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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깃털’에게 부과된 26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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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1-08-01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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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우그룹 전직 경영자에게 사상 최대의 추징금 매긴 법원 판결로 뜨거운 논란

사진/ 공판을 받기 위해 법원에 들어서고 있는 대우그룹 전직 경영자들. 26조원의 추징금은 과연 적절한 것이었나.(서정민 기자)
26,000,000,000,000원. 대규모 공적자금 투입으로 ‘조’ 단위에 어지간히 만성이 되긴 했지만, 26조원은 감을 잡기조차 힘들 만큼 여전히 큰돈이다. ‘천문학적인’이란 꾸밈말을 붙이지 않고는 도무지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더욱이 이 돈이 금융기관 부실을 메우기 위한 공적자금이 아니라, 몇몇 개인에게 지워진 ‘추징금’이란 사실에 이르면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다.

예상 밖의 중형이 효과 있을까

서울지방법원 형사합의21부(재판장 장해창 부장판사)가 7월24일 강병호 전 (주)대우 사장을 비롯한 대우그룹 계열 전직 경영자 6명에게 7∼3년의 실형과 함께 무려 26조3천억원의 추징금을 매긴 데 대해 재계는 적지 않이 놀란 모습이다. 총 26조원대의 추징금은 법원이 지금까지 부과한 추징금과 벌금을 통틀어 ‘재산형’으로는 역대 최대규모로 꼽힌다. 그동안 재산형 최고기록으로 남아 있던 전두환(2629억원), 노태우(2205억원) 두 전직 대통령과 최순영 전 신동아그룹 회장(1960억원)의 추징금에 견줘서도 무려 100배를 웃도는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수준이다.


재계쪽에선 법원의 판결이라 이러쿵저러쿵 공식적인 반박은 없지만 분식회계를 비롯한 당시의 경영 관행에 너무 가혹한 처벌을 한 것이라는 떨떠름한 반응을 내비치고 있다. 이들 경영자가 김우중 전 회장의 ‘깃털’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간과된 ‘희생양 만들기’ 아니냐는 항변성 풀이도 나오고 있다. ‘몸통’ 김우중 회장이 외국을 떠돌며 당국의 조사조차 제대로 받지 않은 현실도 이런 해석에 힘을 보태고 있다.

삼성경제연구소 최우석 소장은 “경영인들의 책임과 기업 투명성을 높이려는 취지는 이해하지만, 정도가 심하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최 소장은 “분식을 통한 자금조달이 이뤄질 당시 전문경영인들이 총수의 지시로 도장은 찍었더라도 그 실상(불법·부당한 자금조달)을 다 알고 있었는지 의심스럽다”면서 “사주에게 책임을 묻지 않고 전문경영인들에게 너무 엄한 벌을 내린 것 같다”고 덧붙였다. 가톨릭대 곽만순 교수는 “주주에 대한 경영진의 의무를 명확히 밝힌 것으로 적절하고 시사하는 바가 크다”면서도 “실질적 오너는 김우중씨라는 점을 감안할 때 배임이나 사기행위에 부분적으로 참여한 전문경영진에게 26조원이라는 추징금을 부과한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고 평가했다.

강병호 사장을 비롯한 전직 경영진도 재판과정에서 이런 점을 들어 선처를 호소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상황에서 권한도, 책임도 없는 전문경영인이 무소불위의 총수에 맞설 수 없었다는 일종의 ‘머슴론’을 편 것이다. 그렇지만 재판부는 “총수의 지시에 따라 관행처럼 이뤄졌더라도 분식회계와 대출사기는 명백한 범죄행위이기 때문에 단호하고 엄정하게 대처해야 한다”고 쐐기를 박았다. 부도덕한 총수의 전횡에 제동을 거는 것도 전문경영인의 책임이라는 점을 분명히 한 것이다.

‘대우 비리’에 예상 밖의 중형을 선고한 법원의 이번 결정은 재계의 관행, 특히 전문경영인의 행태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칠 것이란 전망이 많다. 총수 지시에 어쩔 수 없이 따랐다는 피고인들의 해명이 먹혀들지 않음에 따라 전문경영인의 자리매김을 새로이 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지 않겠느냐는 기대감이다.

사진/ 대량해고 조처에 반대하는 대우그룹 계열사 노동자들.(박승화 기자)
오히려 ‘충성심’만 강화할 수도

중앙대 정광선 교수는 “명색이 최고경영자(CEO)라면 총수의 부당한 지시에 대해선 거부해야 마땅했다”며 “법원의 중형 선고는 당연하며 다른 기업들에 파급효과가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고 말했다. 정 교수는 “추징금이 현실성을 벗어난 수치라는 비판이 있지만, 26조원이 아니라 1조원이라고 하더라도 극히 일부밖에 거둬들이지 못할 것은 마찬가지 아니냐”며 “어차피 선언적인 의미인 만큼 그런 식의 선고가 바람직하다고 본다”고 덧붙였다. 전문경영인들이 이제 대우비리에 대한 법원의 판결을 방패막이삼아 그룹 총수의 부당한 지시를 거부할 수 있게 됐다는 것이다.

