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존 화폐 저장하는 카드형 전자지갑… 편리하고 위·변조 없지만 정보유출 우려
괴테는 “지갑이 가벼우면 마음이 무거워진다”고 했다. 사실 두툼한 지갑에 빳빳한 만원짜리 수십장이 빼곡이 들어차 있으면 그 두께만큼 행복감이 차오르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런데 그 돈이 죄다 얇은 카드 한장에 고스란히 저장되어버린다면 어떨까. 내 손에 들려 있던 돈이 오간데없이 사라진 건 아니지만, 괴테가 말한 대로 얇아진 그만큼 마음이 무거워질지 모른다. 그러나 한편으로 ‘성가신’ 지갑 대신 신용카드만한 카드 한장에 돈을 얼마든지 담을 수 있다는 ‘편리함’에 절로 탄성을 내지를 사람도 있을 것이다. 디지털 기호 형태로 얇은 카드 한장에 담긴 돈, 이것이 전자화폐다.
우리가 쓰는 동전과 지폐가 점차 사라지고 이를 전자화폐가 대신하는 ‘현금없는 세상’이 성큼 오고 있다. 아직 우리 생활 속에 깊숙이 들어와 있지는 않지만 실제로 쓰이고 있는 곳도 적지 않다. 전자화폐를 쓰고 있는 두 사람의 하루 일상을 따라가보자.
돈, 호주머니에서 점차 사라진다
여름비가 오락가락하던 지난 7월5일 낮, 서울 강남의 역삼사거리 주변 음식점인 ‘한가네가마솥곰탕’집. 근처 금융결제원에서 일하는 안태현(29)씨가 뜨거운 곰탕 한 그릇을 말끔히 비워내고 막 일어서던 참이었다. 안씨가 먼저 일어나자 같이 온 회사 동료들이 서로 밥값을 내겠다며 지갑을 꺼냈다. 동료들을 뿌리치고 카운터 앞에 선 안씨가 와이셔츠 주머니에서 카드를 꺼냈다. 그런데 이상하다. 카드를 건네받은 음식점 주인은 ‘긁지’ 않았다. 대신 카드 단말기 아래쪽에 붙은 슬롯(카드를 넣는 곳)에 받은 카드를 집어넣었다. 신용카드가 아닌 IC형 전자화폐카드 K-캐시였다.
6만5천원. 단말기 모니터에 안씨의 카드에 담겨 있는 금액이 찍혔다. 음식점 주인은 단말기 숫자판을 눌러 밥값 1만5천원을 입력했다. 그러자 단말기는 5만원이 남았다는 메시지를 모니터에 남긴 뒤 곧바로 카드를 뱉어냈고 동시에 영수증이 찍혀나왔다. 카드와 영수증을 건네받은 안씨가 음식점을 나왔다. 영수증에 서명은 필요없었다. 김씨가 치른 밥값이 이미 음식점 주인이 거래를 트고 있는 한빛은행 계좌로 입금됐기 때문이다. 음식점 주인은 “전자화폐로 계산하면 신용카드와 달리 곧바로 돈이 들어와 좋지만, 전자화폐카드로 결제하는 사람은 하루에 한명 보기도 힘들다”고 웃어보였다.
길 하나 건너에 있는 역삼문구로 향한 안씨는 문구점에서 펜과 연필칼 등을 샀다. 모두 1350원어치다. 안씨가 전자화폐카드를 건네자 문구점 주인은, 아까 곰탕집 주인이 그랬던 것처럼 한쪽에 설치된 전자화폐 판독단말기에 카드를 넣고 금방 계산을 끝냈다. 잔돈을 거슬러 받을 필요도 없었다.
회사로 들어온 안씨는 사무실 복도에서 직원들과 함께 자동판매기 앞에 섰다. 자판기 앞쪽에는 다른 자판기와 달리 전자화폐카드를 입력하는 슬롯이 따로 붙어 있다. 안씨가 카드를 집어넣자 자판기 현재금액란이 4만8650원이 남았음을 알렸다. 500원짜리 캔음료수를 뽑을 때마다 금액란은 4만8150, 4만7650…으로 자꾸 줄었다.
