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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저기 공룡은행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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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1-08-01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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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주택 합병은행장 선정으로 큰 고비 넘겨…국민은행 노조의 반발도 큰 울림 없어

사진/ 시장주의자로 정평이 나 있는 김정태 행장. 합병은행 최고경영자 후보로 선정된 뒤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강창광 기자)
“골드만 삭스도 ‘왕따’되기는 싫었던 거다. 여기에 내 할말은 다 담겨 있다.”

국민·주택 합병은행 최고경영자(CEO) 후보로 김정태 주택은행장이 최종 선정된 7월26일, 이번 후보선정 작업에 직접 참여한 한 인사는 밤늦게 연결된 전화통화에서 ‘골드만 삭스 왕따론’을 들려준 뒤 얘기를 짤막하게 마무리지었다. 느닷없이 웬 왕따론이냐 싶을 수도 있겠는데 여기에는 대략 두 가지 뜻이 담겨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하나는 골드만 삭스(국민은행 대주주)만 애초 입장을 중도에 바꿨다는 것이고, 합병은행의 행장 후보가 정부 개입없이 주주들의 의사를 충실히 반영하는 방식으로 결정됐다는 게 다른 하나다. 과연 그럴까.

사진/ 국민은행과 주택은행의 합병작업에 가속도가 붙었다.(강재훈 기자)
행장 선임에 정부개입 없었나


골드만 삭스가 김상훈 국민은행장 지지에서 중도에 김정태 행장 지지로 돌아섰다는 데는 별다른 이견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정부개입 여부를 둘러싸고는 논란이 분분해 뭐라고 딱 잘라 단정하기 어렵다.

국민·주택 합병은행 행장후보선임위원회가 합병은행장 선출을 위한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간 건 지난 7월12일. 두 은행 및 대주주인 골드만 삭스(국민)·아이엔지(ING)베어링(주택), 합병추진위 관계자 등 6명으로 짜여진 선임위는 선정작업 초기 5명을 행장 후보로 올렸다가 두 은행의 행장으로 후보군을 좁힌 뒤 최종적으로 김정태 행장의 손을 들어줬다. 선정과정에서 골드만 삭스쪽을 빼고는 모두 초기부터 김정태 행장을 지지했다는 후문이다.

행장 후보가 결정된 뒤 골드만 삭스 관계자는 “선정위 최종 논의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김정태 행장을 합병은행 CEO로 추대한다는 데 의견이 모아졌다”며 “결정과정은 합리적이고 투명했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국민은행 대주주로서 그동안 김상훈 행장을 지지해왔지만, 상황이 달라졌다”고 덧붙였다. 왕따론을 제기한 행장선임위 인사의 설명과 일부 합치되며, 이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면 역시 정부개입은 없었다는 것이다. 물론 국민은행 노조쪽은 곧이곧대로 믿지 않고 있지만.

국민·주택 합병은행장 선임과 관련해선 재미있는 일화가 하나 있다. 지난해 12월 국민·주택 두 은행의 합병논의가 가시화된 뒤 노조쪽이 파업을 선언하는 등 강력 반발할 때였다. 김정태 행장은 당시 전체 직원들에게 전자우편으로 호소문을 보냈는데, 이 호소문의 마지막 글귀가 눈길을 끌었다. ‘…합병 확정시에도 여러분과 함께하는 은행장이 될 것임을 밝힙니다.’ 정부·경영진과 노조 사이의 대립각이 날카롭고 두 은행 노조 사이에도 미묘한 기류가 흐르고 있던 때여서 이런 표현은 김정태 행장이 합병은행장 자리를 약속받았다는 해석을 낳는 빌미로 작용했다.

오래 전의, 그것도 다소 애매한 문구 하나를 들어 합병은행장은 이미 내정돼 있었다는 식의 단선적인 해석은 선임위에 대한 ‘모욕’이 될 것이다. 하지만 국민은행 노조를 중심으로 합병추진 및 행장 선임과정에 대한 불신감이 널리 퍼져 있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합병비율 결정에 이어 합병은행장 후보 선임이란 커다란 산을 넘었음에도 합병은행호의 앞길에 난관이 많을 것임을 예고하는 대목이다.

국민은행 노조는 합병은행장 후보 선정 직후 발표한 성명서에서 “강제합병을 추진하며 통합은행장 선임과정까지 불법개입을 서슴지 않는 정권과 합병 추종세력의 야합에 분노한다”고 비난했다. 노조는 이어 “뉴욕증시 상장 및 주주총회 저지 등 합병 반대투쟁을 벌여나갈 것”이라고 선언했다. 이와 관련, 상위 단체인 금융산업노조는 국민·주택은행 합병은 소매금융 부문의 독과점을 초래한다며 공정거래위원회에 제소하는 방안을 검토해온 것으로 파악됐다. 지난해 합병논의 초기 때와 다름없이 두 은행의 합병을 무산시키겠다는 의지를 아직도 갖고 있음을 분명히 한 셈이다. 그렇지만 이런 의지 표명이 지난해와 비교할 때 현실적인 ‘울림’은 그다지 크지 않은 실정이다.

