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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다단계로 거짓을 팔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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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1-07-25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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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판매원의 ‘정신적 피해 보상’ 소송… 인간관계 파괴 유도한 회사에 유죄 판결

사진/ 다단계판매로 대박을 터뜨리기 위하여…. 한 회사에서 다단계판매원들이 물품 지급을 기다리고 있다.(이정용 기자)
다단계판매회사들한테 간담이 서늘한, 다단계판매로 낭패를 본 이들에겐 더없이 통쾌할 일이 하나 생겼다. 법원이 “다단계판매로 인해 부모와 친구들에게 거짓말을 하는 바람에 인간관계가 파괴됐다”며 회사쪽은 20대 젊은이에게 ‘정신적 위자료’를 지급하라는 내용의 조정결정을 내린 것이다.

서울지방법원은 최근 조정 결정을 통해 국내 유수의 한 다단계판매회사로 하여금, 소송을 제기한 강아무개(여·24)씨에게 다단계피해 관련 정신적 위자료 100만원과 물품구입비 150만원 등 250만원을 지급토록 했다. 이는 법원이 다단계판매 피해에 따른 정신적 위자료를 인정한 첫 사례로 평가받고 있다.

유학의 꿈을 안고 다단계에 빠지다


강씨가 다단계판매에 발을 담그게 된 계기는 아주 우연찮게 찾아왔다. 그는 대학교 3학년이던 99년 8월 남자친구가 아르바이트하고 있다는 ㅎ빌딩(서울 삼성동)에 가게 됐다. 여기서 강씨는 다단계판매원으로 일하고 있던 남자친구의 친구인 송아무개씨를 만나면서 자신도 모르게 다단계판매에 빠져들게 됐다.

“처음에는 다단계인지, 뭔지도 몰랐어요. 송씨가 ‘우리 회사에 대학생 아르바이트 자리가 있는데 돈도 벌 겸 한번 알아보라’고 권하더군요. 호기심도 생기고 용돈도 벌어볼까 해서 그 빌딩 13층에 있는 교육장이라는 데까지 가게 됐습니다. 나중에 알고보니 다단계판매회사 교육장이더군요.”

강씨는 그때까지만 해도 자신이 낭패를 볼 것이란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다. 다단계판매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 찜찜한 생각이 들긴 했지만, 강의를 들어볼수록 시간과 노력을 조금만 들이면 적지 않은 돈을 마련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까지 붙었다. 유학갈 꿈을 품고 있던 그로선 어떻게든 돈을 벌어야할 처지이기도 했다.

“다른 사람들도 그랬겠지만, 저도 처음에는 꿈에 부풀어 있었습니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꾸준히 저축을 해온데다 아르바이트로 돈을 좀 모아 1천만원 이상 제 몫이 있었거든요. 다단계판매로 돈을 더 벌어 여기에 보태면 유학갈 꿈을 이룰 수 있겠구나 싶었습니다.”

교육장에서 만난 이들은 하나같이 강씨의 의욕을 더욱 부채질했다. 그 회사 판매조직의 7단계 중 위에서 세 번째인 DD라고 자신을 소개한 김아무개씨는 한달에 1천만원 이상 벌고 있으며, 그런 지위에 오르는 데 3개월밖에 걸리지 않았다고 말했다. 또 판매조직의 꼭대기에 오른 지아무개씨는 ‘우리 회사에 TSS(자석요)라는 제품이 있는데 이걸 하루 사용했더니 아프던 위와 허리병이 나았다. 무좀이 있었는데 우리 회사 한방양말을 신었더니 다 나았다’는 내용의 제품 교육을 집중적으로 시켜 강씨를 혹하게 만들었다.

교육장에서 들은 내용과 현실이 너무나 동떨어져 있다는 사실을 알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일이 걸리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동안에 겪은 고통은 너무나 컸다.

“송아무개씨가 ‘사업가가 되려면 꼭 AD(7단계 중 아래에서 두 번째)가 돼야 한다’며 최소한 363만원어치 물건을 사야 한다는 분위기를 조장하더군요. 학생이라 돈이 없다며 대신 다른 사람들을 소개해서 같이 사업하겠다고 하자 그렇게 해선 사업 못한다며 학생대출을 받는 방법까지 알려줬습니다.”

당장은 부담이 되겠지만 물건을 일단 샀다가 되팔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적금을 깨기로 했다. 그때까지 강씨 몫의 1천여만원은 금융기관에 다니던 아버지가 신탁으로 관리하고 있었다고 한다. 아버지에게 사실대로 말하기 어려워 강씨는 도장 분실신고를 낸 뒤 새 도장을 만들어 아버지 몰래 돈을 빼냈다. 이렇게 마련한 돈으로 자석요, 인삼비누 등 13종 총 364만원에 이르는 물건을 구입했다. 나중에 돈을 뺀 사실을 안 부모에겐 ‘친구에게 등록금을 빌려줬다’고 거짓말까지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환불 요구 끝까지 외면… 시민단체 협조 받아

사진/ 서울YMCA는 다단계판매 피해자에게 법률지원을 하고 있다. 시민중계실에서 전화상담을 하는 모습.(박승화 기자)