같은 날 오후 종로1가. 몬덱스코리아에 근무하는 김해민(28)씨가 택시를 잡아탔다. 몬덱스라는 로고가 새겨진 ‘월드콜’ 콜택시였다. 목적지에 이른 택시의 요금은 1300원. 김씨가 지갑을 열어 꺼낸 건 현금이 아니라 한쪽에 반도체 칩이 붙은 몬덱스 전자화폐카드였다. 그러자 택시운전자 박학봉씨도 윗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냈다. 전자계산기처럼 생긴, 손바닥만한 휴대용 전자화폐 단말기다. 운전자 박씨는 김씨가 내놓은 카드를 단말기 한쪽에 꽂고 다른쪽에는 자신의 전자화폐카드를 꽂았다. 그런 다음 숫자판을 눌러 1300을 입력했다. 김씨의 카드에서 1300원이 빠져나가 순식간에 박씨의 카드로 옮겨졌다. 이어 박씨가 택시 안에 설치된 휴대전화를 이용해 1300을 누르자 운전석에 붙은 영수증지급기가 간이 영수증을 찍어냈다. 박씨는 “엊그제는 을지로의 한 인쇄소에서 일하는 사람이 전자화폐카드로 요금을 지불했다”며 “거스름돈을 주고받을 필요가 없어 편리하다”고 말했다. 또 “이렇게 요금이 저장된 카드를 사나흘에 한번씩 은행에 들고가 계좌에 입금시킨다”고 덧붙였다.
택시에서 내린 김씨는 근처 종로2가 홀리스 커피전문점에서 3300원 하는 커피를 마신 뒤 역시 전자화폐카드로 결제했다. 광화문에 있는 정동 스타식스에 가서 영화를 볼 때 관람료 7천원도 카드에서 빠져나갔다. 휴대용 전자화폐 단말기를 꺼내보인 김씨는 “집에서 동생에게 용돈을 줄 때도, 아까 택시요금을 계산할 때처럼, 내 카드와 동생의 카드를 꽂아 이전시키면 된다”고 자랑했다. 그는 ‘현금이 필요없는 21세기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라고 말하는 듯했다.
‘화폐의 혁명’을 불러올 미래의 화폐
‘미래의 화폐’로 불리는 전자화폐가 또 하나의 ‘발행’화폐는 아니다. 화폐는 국가만이 독점발행하는 것으로, 누구나 화폐를 발행할 수 있다면 그 즉시 돈은 더이상 돈의 구실을 할 수 없다. 전자화폐는 기존의 화폐를 담는 일종의 카드형 ‘전자지갑’이다. 대표적인 전자화폐인 IC형 전자화폐카드에는 카드 한쪽에 엄지손가락만한 반도체 칩이 붙어 있다. 이 내장된 마이크로 칩에 화폐의 가치를 디지털 기호로 저장하는 것이다. 신용카드에 이용되는 마그네틱 띠에 견줘 이 칩은 기억용량, 기능, 보안성이 획기적으로 높은 데다 얼마든지 용량을 확대할 수 있어 ‘화폐의 혁명’을 불러올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전자화폐를 사용하려면 전자화폐카드, 카드 판독단말기, 그리고 금액충전단말기가 필요하다. 현재 카드는 각 은행과 카드사들이 발급하고 있고, 판독단말기는 전자화폐업체들이 음식점 등에 시범적으로 보급하면서 가맹점을 늘려가고 있다. 카드 충전은 전자화폐입출금기나 은행 CD기, 가맹점 판독단말기 등을 통해 가능하다. 모두 자신의 예금계좌와 연결해 원하는 금액만큼 카드로 전송시키는 방식이다. PC상에 조그마한 더미(Dummy)단말기를 갖추면 가정이나 사무실에서 인터넷뱅킹을 통해 충전할 수도 있으며, 휴대폰이나 공중전화를 이용해 충전하는 기술도 개발되고 있다. 충전은 현행 여신전문금융업법상 50만원 한도에서 가능하다.
