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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불량 외자’가 시장을 뒤흔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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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1-06-20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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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외펀드 이용한 정체 불명의 외국자본… 무차별 유입돼 피해 속출해도 대책 없어

사진/ 역외펀드는 가짜 외자유치 과정에 개입돼 국내에 유입된다. 여의도 증권가에서 역외펀드자금이 시세를 조종하기도 한다.(이정용 기자)
올 들어 국내 주식시장에 외국자본 바람이 더욱 거세다. 외국자본이 주식시장을 쥐락펴락하기 시작한 것은 이미 오래 전 일이다. 외국자본이 많이 들어오면 주식시장에 활기를 불어넣고 기업들이 투자자금을 늘린다는 점에서 아주 반길 일이다. 하지만 단지 시세차익만을 노린 초단기 투기자금이 판을 치거나, 국내 검은돈이 밖으로 빠져나갔다가 다시 들어오는 자금이 늘어날 경우 여러 문제를 야기한다. 이런 외자는 주식시장과 외환시장을 교란시키는가 하면 탈세와 불법 외환밀반출의 도구로 활용된다. 올 들어 2단계 외환시장개방 조처가 시행된 뒤 바로 이런 ‘불량 외자’가 크게 늘었다.

조세회피지역서 날아와 초단기 거래

주식시장을 보면, 외국 각지 조세회피지역에 설립된 ‘역외펀드’(Off-shore Funds)들의 위세가 더욱 커졌다. 역외펀드란 말 그대로 국경을 벗어나 설립되었으면서도 해당지역 거주자를 대상으로 영업이나 투자활동을 하지 않는 펀드이다. 사무실이나 인력도 없이 그냥 서류상으로만 회사를 차려놓고 실질적인 운용 및 통제는 다른 데서 한다. 따라서 각종 감독규제나 자금조달의 제약, 자본이득에 대한 조세부담을 피할 수 있다. 역외펀드가 설립되는 곳은 영업 또는 투자이익에 대한 세금이 전혀 없거나 아주 적은 조세회피지역이다. 중남미의 케이맨군도나 버뮤다, 말레이시아 라부안, 아일랜드의 더블린 등이 대표적인 지역이다. 이들 지역은 세금혜택말고도 유명무실한 감독체계, 철저한 비밀보장 등 여러 가지 유인책으로 ‘역외펀드들의 천국’으로 통한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지난 5월 한달 동안 외국인 주식투자 가운데 8개 조세회피지역 역외펀드의 순매수가 3518억원어치(3075만주)를 기록했다고 한다. 이는 외국인 전체 순매수금액(1조2801억원)의 27.48%에 이르는 수준이다. 외국인 순매수에서 역외펀드가 차지하는 비중은 지난 1월 14.39%에서 4월엔 7.59%였다가 5월에 급증했다. 국내 주식시장이 역외펀드의 비중증가와 함께 달라진 모습은 어떤 것일까? 우선 외국인들의 단타매매 성향이 강해졌다. 지금까지 국내 증시에서 외국인들은 실적이 뒷받침되는 우량주식으로 정석투자를 하고, 한번 투자하면 최소 6개월 이상은 보유하는 건전한 투자세력이라는 이미지가 박혀 있었다. 그렇지만 올 들어서는 이런 이미지를 싹 걷어치웠다. 주로 “역외펀드들의 초단기매매 때문”이라는 게 증권사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이런 단타매매는 주가조작 의혹으로 이어진다. 역외펀드자금 중에는 순수외국인자금뿐 아니라 국내자금이 다시 들어와 ‘외자’로 둔갑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 때문에 주식시장에서는 대부분 역외펀드자금을 ‘검은 머리 외국인’이라고 부른다. 이런 국적불명의 얼굴없는 자금은 사기 외자유치, 시세조종을 통한 주가띄우기의 도구로 활용될 때가 많다. 덩치가 아주 큰 기업이면 몰라도, 자본금 100억원 미만의 기업들은 외국인자금이 조금만 들락날락해도 주가에 곧바로 영향을 끼친다. 특히 올 들어서는 ‘무늬만 벤처’인 일부 코스닥기업과 ‘무늬만 외자’가 결합한 주식불공정거래가 줄을 잇고 있다.