국민은행쪽과 달리 주택은행 노조는 합병은행장 선임 뒤 합병반대 행동에 대해 이렇다 할 주장을 펴지 않고 있다. 국민은행 노조로선 합병반대 싸움을 함께 벌여나가야 할 한쪽 날개를 잃은 셈이다.

노조쪽에서 합병 무산을 위한 싸움의 고리로 삼고 있는 뉴욕증시 상장, 공정위 제소건도 뜻 같지 않다.

합병은행의 뉴욕증시 상장은 합병추진위쪽의 당초 염려와 달리 합병은행 출범에 맞춰 원활히 이뤄질 것으로 전망된다. 이미 주택은행은 뉴욕에 상장돼 있는 상태여서 미국증권거래위원회(SEC)는 국민은행 부문에 대한 자료보완 요구를 집중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8월 합병승인을 거쳐 11월께 뉴욕증시 상장이 점쳐지고 있다. SEC로선 한국 최대은행을 고객으로 끌어들이는 셈이어서 발목을 잡을 아무런 이유가 없으며 따라서 상장 절차가 원활히 진행될 것이란 예상이다.

사진/ 지난 7월 4일 서울 명동 은행회관에서 열린 합병추진위 첫 회의. 위원들이 취재진의 질문을 듣고 있다.(김진수 기자)
금융계에 엄청난 파장 일으킬 것

공정위 제소건도 이미 김이 빠진 모습이다. 두 은행의 합병과 관련, 금융감독위원회가 사전협의 요청을 한 데 대해 공정위는 합병에 따른 시장영향을 분석한 결과 경쟁제한성이 없다고 밝혔다. 지난해 말 기준으로 합병 뒤의 부문별 시장점유율을 보면, 예금시장 23.5%, 기업금융 13.0% 수준으로 나타났다. 가계금융시장 점유율은 46.0%에 이르나 은행의 가계대출과 대체관계에 있는 보험사 등 제2금융권까지 포함할 경우 시장점유율은 33.1%에 지나지 않아 별다른 문제가 없다는 게 공정위의 해석이다. 금융노조가 제소를 하기도 전에 바람을 쏙 빼놓은 셈이다.

물론, 영업점 및 인원 감축 등 직원들의 이해관계와 직접 맞닿아 있는 사안들이 미결과제로 남아 있긴 하다. 그렇지만 이런 쟁점들 또한 합병의 큰 물꼬를 돌이킬 만한 동력이 되기는 어렵다.

이런 사안들을 차치하고라도 두 은행의 합병을 되돌리기에는 이미 너무 먼 길을 와버렸다는 현실적인 여건도 무시할 수 없다. 노조쪽의 강력한 반대 분위기를 무릅쓰고 지난해 말 합병 양해각서(MOU)를 맺고 올해 4월 합병 본계약 체결 및 합병비율 결정 등 차근차근 순서를 밟아온 데 이어 이젠 초대 은행장 후보까지 선임했다. 이런 상황에서 합병무산을 주장하는 외침이 얼마나 메아리를 불러올 수 있을까. 노조로선 어렵고도 중요한, 전략 선택의 기로에 선 셈이다.

각자의 처지에 따라 두 은행의 합병을 바라보는 시각은 극과 극으로 엇갈리지만, 금융계에 끼칠 영향이 엄청나게 클 것이란 점은 분명하다. 국민·주택은행의 합병은 세계 60위권, 국내 최대은행의 탄생을 뜻한다. 이는 결과적으로 국내 은행권을, 한빛은행을 중심으로 한 금융지주회사와 국민·주택은행 양대축으로 나란히 갈라놓게 된다. 이는 기타 그룹으로 분류되는 나머지 은행들이 경쟁 열세 처지에 몰려 합병 압박을 받을 것이란 예상으로 이어진다.

최범수 합추위 간사는 “합병은행장 결정으로 두 은행의 합병뿐 아니라 금융구조조정이 큰 고비를 넘었으며 이제 또 새로운 시작을 하게 됐다”고 평가했다. 최 간사는 “진정한 합병의 완성은 누가 어느 은행 출신인지를 가리지 않게 됐을 때 이뤄진다”며 “앞으로도 최소 2년간은 은행합병이 이어질 개연성이 높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영배 기자 kimy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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