현재 개발, 사용되고 있는 전자화폐는 신용카드와 교통카드가 합쳐진 원카드 개념이 보편적이다. 카드 한장에 마그네틱 띠와 반도체 칩이 함께 붙어서 전자화폐, 신용카드, 교통카드로 쓰이는 것이다. 신용카드로는 1만∼2만원어치 이하를 거래하기 어려운 반면, 전자화폐는 주로 소액결제에 쓰인다. 따라서 일반 상점, 자판기, 신문가판대, 편의점, 택시, 노래방, PC방, 패스트푸드점, 인터넷 쇼핑몰 등 모든 곳에서 사용할 수 있다.
전자화폐는 현금을 쓸 때 일일이 돈을 세야 하거나 동전을 넣어다니는 불편을 덜어주고, 신용카드처럼 승인, 정산하는 절차를 거치지도 않는다. 거스름돈을 받느라 기다릴 필요도 없고 현금을 찍어내고 관리하는 비용도 줄여준다. 또 가맹점은 신용카드와 달리 받는 즉시 판매대금을 자신의 예금계좌에 넣어둘 수 있기 때문에 현금 도난의 위험을 피할 수 있다. 기업쪽은 거스름돈 때문에 물건 가격을 50원, 100원 단위로 책정해왔지만 이제 1원 단위로도 계산이 가능하므로 99원 등으로 가격을 다양화할 수 있다.
전자화폐는 12살 이상이면 누구나 발급받을 수 있다. 하지만 당장 일상생활에서 전자화폐가 현금을 대체할 것인지는 쉽게 점치기 어렵다. 유럽에서 전국적으로 전자화폐카드가 보급돼 있긴 하지만 실제로 쓰이는 건 일어나는 구매의 5%에 불과하다. 현금을 쓰는 데 따른 불편함을 아직은 크게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현금이 필요없는 세상’이 가장 먼저 온 건 교통분야다. 교통카드는 전국적으로 현재 2천여만장이 사용되고 있다. 국내의 전자화폐 개발업체 5곳 대부분이 교통카드를 내세워 시장을 파고들고 있는 것이다. 국내 전자화폐시장은 시범사업을 끝내고 상용화에 갓 들어선 단계라고 볼 수 있다.
시장 선점 위한 전자화폐 개발경쟁 치열
전자화폐의 선두주자는 마스타카드의 자회사인 몬덱스코리아다. 몬덱스는 국민은행과 손잡고 국민카드 고객들을 대상으로 프리패스 전자화폐카드를 발급하고 있다. 지난해 상용화가 시작된 이후 23만여장이 발급됐다. 몬덱스는 개인택시에도 전자화폐 서비스를 개시해 서울시내 ‘월드콜’ 콜택시 1400여대에 전자화폐 요금결제단말기를 보급했다. 몬덱스는 이어 제주도 관광단지를 중심으로 전자화폐 가맹점을 넓혀나가고 있다.
금융결제원과 각 은행이 참여해 개발한 K-캐시는 강남구 역삼동 주변의 식당, 문구점, 소매점 등 1300여곳에 시범적으로 단말기를 설치했다. K-캐시 카드는 금융결제원과 은행직원들을 중심으로 5천여장이 발급됐다. 가맹점 단말기에 저장된 거래 내역은 시스템서비스제공자(VAN)를 거쳐 고객 거래은행에서 가맹점의 거래은행으로 판매대금이 이전된다.
삼성카드, LG캐피탈 등 신용카드사들이 주축이 된 A-캐시는 수원, 남양주, 의정부 등 아직 버스카드가 사용되지 않고 있는 지역을 집중 공략하고 있다. A-캐시는 올해 이들 지역에 교통카드 100만장을 발급할 계획이다. 김포, 원주지역에서 시범사업을 벌여온 A-캐시는 8월부터 원주지역부터 상용화에 들어가기로 했다.