이런 기대감과 달리 시스템 변화가 뒷받침되지 않은 일벌백계의 효과는 극히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는 주장도 적지 않다. 한국개발연구원(KDI) 남일총 박사는 “대우비리에 대한 엄벌이 긍정적인 판결이긴 하지만 망한 뒤에 이뤄진 분풀이성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며 “망한 기업이든, 살아 있는 기업이든 회계 및 공시를 부실하게 했을 경우 평소부터 법규에 정한 대로 엄정하게 처벌을 내려야 마땅하다”고 주장했다. 남 박사는 흥망에 상관없이 모든 기업들에 똑같은 잣대를 들이대지 않는 한 재계 전반에 걸쳐 억제력을 발휘하기는 힘들 것이라고 말했다.

곽만순 교수는 “이제 전문경영진의 리스크(위험)가 훨씬 커진 데 따라 총수들로선 충성심이 더욱 높은 이들을 경영진으로 끌어들여야 할 처지에 빠진 면도 있다”고 풀이했다. 국내 기업의 실정으로 보아 전체 주주를 위해 일할 수 있는 전문가가 최고경영자로 뽑힐 수 있는 길이 그만큼 좁아진 측면이 있다는 것이다.

국내 기업들이 지금껏 보여주는 갖가지 행태를 보더라도 대우 경영진에 대한 일벌백계가 다른 기업들의 ‘황제 경영’에 브레이크를 걸 것이란 기대는 성급하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총수 1인의 지배력이 오히려 강고해지고 있는데다 집단소송제 등 시스템 변화에 강한 거부감을 표명하고 있는 게 재계 전반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이사회나 주주총회 같은 소정의 절차도 거치지 않고 최고경영자를 갈아치우는 구태도 여전한 실정이다.

공정거래위원회 조사결과 30대그룹의 내부 지분율은 45.0%로 지난해보다 1.6%포인트 높아졌고 이 가운데 동일인 지분율은 1.5%에서 3.3%로 늘어났다. 더욱이 30대그룹 비상장회사의 내부 지분율은 64.8%로 상장회사(31.7%)보다 두배가량 높았다. 총수 1인의 지배구조가 그만큼 단단해진 것을 보여준다.

사진/ 대우그룹 빌딩.
기업지배구조 개선은 여전히 멀고…

전문경영인들이 그룹 총수의 뜻에 따라 하루아침에 물러나는 상식 이하의 ‘사건’이 이어지고 있는 현실에서도 이를 엿볼 수 있다. 현대자동차가 7월24일 이계안 사장을 현대캐피탈 회장으로 전격 발령낸 의사결정 과정은 이사회가 오너(정몽구 현대차 회장) 앞에 얼마나 무력한지 새삼 실감케 했다. 당시 대표이사가 뒤바뀌는 과정에서 법적인 의사결정권을 갖는 이사회의 멤버인 사외이사조차 인사내용을 신문을 통해 알았다고 할 정도였다. 이는 지난 99년 12월 박세용 현대그룹 구조조정위원장이 현대차 회장으로 발령났다가 오너 사이의 조정 끝에 이틀 만에 인천제철 회장으로 가는 씁쓸한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대기업 사이의 자율 구조조정 1호로 꼽히는 여천엔시시(NCC)에서도 오너에 의해 전문경영진이 전격 경질되거나 경영권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하는 양상을 볼 수 있었다. NCC의 공동출자사인 한화는 파업사태 수습과정에서 생긴 한화-대림 사이의 갈등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는 오너의 판단에 따라 전문경영진을 하루아침에 내치는 일이 벌어졌다. 또다른 출자사인 대림쪽은 오너가 비상임 이사 자격으로 직접 업무를 챙겨 전문경영진이 설 자리가 없는 실정이다.

총수쪽 의중만 살피는 해바라기 경영 행태를 고치기 위해선 집중투표제, 집단소송제 도입 등을 통해 기업지배구조를 바꿔놓아야 함에도 현실은 아직 이와 거리가 멀다. 소액주주의 의사를 반영할 수 있는 통로인 집중투표제는 기업의 자율선택에 따르도록 돼 있는데 대주주쪽의 견제로 대부분 기업들이 도입하지 못하고 있다.

내년 3월부터 단계적으로 도입될 것으로 보이는 증권분야 집단소송제의 경우 자산 2조원 이상 업체들로 범위를 제한하고 대다수 기업들이 대상에서 빠진다. 그나마도 전경련을 필두로 한 재계쪽에선 소송 남용을 이유로 거부반응을 보이고 있다. 재계는 사외이사를 비롯한 기존의 경영감시제도를 보완하면 집단소송제를 도입하지 않고도 기업 지배구조를 개선하는 데 무리가 없다고 주장하지만, 사외이사가 총수의 측근으로 채워지는 현실에선 그다지 설득력을 얻지 못하고 있다. 대우비리에 대한 중형선고가 재계 전반의 경영시스템 변화로 이어지기를 기대한다는 것은 역시, 너무 순진한 생각일까.

김영배 기자 kimy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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