국내에 서류상으로만 3시간 머물러

사진/ 편법 외자유치로 사회적 파문을 일으킨 리타워텍. 이 회사는 자기돈 동원없이 외자유치와 해외투자를 병행했다.(김정효 기자)
가장 큰 파문을 일으킨 사례가 지난 2월 금융감독원이 발표한 리타워텍의 편법 외자유치이다. 인터넷관련 지주회사인 리타워텍은 지난해 7월 13억5천만달러의 외자를 도입해 버뮤다 소재 인터넷솔류션업체인 아시아넷을 인수하겠다고 발표했다. 실제로 13억5천만달러를 들여왔다. 그리고 이 돈은 불과 3시간 만에 아시아넷 인수를 위한 해외투자자금으로 빠져나갔다. 실제적인 자금이동 없이도 외국인투자와 해외직접투자가 동시에 발생한 셈이다.

자본 유출입과정을 단순화해보면 이렇다. 먼저 버뮤다에 그레이하운드라는 서류상의 회사(페이퍼 컴퍼니)를 세워 미국 투자은행인 리만브러더스로부터 13억5천만달러를 대출받았다. 그레이하운드는 이 자금을 아시아넷이 3자 배정방식으로 발행한 신주를 인수하는 데 사용하고, 아시아넷은 이렇게 마련한 자금으로 한국의 리타워텍에 13억5천만달러를 투자했다. 리타워텍은 다시 아시아넷으로부터 받은 자금으로 그레이하운드가 보유한 아시아넷의 주식을 인수했고, 이게 바로 리타워텍의 해외투자이다. 그레이하운드는 리타워텍이 지급한 주식인수대금으로 리만브러더스의 융자금을 갚았다. 결국 13억5천만달러는 아시아넷과 리타워텍의 주식맞교환 수단으로 잠시 활용되었을 뿐 실질적인 자본의 유출입은 전혀 없다. 아시아넷이나 리타워텍 모두 기업가치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국내 일반투자자들에게는 리타워텍이 ‘엄청난 외자가 눈독을 들일 만한 유망기업’이고 ‘엄청난 투자능력을 갖춘 인터넷 지주회사’이기도 했다. 검찰은 지난해 1월 리타워텍이 가스보일러 환풍기 부품을 제조하던 보일러업체 ‘파워텍’을 인수한 뒤 단기간에 주가가 120배 이상 오르는 과정에서 허위공시를 비롯한 여러 가지 주가조작을 한 혐의를 포착하고 지난 2월 관련자들을 처벌했다.

코스닥기업들이 ‘해외에서 외국인들을 상대로 전환사채(CB)나 신주인수권부사채(BW)를 성공적으로 발행했다‘고 발표하더라도, 요즘에는 가짜 외자유치인가 아닌가를 잘 살펴봐야 한다. 해외에서 발행했지만 실제로는 발행기업의 자체자금, 아니면 대주주나 특수관계인이 인수한 경우가 다반사이다.

코스닥등록기업인 비테크놀로지는 지난해 10월 말 유로시장에서 1300만달러의 CB와 700만달러의 BW를 공모로 발행했다. 그런데 1주일 뒤 회사에서 모두 거둬들였다. BW는 채권과 신주인수권을 분리해 채권은 회사쪽이 갖고 신주인수권은 주당 800원씩 쳐서 4억7천만원에 대주주인 장석원 사장에게 매각했다. CB는 100만달러어치를 ㅈ금고에 다시 팔고 나머지는 회사에서 보유중이다. 결국 비테크놀로지가 해외에서 CB와 BW를 발행해 회사에 들어온 외자는 한푼도 없고 대주주만 헐값에 지분을 확대했을 뿐이다.