롯데리아, 삼성물산 등이 주축이 된 비자캐시코리아는 서울과 일산지역 롯데리아 등 패스트푸드점을 중심으로 비자캐시 3천여장을 보급했다. 아직 이용자는 대부분 회원사인 주택, 하나, 외환은행 그리고 외환카드 직원들이다.
부산시가 부산은행과 손잡고 부산·경남지역에서 상용화시키고 있는 마이비 전자화폐(하나로카드)는 주로 교통카드로 이용되고 있다. 마이비 카드는 자판기 등으로 점차 가맹점을 확대하고 있으며 지금까지 약 4만여장이 발급됐다. 가맹점은 2500여개로 하루 9천여건(교통 8천여건, 자판기 등 1천여건), 800여만원어치가 거래되고 있다.
표준화·개인정보 보호 대책 마련 시급
전자화폐가 현금을 대체하려면 무엇보다 언제, 어떤 곳에서 무슨 물건을 사든 카드 한장으로 다 해결할 수 있어야 한다. 카드가 안 쓰이는 데가 있어서 현금을 따로 지갑에 넣고 다녀야 한다면 전자화폐는 ‘또다른 불편’ 이상의 것이 되기 어렵다. 지급결제연구포럼 탁승호 회장은 “가맹점 확대를 위해 가맹점에 세제상의 혜택을 주거나 가맹점 정산수수료를 신용카드(0.3%)보다 훨씬 낮춰줄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가맹점 확대 못지않게 제기되는 게 전자화폐 표준화다. 현재 전자화폐업체들이 개발해 보급하고 있는 카드 판독단말기는 제각각이다. 음식점에서 5개 회사 전자화폐를 사용하려면 모든 회사의 단말기를 다 갖춰야 한다. 교통카드의 경우 카드마다, 지방마다 다른 방식을 채택하고 있기 때문에 서울과 부산에서 동시에 사용할 수 없는 형편이다. 그러나 이미 상용화되고 있는 마당이어서 표준화는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니다. 산업자원부 디지털전자산업과는 “표준화 이야기는 많이 나오고 있지만 어떤 식으로 할 것인가를 둘러싸고 논란이 많다”며 “업체들마다 이해관계가 맞물려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기존업체들이 “우리가 이미 단말기를 깔아둔 상태인데, 표준화는 후발업체들이 전자화폐시장에 뛰어드는 길을 터주는 것”이라며 반발하고 있는 것이다.
전자화폐는 지폐나 신용카드에 비해 위조나 변조의 위험이 거의 없다. 정보통신부 정보보호산업과는 “전자화폐를 위조하려면 반도체 회사가 가진 수준의 기술과 장비를 갖추고 있어야 한다”며 “복제가 가능해지는 순간 전자화폐는 사망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은행을 거치지 않고 돈이 이동할 경우 자금추적이 어렵고, 이에 따라 금융실명제를 피하거나 탈세 또는 돈세탁 목적으로 전자화폐가 악용될 우려도 제기된다.
전자화폐에 쓰이는 마이크로 칩은 엄청난 저장용량을 갖고 있기 때문에 결제기능 이외에 신분확인용 데이터나 의료기록 등 신상기록까지 모두 담을 수 있다. 현금과 달리, 이용자의 거래내역뿐만 아니라 모든 개인정보가 노출될 위험이 뒤따르는 것이다. 지급결제연구포럼 탁승호 회장은 “미국에서 전자화폐 보급이 더딘 것도 이런 문제 때문”이라며 “전자화폐를 둘러싼 분쟁을 해결할 이용자보호대책을 우선 마련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사진/ 각종 전자화폐카드들. A-캐시, 몬덱스 캐시, K-캐시(왼쪽부터).

사진/ 금융결제원 직원 안태현씨가 음식점에서 전자화폐를 사용하고 있다.

사진/ 자판기에서 전자화폐를 사용하는 모습.

사진/ 휴대용 카드결제기를 이용해 몬덱스 카드로 돈을 이체하는 모습.(강창광 기자)

사진/ 휴대용 카드결제기를 이용해 택시요금을 지불하는 모습.(강창광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