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 회장 복귀로 삼성은 위기를 극복한 것일까. 5월17일 경기도 화성 삼성전자 반도체 16라인 기공식에 참석한 이건희 회장(왼쪽에서 두 번째). 삼성전자 제공
이런 걸 연타석 홈런에 비유할 수 있을까? 삼성전자가 지난 5월17일 역대 최대라는 26조원의 올해 투자계획을 발표한 뒤, 한국 언론에서는 일제히 “역시 이건희”라는 찬사가 쏟아졌다. 일주일 전에는 이 회장이 사장단회의를 주재하며, 차세대 먹을거리 사업에 2020년까지 23조원을 투자하는 야심찬 계획을 내놓았다. 경제의 불확실성이 여전한 상황에서 삼성의 미래를 내다보고 과감히 결단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은 역시 이건희 회장뿐이라는 ‘오너경영 예찬론’이 언론 매체를 장식했다.
2009년 못한 투자 한꺼번에 하는 셈
하지만 실상을 들여다보면 오너경영 예찬론은 낯간지러운 측면이 있다. 이 회장은 비자금 사건의 책임을 지고 2008년 4월 경영 퇴진을 선언했다. 하지만 그가 지난 2년간 실제 경영에서 손을 뗐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과연 삼성 안에 얼마나 될까? 한 임원은 “그동안 이 회장의 위상이나 영향력은 변한 적이 없다”면서 “형식상 물러나 있던 지난해에도 몇 차례 사장단회의를 직접 주재했다”고 전했다. 결국 이 회장의 경영 복귀로 인해 대규모 투자가 가능했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얘기다. 불황기에 과감한 투자로 기회를 선점하는 경영전략도 새롭지 않다. “글로벌 기업들은 강력한 구조조정과 함께 현 위기를 도약의 적기로 판단해 미래 성장 동력 확보에 전념하고 있다”는 보고서들이 지난해 중반부터 쏟아졌다. 투자액이 최대라는 것도 따져볼 대목이다. 삼성전자의 올해 시설투자액은 18조원으로, 지난해의 2배를 넘는다. 하지만 지난해와 올해 2년간 평균치는 13조원으로, 글로벌 금융위기가 터진 2008년의 14조원에 못 미친다. 결국 2009년에 못한 투자를 올해 한꺼번에 하는 셈이다. 4대 그룹의 한 고위 임원은 “이 회장으로서는 지난해 말 단독 사면을 받고, 경영 퇴진 선언을 번복하고 복귀한 명분을 얻기 위해 대규모 투자계획이라는 이벤트를 진작부터 준비해온 것”이라고 말했다.
이건희 회장은 “삼성의 대표 제품들도 10년 내 모두 사라질 수 있다”는 위기론을 복귀 명분으로 삼았다. 그의 위기론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회장 취임 이후 끊임없이 위기론을 강조해왔다. ‘이건희식 영구위기론’이 삼성을 끊임없이 뛰게 했고, 오늘날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하는 원동력이 된 것은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이제 이 회장의 ‘먹을거리 위기론’도 업그레이드가 필요한 시점이다.
요즘 삼성맨들에게 최대 위기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대부분 애플과 구글의 스마트폰에 밀리고 있는 휴대전화 사업을 꼽는다. 삼성전자의 한 임원은 “모든 것을 혼자 독점해온 지금까지의 폐쇄적이고 독단적인 삼성 체제로는 개방성을 토대로 창의와 혁신에 앞서가는 애플이나 구글과 경쟁하기 힘들다”고 말한다. 국내의 많은 대기업들도 ‘혁신과 창조’를 강조한다. 하지만 우리가 정작 ‘혁신과 창조’를 생각할 때 바로 떠오르는 국내 기업이 하나라도 있을까? 삼성의 한 직원은 “어느 때부터인가 회사 방침의 옳고 그름에 대해서는 아예 생각을 안 하고, 자기와 직접 관련되지 않은 일은 알려고도 하지 않는 풍토가 고착화됐다”면서 “주어진 일만 하는 기계 같은 존재에게는 혼이 없고, 조직의 미래가 없다”고 자조적으로 말했다. 창의와 혁신은 자율성과 개방성이라는 토양에서만 꽃을 피울 수 있다. 폐쇄적이고 경직된 조직문화는 상극이다.
삼성이 사회의 비판에 귀를 막고 외면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도 폐쇄성과 독단의 일면이다. 경제개혁연대 관계자는 “전에는 비판 논평을 내면 삼성에서 찾아와 설명도 하고 이해를 구하기도 했는데, 지금은 아예 소통이 없다”고 말했다. 삼성의 한 임원도 “삼성의 영향력이 비자금 사건 이후 오히려 더 커지면서, 내부적으로 사회 일각의 비판은 무시해버리는 분위기가 더 강해졌다”고 전한다. 사회와의 소통 부재로 위기를 맞은 도요타를 떠올리게 한다.