이런 가짜 외자유치 과정에서도 역외펀드가 개입된다. 주로 홍콩의 금융브로커들이 국내 주식관련채권을 매입하기 위한 역외펀드를 만들어놓고 코스닥기업들에 접근한다. 그러니까 국내 기업들이 발행한 CB나 BW가 이런 역외펀드들을 경유해 국내로 다시 들어오는 것이다. 국내 기업으로서는 ‘외자유치’라는 구색을 갖춰 주가띄우기로 활용할 수 있는데다 대주주가 쉽게 지분을 확대하는 방편이 되기도 한다. 이런 과정을 알선해주는 금융브로커는 보통 발행금액의 1∼3%를 챙긴다. 다만 이런 편법 외자유치에 현혹돼 무턱대고 주식을 따라사는 개미투자자들만 골병들 뿐이다.

재벌들이 우회출자 수단으로 애용

사진/ 조세회피지역에 역외펀드를 설립해 외화도피 수단으로 이용한 최순영 전 대한생명 회장.(곽원섭 기자)
역외펀드를 이용한 가짜 외자유치의 원조는 사실 국내 재벌기업들이다. 재벌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계열사 우회출자나 주가조작, 편법 외화밀반출의 도구로 해외에 설립한 가공회사를 애용해왔다.

역외펀드를 통한 계열사 우회출자는 삼성그룹이 애용해온 수법이다. 삼성은 지난 97년 1월 삼성자동차가 아일랜드의 투자회사 ‘판-퍼시픽(PP) 인더스트리얼 인베스트먼트’와 2500억원의 합작계약을 체결했다고 발표했다. 즉 PP가 삼성차의 전망을 밝게 보고 2500억원을 투자한다는 발표였다. 그런데 이 회사는 자본금이 고작 1만2천달러에 불과한 종이회사이고, 실제로는 당시 삼성전자·전관·전기 등 핵심 3개 계열사의 지급보증으로 PP가 외국금융기관들로부터 돈을 빌려 삼성차에 투자한 것으로 나중에 드러났다. 삼성차가 99년 6월 말 법정관리에 들어가 PP가 보유한 삼성차 주식 2500억원어치가 휴짓조각이 되자 결국 이 손실을 삼성 계열사들이 다 떠맡았다.

역외펀드는 온갖 탈법·불법의 온상

대우가 몰락하기 직전인 99년 6월 발표한 서울 힐튼호텔 해외매각건도 외자유치의 허구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당시 대우는 자발적으로 구조조정을 하면서 채권단 지원을 받느냐, 아니면 채권단이 주도하는 워크아웃(기업개선작업)에 들어가느냐를 놓고 정부와 신경전을 벌이고 있었다. 이 즈음 힐튼호텔을 룩셈부르크 투자회사인 제너럴 메디터레니언 홀딩(GMH)에 2억1500만달러에 매각하기로 합의했다고 발표했다. 김우중 회장이 마련한 자구노력의 첫 성과였다. 주식시장에서도 이 힐튼호텔 매각건이 대우 정상화의 가닥이 잡혀가는 신호탄으로 평가돼 (주)대우를 비롯한 대우 상장계열사들의 주가가 일제히 올랐다.

그런데 채권단이 대우로부터 매각합의서를 받아보니 이면계약이 있었다. 일단 GMH가 서울힐튼을 산 다음 몇년 뒤 다시 대우 계열사가 이자까지 쳐서 되사가라고 하는 ‘풋 바이백 옵션’이 들어 있었다. 결국 이 계약은 대우가 서울힐튼을 담보로 돈을 빌리는 것이나 다름없다. GMH는 룩셈부르크의 역외펀드로, 서울 힐튼 경영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고 단지 이 계약을 통해 확실한 투자수익률을 올릴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이 앞섰다.

재벌 계열 금융회사들도 고객돈을 계열사 부당지원에 직접 활용하는 게 곤란하면 역외펀드를 활용한다. 현대건설이나 하이이닉스반도체(옛 현대전자)가 지난 97∼98년에 해외에서 발행한 CB나 BW는 현재 대부분 국내 투신사들이 보유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현대투신의 보유비중이 가장 크다. 당시에는 해외공모를 통해 외자를 끌어들였지만, 사실은 현대 금융계열사들이 형식상 외국계 금융회사 또는 외국소재 종이회사들을 이용해 국내에서 모집한 자금을 외국에서 모집한 것처럼 조작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국내 재벌 계열 금융회사들의 이런 행태는 지난해 2월 금융감독원의 연계특별검사에서 대대적으로 적발돼 주의, 또는 경고조처를 받았다.

