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 회장이 2008년 4월22일 서울 태평로 삼성 본관에서 퇴진 성명을 발표하고 있다. 당시의 배상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고, 그는 다시 삼성그룹 회장으로 복귀했다.한겨레 김진수
법원도 몰랐던 감형 사유 뒤의 이면계약 이 회장은 당시 재판부에 제출한 양형 참고자료에서 “오랫동안 사회적으로 물의를 빚은 데 대해 책임감을 느낀다. 회사의 손해 발생 여부를 떠나 공소장에 피해액으로 기재되어 있는 돈을 회사에 지급하겠다”며 삼성 특검이 피해액으로 든 2508억원을 삼성 에버랜드와 삼성SDS 쪽에 지급했다고 밝혔다. 실제 피해액이 재판 결과에 따라 얼마로 인정되건 사회적·도의적 책임에 따라 삼성 특검이 제시한 피해액을 이 회장 개인 돈으로 메우겠다고 약속한 것이다. 재판부로서는 범죄로 발생한 피해가 회복된 이상 큰 폭의 감형을 해줄 명분이 생긴 셈이다. 그러나 ‘피해액 969억원과 1539억원을 각각 지급받았다’는 확인서까지 제출한 삼성 에버랜드와 삼성SDS는 이 돈을 그해 회사의 공식 수익으로 계상하지 않았다. 상법상 수익금은 해당 연도의 수익으로 회계처리해야 함에도 두 회사는 2008년 공식 재무재표에 이를 반영하지 않았다. 2508억원이라는 천문학적인 액수가 오고 갔음에도 이같은 거래 내역이 장부에 기재되지 않은 황당한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이에 경제개혁연대는 “분식회계를 하고 있다는 뜻이며, 수익금을 편입시키지 않아 회사에 손해를 미치고 있다”며 지난 4월 서울중앙지검에 두 회사의 전·현직 경영진들을 고발했다. 그러나 최근 검찰이 이 사건에 무혐의 처분을 하면서 이 회장과 두 회사 사이의 ‘이면계약’이 모습을 드러냈다. 두 회사와 이 회장 사이에는 ‘재판을 통해 피해액이 확정되면 손해액을 정산한다’는 ‘이면계약’이 맺어져 있었다. 언제 다시 이 회장에게 돌려줘야 할지 모르는 돈이기 때문에, 두 회사로서는 수익금을 정상적으로 계상할 수 없었던 것이다. 앞서 본 우여곡절의 재판 과정을 통해 이 회장에게 인정된, 두 회사에 끼친 손해 액수는 227억원에 그쳤다. 결국 이 회장은 ‘이면계약’에 따라, 두 회사로부터 최종 유죄 인정 액수를 제외한 2282억원을 돌려받았다. 이 회장은 당초 ‘오랫동안 사회적 물의를 빚은 데 대해 책임감을 느껴’ ‘손해 발생 여부를 떠나’ ‘공소장에 피해액으로 제시된 돈을 지급하겠다’고 재판부에 약속했지만, 뒤로는 몰래 사후 정산 계약을 맺어둔 것이다. 물론 재판부는 판결 선고 당시 이같은 사실을 알지 못했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피해액을 갚겠다는 약속만 믿고 형을 감경해줬지만, 이미 버스는 떠난 뒤였다. 더구나 이 회장은 지난해 연말 ‘나 홀로 사면’을 통해 이미 완벽한 자유의 몸이 된 지 오래다. 법원이 삼성과 이 회장에게 속아 넘어갔다면, 검찰은 적극적으로 면죄부를 준 쪽이다. 특히 검찰은 최근 이 사건의 고발인인 경제개혁연대 쪽에 보낸 무혐의 처분 통지서에서 “이 회장 쪽이 세부약정서를 첨부하지 않고 ‘공소장 기재 금원 지급 관련’ 서면만 재판부에 제출함으로써 법원으로부터 유리한 양형 판단을 받는 자료로 사용되도록 한 것은 사실이다”라고 언급하고 있다. 쉽게 말해, 삼성과 이 회장이 법원을 속여 가벼운 처벌을 받았다는 사실은 인정하지만 ‘그래서 어쩌라는 거냐’는 말이다. 두 회사 입장에서는 각각 1천억원 정도의 돈을 ‘토해낸’ 셈이지만, 검찰은 ‘이는 약정서에 따른 정상적인 돈거래’라고 설명했다. “검찰은 삼성만 보면 움츠러드나” 법원에 대한 국감 이틀 뒤인 지난 10월7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는 서울고검·중앙지검에 대한 국감을 진행했다. 민주당 이춘석 의원은 “도둑이 도둑질하다가 검찰에 걸렸을 때 피해액을 변상한다고 해서 석방했더니, 변상 안 하겠다고 버티면 두 배로 무겁게 처벌해야 하는 것 아니냐”며 “틈만 나면 공정사회를 말하고 있는데 (앞서 말한) 도둑질한 사람을 처벌해야 한다면, 삼성도 처벌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나라당 이은재 의원도 “국민들은 ‘검찰이 삼성과 이 회장만 보면 왜 움츠러드느냐’고 말한다”며 “결국 검찰이 법원을 속인 삼성과 이 회장에 대해 면죄부를 준 것 아니냐”고 질타했다. “세법의 발전과정은 삼성의 편법·탈법과의 투쟁사였다.” 과거 10년여간 진행된 삼성 일가의 불법 경영권 승계 논란을 바라보며, 세법학자들이 내놓은 평가였다. 그러나 이제 법원을 속이고 검찰의 비호를 받는 삼성을 본다면, 대한민국의 사법 정의는 삼성과의 투쟁을 이미 포기한 게 아닐까. 노현웅 기자 한겨레 법조팀 golok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