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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위기 탈출은 벽산에 배워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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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1-08-08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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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산 임직원들이 털어놓은 회사경영 회생기… 알짜배기 사업 내놓고 퇴출위기 벗어나

“워크아웃. 벽산이라는 회사이름과 나란히 자리한 이 말에 남편도 나도 별 반응이 없었다. 뭔지도 잘 몰랐기 때문이다. 98년 여름 휴가를 다녀온 직후였다. 그런데 어느 순간 상여금이 끊기고 월급이 줄고…. 아이의 출산비와 양육비를 걱정해야 할 만큼 어려운 나날이 시작됐다. 아이들 과잣값이라도 벌어볼 요량으로 남편 몰래 머리핀 꽂는 부업을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날 저녁 결국 부업현장을 들키고 그이의 큰 눈에서 눈물을 보았다.”(외장재영업팀 이아무개 대리 부인)

워크아웃 기업으로 남몰래 겪은 고통

기업이든, 개인이든 위기에서 벗어난 뒷면에는 절절한 사연이 녹아 있게 마련이다. (주)벽산이 워크아웃(기업개선작업) 성공사례로 꼽히기까지 남몰래 겪은 고통은 컸다. 직원 수를 절반 이하로 줄여야 했으며, 알짜배기로 꼽히던 사업부문을 떼내 팔아야 했다. 채권단의 ‘신탁통치’ 아래에 들어가 경영의 자율권을 몽땅 뺏기는 수모도 감수해야 했다. 김재우 사장을 비롯한 벽산 임직원들은 이런 경험과 구조조정 스토리를 최근 책으로 펴냈다. <누가 그래? 우리 회사 망한다고!>(라이트북닷컴). 이 책의 출간은 한 주제에 대해 여러 명이 인터넷에 올린 글을 라이트북닷컴(www.writebook.com)이 모아 엮은 독특한 방식으로 이뤄졌다.


종합건축자재업체 벽산이 극심한 어려움에 빠진 것은 외환위기 직후였다. 금융시장이 급속히 얼어붙으면서 유동성 확보에 비상이 걸렸다. 회사채 만기도래일이 석달에서 한달로 단축된 데 이어 일주일, 5일, 3일 단위로 짧아지고 갚아야 할 빚도 큰 폭 늘어났다. 당장 갖고 있던 유동자금은 대부분 차입금 상환에 쓸 수밖에 없었다. 유동성 위기가 반복되면서 부도위기로까지 내몰렸다. 급기야 98년 8월 워크아웃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창업자 김인득 회장이 타계한 지 만 1년을 막 넘긴 무렵이었다.

사진/ (주)벽산의 김재우 사장.
김희철 회장의 요청에 따라 98년 1월 벽산의 새 대표이사로 취임한 김재우 사장의 어깨에 걸린 짐은 결코 만만치 않았다. 외환위기에 따른 금융시장 경색이 직접적인 발단이 되긴 했지만, 벽산 자체적으로 안고 있는 내부적인 문제도 적지 않았다. 임금이나 광고비, 교육훈련비 등을 절감하는 것으로 해결할 수 있는 차원이 아니라는 판단이 내려졌다. 유동성 위기라는 증상으로 나타난 구조적인 결함은 무엇이었을까. 김 사장은 누수의 원인을 찾아나섰다.

당시 벽산에서 생산하는 제품의 종류는 단열재, 내장재, 외장재, 천장재, 바닥재, 지붕재, 배관재 등 7종류에 제품 수는 30가지 이상이었다. 제품별 매출과 수익을 따져본 결과 일부 제품군이 극심한 저수익 상태였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 비중이 전체 외형(매출)의 3분의 1( 587억원)에 이를 정도로 컸다는 점이다.

이에 따라 외장재인 핑크월, 바닥재인 로얄타일, 배관재인 PPC파이프·X-L파이프 등 저수익부문은 과감하게 떼내는 작업에 들어갔다. 다만, 완전한 철수보다는 운영이 가능한 중소기업을 통해 사업을 넘기는 방법을 택했다. 틈새를 공략하는 중소기업용 아이템으로는 승산이 있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김건주 전략팀장은 “당시 저수익 사업으로 분류된 부문뿐 아니라 전형적인 외형 불리기 사업이었던 시공 및 주택사업부문도 떼냄으로써 외형 집착에서 벗어나는 데 중점을 뒀다”고 말했다.

내부적으로 가장 큰 진통을 치른 것은 석고보드사업부문의 매각이었다. 석고보드는 1977년 벽산이 국내 처음으로 생산한 건축내장재의 하나였다. 여기서 나오는 판매효과는 여느 제품과 비할 바가 아니었다. 전체 매출의 25%, 수익의 50%를 차지하는데다 국내 시장점유율이 50%에 이를 정도로 알짜배기였다. 당연히 직원들의 애착도 컸고 매각추진에 대한 내부저항이 거셌다. 그렇지만 김재우 사장은 “알짜를 내놓아야 좋은 값에 제때 매각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벽산의 유동성 위기도 해결될 수 있다”며 매각을 강행했다. 석고보드사업이 차마 아까워 그대로 끌어안고 있다가는 벽산과 석고보드사업 모두 침몰하게 되고 결국 석고보드사업은 헐값으로 넘어갈 수밖에 있다는 판단이었다.

석고보드사업부문은 우여곡절 끝에 프랑스의 라파즈에 매각됐다. 이에 따라 자산매각 대금으로 400억원, 판매대행수수료 형식으로 300억원 등 700억원의 현금이 유입돼 벽산은 유동성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

석고보드 매각으로 유동성 위기 극복

물론, 채권단의 지원도 있었다. 원금상환 유예 1695억원, 보증채무 해소 2429억원 등 4124억원의 채무조정이 이뤄졌다. 벽산 워크아웃을 주관해온 산업은행 관계자는 “출자전환이나 신규자금 지원은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며 “차입금 1595억원에 대해 금리를 깎아준 것을 빼고는 채권단에 별다른 부담은 없었다”고 전했다. 벽산은 이러한 구조조정 과정을 거쳐 97년 말에 비해 덩치는 크게 줄었지만, 300억원 적자상태에서 벗어나 3년 연속 30억원 안팎의 흑자를 보이고 있다. 또 300%에 가깝던 부채비율은 150% 아래로 떨어졌으며 1인당 매출·영업이익이 두배로 오르는 등 수익성이 크게 개선됐다. 김재우 사장은 “구조조정 실적을 자랑하려는 게 아니라 비슷한 처지에 있는 기업에 도움이 될 것이란 주위의 권유 때문에 책을 출간했다”며 “구조조정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영배 기자 kimy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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