그러나 별로 개선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삼성생명은 지난해 말 금융감독원 검사에서도, 카리브해지역 케이맨군도에 설립된 2개 역외펀드를 통해 삼성전자와 전기, SDI 등 3개 계열사의 주식과 채권을 매입한 사실이 드러났다. 재벌 계열 보험사는 계열사 주식 투자한도가 총자산의 3%를 초과할 수 없는데도, 삼성생명은 역외펀드를 통한 우회투자로 감독규정을 어겼다.

역외펀드는 재벌오너의 횡령이나 외화도피를 위한 돈세탁 통로로도 활용된다. 대표적인 사례가 최순영 전 대한생명 회장의 탈세이다. 국세청은 지난 5월 말 대한생명에 대한 세무조사 결과를 발표하면서 “대생이 지난 97년 8월 케이맨군도에 ‘그랜드 밀레니엄펀드’를 설립해 최 전 회장의 지시에 따라 계약자들의 1억달러를 송금한 뒤 8천만달러를 실체를 알 수 없는 회사에 대출해주거나 빼돌렸다”며 최 전 회장을 고발했다. 또 최근 검찰은 제일화재 이동훈(53) 회장이 말레이시아 라부안에 역외펀드 500만달러를 조성해 ‘메트링크’라는 위장회사에 지급하는 형식으로 비자금을 만들어 개인 여행경비와 아들 유학자금 등으로 170만달러(17억원 상당)를 횡령한 사실을 확인하고 이 회장을 불구속기소했다.

이처럼 역외펀드가 온갖 불법·탈법행위의 온상이 되고 있는데도 감시와 처벌체계는 더욱 느슨해지고 있다. 우선 역외펀드를 통한 외환유출입의 정확한 통계조차 없다. 재정경제부와 한국은행, 금융감독원에서 신고를 받고 있지만 금융기관을 제외한 일반기업들은 아예 신고조차 하지 않으며 나중에 주가조작 따위로 적발되지 않는 한 신고의무 위반을 제재할 방법도 없다.

시장자율에 맡겨 옥석 가려낸다?

지난해 조세피난처의 역외펀드에 국내 기업들이 투자한 돈(13억2천만달러)이나, 이들 지역에서 국내로 유입된 외화(21억7천달러, 1∼10월 통계)는 전년도와 견줘 10배 이상 늘었다. 이는 정상적으로 신고한 수치이다. 2단계 외환자유화 조처로 신고대상과 절차가 완화된 점을 감안하면, 올 들어서는 더 늘었다고 봐야 한다. 금융감독원의 백영수 외환감독국장은 “99년 4월부터 금융기관뿐만 아니라 일반기업에 대해서도 역외펀드 투자에 대한 신고제를 도입했지만 지금까지 신고가 들어온 것은 단 한건도 없다”며 “자본이동에 대한 국가간 장벽이 허물어져 선진국들도 역외펀드에 대한 감시·감독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으나 이제 겨우 국제통화기금(IMF)이나 국제결제은행(BIS) 등을 중심으로 공동 대응방안을 논의하고 있는 단계”라고 말했다.

결국 당분간은 역외펀드에 대한 감시도 시장자율에 맡길 수밖에 없다는 얘기이다. 증권사 관계자들은 “요즘 투자자들은 기업이 역외펀드를 굴린다거나 정체가 불분명한 외자가 갑자기 들어오면 위험이 높은 것으로 판단하고 투자를 꺼린다”며 자연스럽게 ‘시장의 자율정화기능’이 생겨날 것으로 보고 있다. 외국자본도 이제는 옥석이 가려지는 것일까?

박순빈 기자 sbpar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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