내부 비판 자유로운 기업문화부터
삼성은 이 회장의 복귀를 계기로 사내외 소통을 위한 노력을 폭넓게 벌이고 있다. 트위터 블로그 등을 적극 활용하고, 사내방송과 인트라넷도 대폭 개편했다. 이 회장의 아들인 이재용 삼성전자 부사장이 이 부분에 많은 관심을 보인다는 얘기도 흘러나온다. 이 회장도 최근 삼성전자 수원공장을 방문해 직원들과 갈비탕으로 점심을 먹으며 스킨십을 강화했다.
하지만 삼성의 소통 노력이 보여주기용이 아니라 진정성이 있으려면 내부 비판이 자유로운 기업문화로 바뀌어야 한다. 삼성 임직원들은 “업무는 합리적인데 상부에 대한 내부 비판은 금기”라는 말을 이구동성으로 한다. 재계 인사들과 기자들의 술자리에서 오가는 얘기가 있다. 한반도에는 두 명의 ’신이라 불리는 사나이’가 있는데, 북한의 김정일과 남한의 이건희가 그 주인공이라는 것이다. 리더가 신격화된 조직은 비판 정신과 거리가 멀다. 비판 정신의 실종은 조직의 윤리성이 취약할 때 흔히 일어난다. 삼성의 한 퇴직 임원은 “삼성은 평직원에게는 높은 윤리성을 요구하지만, 고위 임원에게는 이것이 전혀 적용되지 않는다”며 답답해했다.
이건희 회장을 보좌하며 그룹 컨트롤타워 역할을 하는 구조조정본부는 비자금 사건으로 2008년 4월 해체를 선언했다. 삼성은 지난 2년간 그룹 컨트롤타워가 없어 경영에 어려움이 많았다며, 이 회장의 경영 복귀를 계기로 복원을 추진 중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삼성 임직원에게 이 말을 하면 그냥 웃는다. 그동안 구조본이 간판만 내린 채 계속 활동해왔기 때문이다. 물러났다는 이학수 본부장(부회장)도 상임고문으로 직함만 바꾸고 그룹의 2인자로 여전히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고 있다. 4대 그룹의 한 고위 임원은 “지난 2년간 대한민국 최대의 거짓말은 이건희 회장이 경영에서 물러나고 구조본이 해체됐다는 삼성의 주장”이라면서 “재계가 알고 삼성 출입기자도 모두 아는 사실인데, 언론 중에서 이를 제대로 알린 곳이 단 하나라도 있느냐”고 꼬집었다.
삼성이 2000년대 들어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하는 데 구조본의 역할이 컸던 것은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현 구조본 체제에서는 개방성과 자율성을 살리고 창의성과 비판 정신이 꿈틀대는 조직으로의 전환이 쉽지 않다. 삼성전자의 한 임원은 “애니콜 신화의 주인공인 이기태 전 부회장이 재임시 구조본의 간섭 때문에 자주 갈등을 빚다가 결국 밀려났다”고 말했다. 15년 동안 장수해온 현 구조본 체제는 그동안 편법·불법 경영권 승계와 대선자금·안기부 X파일 사건에서 드러난 불법 로비 의혹, 비자금 사건 등 법적·윤리적 상처가 너무 컸다.
질 위주의 경영? 새 패러다임 필요
이건희 회장은 1993년 신경영 선언을 통해 양 위주에서 질 위주의 경영이라는 새로운 기업 가치를 제시했다. 그것은 삼성이 21세기 글로벌 기업으로 도약하는 데 결정적 원동력이 됐다. 하지만 세계는 변하고 있다. “우리가 무엇 때문에 사업을 하고 있는지 다시 한번 원점으로 돌아가 생각하겠다.” 지난 2월 도요다 아키오 도요타 사장이 대규모 리콜 사태와 관련해 고개를 숙이며 한 말이다. 지금 삼성에 가장 중요한 가치는 무엇일까? 삼성이 뛰어난 실적에도 불구하고 그에 걸맞은 존경과 신뢰를 받지 못하고, 임직원이 1등 기업의 당당한 자부심을 제대로 만끽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세계적 경영학자인 피터 드러커 교수는 “21세기형 기업가 정신은 과거처럼 단순히 이윤 추구만을 했던 차원에서 벗어나 지속 가능성, 사회적 책임 등을 포괄한 새 패러다임을 요구한다”고 강조했다. 삼성도 ‘제품의 질경영’에 머물지 않고, 사회의 존경과 신뢰를 함께 받을 수 있는 ’기업 가치의 질경영’에 새롭게 나서야 한다. 17년 전 “나부터 변해야 한다”고 외쳤던 이건희 회장이 제2의 신경영 선언을 할 때다.
곽정수 기자
jskwak@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