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남동공단에 있는 한 공장의 기계들이 멈춰 있다. 원자재값 상승, 높은 환율 등의 부담을 오롯이 떠안아야 하는 중소기업의 속은 까맣게 타들어간다. 한겨레21 윤운식 기자
이 대목에서 지난해부터 대기업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사상 최대 실적을 거두고 있는 게 묘하게 오버랩된다. 대기업들이 거둔 수조원의 이익 중에서 중소기업에 마땅히 돌아가야 할 몫은 얼마나 될까? 또 그중 일부라도 중소기업을 위해 배려했다면 이런 소동과 고통은 피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지만 현실은 이런 생각을 순진하다고 비웃는다. 최근 대법원 판결에서 유죄가 확정된 삼성전자의 불공정 하도급 거래행위는 상징적이다. 삼성전자는 2003년부터 2005년 5월까지 2년 반 동안 15조2400억원어치의 부품을 구매하면서 14.7%인 2조2300억원의 하도급 대금을 깎았다. 인하 방식도 교묘하다. 서류상으로는 납품업체와 협의를 한 것처럼 꾸며놨지만 실제로는 목표를 정해놓고 일방적으로 하달했다. 협력업체로서는 단가 인하에 협조하지 않거나 인하율이 낮으면 다음해 구매물량이 최대 15%나 줄어드니 울며 겨자 먹기로 응할 수밖에 없었다. 거래 끊을 각오로 정부에 도움 청하라? 이번에 원자재 가격의 납품단가 반영을 요구한 업종의 경우 이익률이 낮으면 1~2%에 그치고 높아도 3~4%를 넘지 못한다고 한다. 물가상승률을 감안하면 은행 정기예금 금리에 미달하고, 실제 적자 상태인 기업도 많다. 한국주물공업협동조합의 허만형 전무는 “대기업처럼 10%를 넘는 이익률은 아니어도 인상된 인건비와 전기료는 감당이 돼야 적자를 면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말한다. 한때 대기업들이 상생경영을 강조하며 앞다퉈 내놓던 지원대책이 무색할 지경이다. 정부는 중소기업이 원자재값 상승으로 단가 인상 요인이 있으면 대기업에 협의를 요청하는 ‘납품단가 조정협의 의무제’를 지난해 4월 도입했다. 만약 대기업이 요청을 외면하거나 합의에 실패하면 하도급분쟁조정협의회에 조정을 신청할 수 있다. 하지만 지난 1년 동안 신청은 단 한 건도 없었다. 기계를 멈출 정도로 심각한 현실과는 모순되지만, 해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한국단조공업협동조합의 박 전무는 “중소기업으로서는 대기업과 거래를 안 할 각오가 없는 한 조정신청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털어놨다. 이런 문제는 제도 도입 과정에서도 이미 제기됐다. 중소기업들은 대신 원자재 가격이 오르면 납품단가에 자동 반영해주는 ‘납품단가 연동제’를 주장했다. 하지만 대기업들은 가격 결정을 법으로 규정하는 것은 시장경제 원리에 위배된다며 반대했다. 정부는 결국 대기업 손을 들어줬고, 1년밖에 안 돼 납품단가 조정협의 의무제는 사실상 뇌사 판정을 받았다. “주물·주조·금형 산업은 제조업 경쟁력의 핵심인 국가 기반산업입니다. 기술력과 생산성을 높이는 획기적 결과를 가져오면 관련 중소기업이 발전하는 좋은 기회를 잡을 수 있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이 지난 5월6일 비상경제대책회의를 주재하면서 강조한 말이다. 대통령이 실정을 모르고 이런 얘기를 했다면 ‘경제 대통령’ 자격이 없는 것이고, 알고도 그랬다면 일종의 사기다. 중소기업조합의 한 임원은 “납품단가가 공정하고 적정 이윤이 보장돼야 기술개발도 하고, 좋은 인력도 뽑고, 경쟁력도 높이지 않겠느냐”면서 “대통령의 말을 들으니 더 갑갑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마치 중소기업이 무능하고 노력을 하지 않아서 경쟁력이 떨어지는 것처럼 호도한다는 것이다. 말로만 ‘중소기업 사랑’하는 정부 잘못된 진단에서 올바른 대책이 나올 리 없다. 중소기업을 살리기 위한 진정한 해법은 현 정부가 요즘 강조하는 금융·세제 지원이 아니라 공정한 시장질서를 정착시켜 대·중소기업이 공생할 수 있는 기업 생태계를 만드는 것이다. 일본 중소기업이 발전한 것은 대·중소기업 간 하도급 거래가 우리와 달리 상생관계를 이루기 때문이다.

곽정수 대기업전문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