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법체계로 살펴본 BW 저가매입… 주주의 위탁재산 가로챈 행위로 집단소송 대상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의 아들 재용씨의 변칙증여는 불공정경쟁거래행위가 아니라는 서울고등법원의 판결이 큰 파문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지난 99년 삼성SDS가 재용씨에게 시장가격보다 훨씬 싼값에 신주인수권부사채(BW)를 넘겨준 일에 대해, 공정거래위원회는 부당내부거래로 보고 과징금을 부과했다. 이에 삼성SDS는 불복을 하고 공정위를 상대로 행정소송을 내서 서울고등법원의 승소판결을 얻어냈다. 참여연대는 “법원이 공정거래법의 입법취지보다는 법규의 문구 하나하나에 치중해 좀더 전향적인 판결을 내리지 못한 것은 매우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는 논평을 냈고 공정위도 이에 불복해 대법원에 상고할 방침이라고 한다.
기업 관련 법체계가 잘 정비되어 있는 미국에서 이와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면 법적으로 어떻게 해결이 되었을까 생각해봤다. 우선 미연방 정부가 반독점법(Anti-Trust Law)을 근거로 재판을 걸었다면 연방법원도 한국법원과 비슷한 취지의 판결을 내렸을 것이라 여겨진다. 공정거래법이나 반독점법의 취지는 기업간 공정한 경쟁을 촉진하고 담합이나 시장지배적 지위남용 등 경쟁을 저해하는 행위를 규제하자는 것인데, 이재용씨의 BW 저가매입은 기업간의 공정한 경쟁을 저해한 행위로 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주주에 대한 의무를 이행하지 않았다
그러면 미국에서 이런 일이 그냥 넘어갔을까? 천만의 말씀이다. 아마 삼성SDS 주식을 갖고 있는 사람들의 소송이 수백, 수천건 제기되었을 것이다. 미국에서는 회사의 경영자들이 기업(더욱 구체적으로는 주주)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여기며 경영해야 한다는 원칙이 있다. 주주들은 경영자들을 믿고 자신들의 돈뿐만 아니라 폭넓은 재량권까지 맡겼으니 당연히 경영자는 회사와 주식가치의 극대화를 최우선의 목표로 삼아야 한다. 이런 원칙 아래 파생된 의무가 두 가지이다. 하나는 ‘회사 및 주주에 대한 충성의 의무’(Duty of Loyalty: 미국에서는 하급 직원보다 상급 임원의 충성심이 더욱 강조된다)이고, 다음은 ‘성실한 관리의 의무’(Duty of Care)이다.
회사 및 주주에 대한 충성의 의무 불이행은 흔히 회사의 이사회 임원, 주요 간부 혹은 대주주(통칭하여 ‘내부자’)가 회사와 거래(self-dealing)를 할 때 나타난다. 회사의 자산이나 주식을 내부자에게 판다든가 아니면 내부자가 별도로 경영하는 회사에 하청을 넘겨준다든가 할 때면, 보통 시장거래보다 훨씬 유리한 조건으로 계약을 할 위험이 있기 때문에 미국 법원들은 통상 이에 엄격한 제재를 가한다.
우리나라 기준으로 보았을 때는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라 생각하겠지만, 미국에서는 이를 다르게 보는 것이다. 주주들이 재산을 모아 경영자들에게 맡기고 그것을 운영할 수 있는 폭넓은 권한을 주었는데 경영자들이 그러한 결정권한을 이용해 자신에게 유리한 거래를 한다면 그것은 회사자산(혹은 회사가치)을 훔치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어물전을 고양이한테 맡길 때 고양이가 가게 물건을 못 집어먹게 할 방법이 없다면 고양이에게 맡긴 가게는 아무리 해도 제대로 운영될 수가 없다. 마찬가지로 소유자(주주)의 위탁을 받아 경영하는 사람들이 회사재산을 마음대로 훔칠 수 있다면, 소유와 경영의 분리는 근본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 이러한 내부거래가 있을 때 미국 법원들은 그러한 거래가 기본적으로 불공정하다고 가정한다. 내부자들이 거래의 공정성(해당 거래과정이 모두 공개적으로 이루어졌고 가격이 공정하였음)을 방증하지 못하는 이상 이들 내부자들은 개인재산을 이용하여 회사에 끼친 손해를 모두 물어내는 게 당연하다.