판매원으로 등록하며 이렇게 떠안은 물건은 애초 뜻과는 달리 좀처럼 팔리지 않았다. 친구들과 주위의 알고 지내던 이들에게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묻는 척하다가 구차한 소리를 해야 하는 처지에 회의감도 적잖이 들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생겼던 ‘스트레스성 원형 탈모증’이 생긴 것도 그때 즈음이었다. 학교생활도 엉망이 돼갔다. ‘빨리 승급하려면 사람을 많이 소개시키고 휴학을 해서라도 회사에 자주 나와야 한다’는 강사의 강요 때문에 학교 수업을 빼먹는 일이 갈수록 잦아졌던 것이다.강씨는 결국 다단계판매에 발을 들여놓은 지 두달쯤 된 그해 11월 이 생활을 그만둬야겠다는 생각을 굳히기에 이르렀다. 그렇지만 이미 300만원을 훨씬 웃도는 물품을 구입한 뒤여서 중간에 그만두기도 말처럼 쉽지 않았다. 회사쪽은 다단계사업·제품 설명회 때 약속과는 달리 환불 요청을 쉽게 들어주지 않았다. 364만원어치 가운데 200만원가량만 돈으로 되돌려주고 나머지 160여만원어치는 환불해줄 수 없다는 태도로 나왔다. 관련법규에는 판매원이 3개월 안에 환불 요청을 할 경우 100% 환불토록 돼 있지만, 회사쪽에선 자석요의 포장을 뜯었다는 등 갖가지 이유를 들이댔다.

“너무 화가 나고 기가 막히더군요. 그래서 법원에 소송을 내기로 맘을 먹었던 겁니다.”

예상을 전혀 못한 바는 아니지만 소송은 쉽지 않았다. 알음알음으로 대서소에 찾아가 소장을 작성해 법정다툼에 들어갔지만 법원쪽의 반응은 시큰둥하기 짝이 없었다. 다 큰 성인이 자기책임 아래 계약을 맺고 사업하다가 입은 손해를 왜 보상해줘야 하는 식이었다.

사진/ 다단계판매 관련 정보를 제공하는 안티피라미드운동본부 홈페이지.
너무 억울했지만 포기하는 수밖에 없다는 절망감에 싸여 있었는데 지난해 4월 아는 사람을 통해 다단계판매를 반대하는 ‘안티-피라미드’ 모임이 있다는 걸 알았다. 이 모임의 인터넷 사이트에 들른 강씨는 소송에까지 이르게 된 자신의 사연을 게시판에 띄웠다. 안티-피라미드쪽은 강씨 사건을 맡아 체계적으로 진행할 계획 아래 서울YMCA를 통해 변호사를 선임하는 등 차근차근 준비를 해나갔다. 안티-피라미드와 YMCA가 나서 조직적인 대응전략을 펴자 회사쪽은 당황하기 시작했다. 소송초기 일언반구 반응이 없던 회사쪽이 몇 차례씩 연락을 해와 합의하자고 종용한 게 이때부터였다.

강씨는 “그때 합의를 했더라면 요구한 돈은 다 받을 수 있었지만 중간에 소를 취하하면 뜻을 같이한 이들을 배신하는 것이란 생각이 들어 합의요청을 들어주지 않았다”고 말했다. 자신의 피해에 대한 법원의 판결을 얻어내 또다른 피해를 막는 선례를 남긴다는 안티-피라미드쪽의 취지에 도움이 되고 싶었다는 것이다. 강씨는 안티-피라미드와 접촉한 직후인 지난해 5월 이후 10여 차례나 재판에 참석하는 고역을 통해 이번에 정신적 위자료 지급이란 조정결정을 얻어냈다.

서울YMCA와 손잡고 강씨 사건을 이끌어온 안티-피라미드 사이트 운영자인 정미현씨는 “법원의 최종 판결이 아닌 조정결정이란 점에서 다소 아쉬움이 있지만, 다단계판매로 인한 정신적 피해를 보상하라는 결정으로는 첫 사례라는 점에서 뜻이 깊다”고 평가했다. 교육장에서 입은 상해나 물품환불과 직접 관련된 것에 지나지 않았던 그동안의 피해보상과는 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이다. 정씨는 “강씨에게 피해를 입힌 회사를 상대로 현재 10여명이 또다른 민사소송을 진행중인데 이번 조정결정이 선례가 돼 유리한 판결을 얻어낼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회사의 불법행위 입증하기 어렵다”

물론, 이런 기대감에도 불구하고 다단계판매로 피해를 입은 이들이 모두 강씨처럼 정신적 피해까지 보상받기는 대단히 어려운 게 현실이다. 회사쪽이 명백한 불법행위를 저질렀다는 물증을 확보하지 못할 경우 피해자쪽에서 소송을 제기하더라도 보상받을 가능성이 거의 없다. 강씨와 부딪친 ㅇ사의 경우 신규회원을 모집하며 가입비 명목으로 물품을 판매하는 수법을 통해 급성장세를 타다가 서울시로부터 영업정지 처분을 당한데다 이 결정을 둘러싼 법정다툼에서도 패소한 뒤였다. 이런 약점 때문에 강씨의 요구를 들어주는 법원의 조정결정을 순순히 따랐던 것이다.

정미현씨는 “강씨의 보상 사례가 다른 피해자들의 구제 가능성을 보장한다고 보기는 어렵다”며 “다만, 다단계판매회사들이 극도로 주의를 기울이고 경각심을 갖도록 하는 의미가 더 클 것”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이번에 정신적 피해를 보상하라는 법원 결정이 내려졌다 해도 사건마다 사정이 다르고 피해자쪽에서 명백한 불법행위를 입증해내야 하는 점 때문에 재판을 통해 피해를 보상받기는 여전히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따라서 판매원에게 짐을 떠넘기는 회사쪽에 합당한 책임을 물리는 법·제도적 장치가 마련돼야 한다는 것이다.

김영배 기자 kimy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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