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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축복 혹은 저주, 뜨거워진 M&A


현대건설·우리금융·하이닉스 등 인수·합병 대기
자력 성장 고집하던 국내 기업의 발전 요인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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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0-07-13 23:06 수정 : 2010-07-15 1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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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건설(왼쪽)·하이닉스 등 덩치가 큰 매물들이 최근 국내 M&A 시장에서 새로운 주인을 찾아 나설 예정이다. M&A 성공 여부는 기업의 성장과 좌초를 좌우한다. 한겨레 자료

일본 노무라증권이 2008년 9월 파산한 리먼브러더스의 아시아·유럽 지역 사업부문을 인수한 것은 국제 금융계에서 대표적인 기업 인수·합병(M&A) 성공 사례로 꼽힌다. 노무라는 이를 통해 단숨에 글로벌 영업 역량을 강화할 수 있었다. 2008년에는 인수 부담으로 7천억엔이 넘는 적자를 보았지만, 글로벌 시장점유율이 불과 1년 만에 1.5%에서 5%로 뛰면서 2009년에는 700억엔에 가까운 흑자를 기록했다.

 

SK·두산, M&A로 역동적 성장세 보여

경제학에서는 M&A를 가장 강력한 기업 성장 전략 중 하나로 꼽는다. 기업이 성장하는 데는 기술과 노하우, 인재가 필요하지만 자체적으로 이런 역량을 구축하는 데는 많은 시간과 비용이 들어간다. 만약 적정한 비용으로 외부의 우수한 기술과 인재를 흡수할 수 있다면 가장 효율적인 성장 전략이 될 것이다. M&A를 가장 성공적으로 활용한 최고경영자로는 세계 네트워크 장비 시장의 강자인 미국 시스코의 존 체임버스가 꼽힌다. 체임버스는 1995년 취임 이후 130여 건의 기업 M&A를 통해 시스코를 미국에서 가장 역동적인 기업으로 성장시켰다.

미국에 시스코의 체임버스가 있다면 한국에는 SK그룹의 고 최종현 회장이 있다. 최 회장은 1980년에 유공을, 1994년에 한국이동통신을 차례로 인수해, 오늘날 에너지와 정보통신이라는 그룹의 양대 사업축을 완성했다. 재계에서는 이를 두고 자력이 아니라 공기업을 불하받아 성장했다고 폄하하는 이들도 있지만, 시스코의 예로 보면 시샘 차원으로 치부해도 좋을 듯하다. 두산도 외환위기 이후 적극적인 기업 M&A로 그룹 사업구조를 주류에서 중공업으로 탈바꿈시켰다. 두산은 2001년 한국중공업(현 두산중공업)을 시작으로 고려산업개발, 대우종합기계, 미국 AES, 연합캐피털, 영국 미쓰이밥콕, 루마니아 IMGB, 미국 밥캣, 동명모트롤, 노르웨이 목시 등 10개사를 국내외에서 차례로 인수하며 7조원이 넘는 거액을 투자했다. 2007년 미국 중장비 업체인 밥캣을 49억달러에 인수한 뒤 때마침 터진 금융위기로 유동성에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아직 성패를 논하기는 일러 보인다. 오히려 재계와 학계에서는 두산을 두고 우리 기업도 M&A를 통해 성장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 사례로 높이 평가한다.

그동안 국내 기업들은 경영철학이나 기업문화가 다른 기업을 인수하는 데 소극적이었다. 기업을 특정 재벌총수의 사유재산 정도로 생각하는 인식도 크게 작용했다. 이렇다 보니 대다수 기업은 자력 성장 전략만이 정답인 것처럼 여겨왔다. 우리나라가 세계 15위권 경제 규모를 자랑하지만 M&A 규모는 세계 30위권에 머물러 있는 게 그 결과물이다.

최근 들어 한국 기업들의 기업 M&A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한 예로 그동안 자력 성장 전략을 고집해온 삼성그룹이 M&A 전략의 활용을 적극 모색 중이다. 삼성경제연구소의 한 관계자는 “머지않아 가시적 결과가 나올 수 있다”고 귀띔한다. 이같은 변화는 2000년대 이후 국내 기업들의 성장 둔화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자체 성장 전략만으로는 성장에 한계가 있음을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또 중국·인도 등 아시아 기업들이 글로벌 경제위기 속에서도 첨단 기술과 신성장 동력, 글로벌 시장지배력 강화를 위해 해외 M&A를 적극 활용하는 것이 큰 자극제가 되고 있다.