또 하나의 의무는 성실한 관리의 의무이다. 경영자는 회사를 위해 결정을 내릴 때 모든 일을 자신의 자산을 관리하듯 성실하고 신중하게 해야 한다. 특히, 회사자산을 팔 때는 너무 성급하게 파는 것은 아닌지, 제 가격을 다 받는 것인지 신중하게 살펴야 한다. 만약 경영자들이 성실한 관리의 의무를 이행치 않아 회사에 손해를 입혔다면 주주들은 소송을 통하여 경영자들의 개인자산을 빼앗아 회사의 손해를 보전할 수 있다.
미국이라면 이재용씨가 삼성SDS의 대주주이고 내부자인 이상, 삼성SDS와 이재용씨간의 거래는 기본적으로 불공정한 거래라는 가정이 성립된다. 이재용씨가 거래의 공정성(거래과정 및 가격)을 입증하지 못하는 이상, 이재용씨가 패소를 할 것이고 주주들은 이재용씨가 회사에 입힌 손해(자신이 회사와의 거래과정에서 본 이득)만큼 그의 개인재산을 빼앗아 올 수 있다.
또 주주들은 삼성SDS 이사회 임원과 간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을 것이다. 이재용씨에게 BW를 팔면서 가격도 제대로 알아보지 않고 헐값에 넘겼다면(서울고등법원이 이재용씨의 SDS BW 인수는 부당한 재산증여임을 인정했다) 삼성SDS 경영자들은 성실한 관리의 의무를 다하지 않은 이유로 회사에 끼친 손해를 개인자산으로 물어냈어야 했을 것이다. 추가로, 주주들이 증권집단소송을 제기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를 입증하기 위해서는 회사 내부자들이 주주들을 속였고 이 때문에 주가가 하락했다는 것을 보여야 하기 때문에 위의 두 가지 의무불이행 소송 때보다는 주주들이 이기기 힘들 것이다.
정부 개입보다는 주주 위한 법제도 마련
이렇듯 미국에서는 기업이 부도덕한 일을 저질러 회사에 손해를 입혔을 때, 정부가 나서서 해결하기보다는 주주들이 법절차를 통해 잘못된 점을 시정한다. 주주와 회사와 경영자간의 관계는 사적계약 관계이므로 이러한 사적 관계에서 생긴 문제는 손해본 당사자들이 소송을 통해 해결한다. 정부는 공정한 거래가 이뤄지도록 룰을 만들고 권리 이행의 방도와 법절차 등을 만드는 일만 하고, 개별적인 사건의 잘잘못을 가리는 일에는 좀체 개입하지 않는다.
이재용씨 변칙증여사건을 바라보는 국민 중에는 정부가 좀더 적극적으로 대처해야 한다는 의견을 가진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하지만 이렇게 분쟁이 있을 때마다 정부의 개입을 바라는 태도가 오늘날의 비대한 정부를 만든 하나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오히려 손해본 국민 개개인이 자신의 권리를 자력으로 찾을 수 있게 법제도를 정비하는 일이 무엇보다 시급하다.
이석준/ 미국 밴더빌트대 법학 박사 alway2@hotmail.com.


사진/ 이재용(사진 가운데)씨의 BW 저가매입은 기업간 공정한 경쟁을 저해하지 않았지만 주주의 권리를 심각하게 훼손했다.

사진/ 주주를 섬겨라! 이재용씨의 변칙 재산 증여를 비판하는 시민단체 회원들.(장철규 기자)

사진/ 민간위원까지 참여한 공정거래위원회 정원 회의 모습.(김정효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