다. 하이닉스 반도체는 64메가D램 생산량을 절반으로 줄였다.(한겨레)
최근 메릴린치증권의 반도체 업종에 대한 투자의견 상향조정을 두고 ‘반도체 경기 바닥론’이 다시 확산되고 있다. 반도체시장은 과연 바닥을 지나 회복기에 접어든 것일까? 낙관론과 비관론이 공존하는 상황에서 결론부터 말하자면 반도체 경기가 바닥권에 근접한 것은 사실이지만, 본격 반등이 시작될 것으로 보기에는 무리있어 보인다.

최근 미국 최대 증권사인 메릴린치는 반도체 산업이 여전히 생산과잉과 수요부진으로 고전하고 있지만 최악의 위기에서 벗어났다고 발표했다. 메릴린치는 그동안 비관론을 펼쳐왔다. 미국 반도체산업협회(SIA)도 4분기에는 반도체 가격이 반등할 것이라는 전망을 발표해 낙관론에 힘을 실어줬다. 그 근거로는 D램 업체들의 잇단 반도체 감산과 투자 축소계획으로 인한 중장기 공급 축소, 그리고 하반기 펜티엄4 및 윈도XP 출시에 따른 수요 회복 기대감을 들었다.

그러나 비관론도 만만찮다. 메리츠증권 최석포 연구위원은 “D램시장은 윈도XP시장 진입 성과나 주요 반도체 업체의 감산 추진 여부, 마이크론의 반덤핑 제소 등에 다소 영향을 받을 수는 있으나 본격 회복시기는 내년 중반 이후”라고 말했다. 그는 마이크론, 인피니온, 일본 업체의 결산기가 몰려 있는 내년 2∼3월이 비수기 영향 및 D램 업체들의 생산증가, 재고누적 영향으로 4분기 대비 대략 20% 정도의 가격 하락이 예상돼 단기적인 바닥권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분석했다. 특히 그는 “내년 2분기가 되면 수요 개선보다는 D램 업체들의 구조조정 영향에 의해 가격반등이 일어날 것으로 예상되며 내년 3분기 이후부터 수요의 점진적 증가가 가격상승을 이끌어낼 것”이라며 “결국 D램 가격은 근본적인 수요의 개선이 수반되지 않으면 추세적인 상승세를 지속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주장했다.

메모리 D램 분야에 편중돼 충격 커

우리나라는 세계 최대 반도체 생산국가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하면 세계 최대 메모리반도체 생산국이다. 데이터퀘스트에 따르면 지난해 삼성전자는 20.9%의 시장점유율로 세계 1위, 하이닉스반도체는 17.1%로 세계 3위를 차지했다. 그러나 비메모리까지 포함하면 사정은 달라진다. 반도체 시장조사기관인 아이시(IC) 인사이츠는 올 상반기 삼성전자의 반도체 매출 순위를 전세계 반도체 업체 가운데 6위에 올렸다. 지난해보다 2단계 하락한 것이다. 인텔, 도시바, NEC, 에스티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 티아이(TI) 등이 1위부터 5위다. 하이닉스반도체는 10위권 밖이다. 비메모리 분야만 치면 삼성전자도 20위권 밖이다.

이처럼 우리나라가 메모리반도체 분야에서 단연 강세를 보이는 것은 1980년대 삼성전자를 비롯한 업체들의 과감한 투자 및 정부의 강력한 육성책에다, 90년대 일본의 경기침체로 D램 사업 투자가 위축된 것이 결정적 이유이다.

물론 우리나라 반도체 산업이 메모리 소자, 그것도 디램 분야에 치우쳐 있는 것에 대해 우려하는 시각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세계적 기업들의 반도체 분야 매출 구성을 보면 비메모리 반도체인 시스템LSI 비중은 인텔이 303억달러 매출에서 91%, TI가 93억달러 매출에서 98%를 차지하는 등 미국 업체의 경우 약 90%가 시스템 LSI에 집중돼 있다.

독일 인피니온은 메모리 46%, 시스템LSI 35%이며, NEC는 메모리 27%, 시스템LSI 60%, 도시바는 메모리 32%, 시스템LSI 47% 등 유럽과 일본은 각 60%, 55%가 시스템LSI 사업에 집중되어 있는 안정적 사업구조를 가지고 있다.

반면 삼성전자는 83:17, 하이닉스는 95:5로 메모리반도체 사업 비중이 월등히 높아 외국 경쟁국보다 D램 가격 하락의 여파가 클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이 때문에 국내 업체들이 D램 호황에 눈멀어 비메모리 사업을 등한시했다는 비판이 일각에서 제기되고 있다. 이같은 비판을 의식해서인지 삼성전자와 하이닉스는 비메모리 사업을 차세대 사업으로 적극 육성하기로 했다. 이는 PC 수요에만 의지해야 하는 메모리반도체와는 달리 최근 급성장하는 디지털 가전, 통신, 네트워킹 등 다양한 수요처를 가지고 있어 포트폴리오상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사업구조라는 장점이 있기 때문이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총 105억달러의 반도체 매출 가운데 18억달러(약 17%)에 불과한 비메모리 반도체(시스템LSI) 사업 비중을 올해 30%까지 확대할 계획이다. 이 회사는 마이크로프로세서, 메모리 등을 탑재한 IC칩이 내장돼 있어 자체적으로 용도에 맞는 작업을 수행할 수 있는 스마트카드와 액정표시장치(LCD) 구동칩인 LDI, 통신·네트워크 기기의 핵심 반도체인 시스템 온 칩(SOC) 등을 2003년까지 세계 1등 제품으로 진입시킬 방침이다. 또한 2005년, 2010년 등으로 중장기 비전을 세워 10여개 품목에서 세계 최고 경쟁력을 확보함으로써 2005년 2250억달러 규모의 세계 비메모리시장에서 톱10에 진입한다는 복안이다.

비메모리 사업의 경쟁력 확보할 건가

사진/ 삼성전자는 최근 일본 소니의 비메모리 바도체인 메모리카드 분야 협력을 위해 양사간 기술협력 가오하 등에 대한 양해각서를 체결했다.(삼성전자제공)
하이닉스반도체도 비메모리 반도체인 ‘시스템IC’ 사업에 역량을 집중할 계획이다. 이 회사는 파운드리(수탁생산)와 스탠더드 프로덕트(ASIC, 드라이버IC, MCU 등 기능성 반도체)를 양대 축으로 시스템IC부문에 집중적으로 투자할 예정이다. 이 회사의 올 2분기 D램 매출은 전분기에 견줘 42% 감소한 반면 시스템IC 매출은 8% 감소하는 수준에 그쳐 D램부문의 적자를 일부 상쇄한 바 있다.

정부도 비메모리 생산비율을 현 20%선에서 오는 2010년까지 50%로 끌어올린다는 목표로 ‘시스템IC 기술개발사업’을 적극 추진하고 있다.

메모리반도체 산업대국 한국이 비메모리 사업에서도 세계 수준의 경쟁력을 확보함으로써 현재 처한 반도체 불황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인지 눈여겨볼 대목이다.

박효상 기자/ 한겨레 경제부 hspar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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