 

시너지·가격·타이밍 못 맞추면 ‘승자의 저주’

이런 분위기를 반영한 것인지 최근 국내 M&A 시장도 점차 뜨거워지고 있다. 철강업계의 수위 기업인 포스코는 3조5천억원의 거액을 들여 대우인터내셔널 인수를 추진 중이다. 대우인터내셔널의 글로벌 네트워크와 해외 자원 개발을 통한 시너지 효과를 기대하고 있다. 현대그룹의 모태라고 할 수 있는 현대건설 인수를 둘러싼 현대 방계 그룹 간의 신경전도 물밑에서 치열하다. 정부가 연내 민영화를 공언한 우리금융지주와 지난해 매각 시도가 불발로 끝난 하이닉스도 M&A 시장의 예비 스타들이다. 금호아시아나의 부실로 인해 채권단의 손에 넘어간 대우건설과 대한통운도 결국은 새로운 주인을 찾아 시장에 나올 것이다.

하지만 M&A가 기업에 축복이 아니라 재앙이 되는 경우도 흔하다. M&A에 성공했지만 과도한 경쟁이나 의욕으로 지나치게 높은 가격을 지불한 나머지 기업 경영이 오히려 위험에 빠지거나 기대만큼 효과를 얻지 못하는 경우를 리처드 세일러 미국 시카고대 교수는 ‘승자의 저주’라고 이름 붙였다.

스코틀랜드왕립은행(RBS)의 2007년 네덜란드 ABN암로 인수는 역사상 가장 대표적인 승자의 저주 사례로 꼽힌다. RBS는 바클레이스와의 경쟁을 뚫고 금융계 사상 최고인 710억파운드(약 1010억달러)에 ABN암로를 인수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뒤늦게 거액의 부실이 드러나고 곧이어 금융위기가 본격화하면서 지금까지 두 차례에 걸쳐 총 535억파운드의 천문학적인 공적자금이 투입돼, 세계 최대 구제금융 은행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썼다. 국내에서 가장 대표적인 승자의 저주 사례는 금호아시아나그룹이다. 금호는 2006년 대우건설, 2008년 대한통운을 잇따라 인수하면서 외부 차입금을 포함해 10조5천억원의 거액을 쏟아부었다. 금호는 이를 통해 재계 순위가 14위에서 9위로 껑충 뛰었지만, 부채도 8조4천억원에서 23조4천억원으로 3배 가까이 급증하면서 때마침 불어닥친 금융위기의 거센 풍랑에 좌초했다.

전문가들은 기업 M&A의 성공 요인으로 기존 핵심 역량의 강화를 통한 시너지 효과, 합리적 가격, 타이밍 등을 공통적으로 꼽는다. RBS와 금호의 사례에서는 너무 비싼 가격을 지불한데다 금융위기라는 태풍을 코앞에 두고 배를 띄운 타이밍의 오류가 공통적인 실패 요인으로 꼽힌다. 국내 기업들이 이런 실패 사례들에서 제대로 교훈을 얻고 있는지는 분명치 않다.

한 예로 현대차그룹의 현대건설 인수 추진은 시너지와 가격, 타이밍에서 모두 의문점을 던져준다. 자동차 전문기업인 현대차는 건설이 주력이 아니다. 또 이미 엠코라는 건설사를 갖고 있다. 최소 3조원에 달하는 거액을 비주력사업에 쏟아부으려면 그만큼 타당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 경영권 방어를 위해 현대건설 인수에 올인하는 현대그룹과의 경쟁이 가열되면 인수 가격이 더 올라갈 수도 있다. 타이밍도 문제다. 올해 현대차의 실적은 승승장구다. 하지만 내년 이후에는 불확실하다고 경고하는 전문가가 많다. 특히 그동안 절치부심하던 글로벌 경쟁사들이 두 눈에 쌍심지를 켜고 달려들 가능성이 높다. 모태기업의 인수로 총수 가문의 자존심을 세울 수는 있더라도, 그룹 전체를 위태롭게 할 가능성이 단 1%라도 있다면 합리적 경영 판단과는 거리가 멀다. 한국 재벌의 가족경영 실패 사례만 하나 더 늘리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MB정부, 시장 변화 역행해 경영권 보호 정책만

곽정수 대기업전문기자

국내외 시장 변화에 반하는 이명박 정부의 역주행도 문제다. 정부는 ‘포이즌필’ 도입을 골자로 하는 상법 개정안을 추진 중이다. 포이즌필은 적대적 M&A에 대한 기업의 방어 수단 중 하나로, 기존 주주에게 신주를 훨씬 싼 가격으로 발행해 기존 주주의 지분율을 유지하거나 높여 경영권을 지킬 수 있게 하는 제도다. 정부는 포이즌필 도입을 통해 경영권이 안정되면 투자 확대 효과가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하지만 이미 순환출자 등으로 인해 대기업의 경영권을 적대적으로 인수하는 것이 어려운 상황에서 기업의 경영권 보호를 더욱 강화할 경우 정상적인 기업 M&A 시장마저 숨통이 막히고, 시장의 효율성은 떨어질 것이다.

곽정수 기자 jskwak@hani.co.krjskwa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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