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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상처만 남긴 '김종인 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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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0-08-16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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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개혁 적임자로 꼽혔지만 끝내 탈락… 입각을 막은 ‘비토세력’은 누구였나

(사진/누가 이 사람의 행로를 막았는가.재벌들의 총력저지로 입각이 좌절된 것으로 알려진 김종인 전 청와대경제수석)
“종합주가지수 34포인트 하락, 700선 붕괴.”

지난 8월7일 발표된 김대중 정부 2기 내각의 명단 옆에 신문들은 이날 개각에 대한 증권시장 반응을 이렇게 실었다. 이날의 주가 폭락은 개각의 핵심이라 할 새 경제팀이 재벌을 다루기에는 너무 안정 지향적인 인물들로 구성된 것 아니냐, 현대사태가 또다시 미봉책으로 얼버무려지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시장에 퍼지면서 촉발됐다.

주가는 개각 다음날인 8일 진념 재경부장관과 이근영 신임 금감위원장 내정자가 “현대문제는 정부가 직접 나서지 않고 채권단에 맡긴다”고 발언하면서, 다시 한번 주저앉았다. 새 경제팀에 대한 시장의 반응은 실망에서 우려로 바뀌어가고 있었다.


6공 시절 재벌체제 수술에 나서기도

더욱 놀라운 일은 그 다음날 벌어졌다. 대통령이 현대문제에 소극적으로 나서는 새 경제팀을 질책하며 현대문제 해결을 서두르라고 지시했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주가지수가 삽시간에 40포인트나 반등했다. 새 경제팀에 대한 시장의 반응은 처음부터 그렇게 싸늘했다.

이헌재-이용근-이기호 경제팀이 금융불안을 제대로 해소하지 못한다며 비판적인 논조를 취해오던 언론들은 새로 영입된 인물보다 오히려 떠나는 인물들에 대한 기사를 더욱 돋보이게 실었다.

금융감독위원회의 한 관계자는 이런 여론의 흐름을 ‘김종인 신드롬’으로 해석했다. 경제팀 총수 자리를 놓고 대통령이 막판까지 고심했던 인물은 진념 기획예산처장관과 노태우 정권 시절 청와대 경제수석을 지낸 김종인씨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런데 사람들은 개각이 끝난 뒤 “대통령이 김종인씨를 발탁했다면 시장에 정반대 현상이 일어났을 것”이라고 막연히 믿는다는 것이다.

김병로 초대 대법원장의 손자로, 노태우 정부 시절 보사부장관과 경제수석을 지낸 김종인씨는 일찍부터 재벌개혁을 주창하고 이를 실행에 옮기기 위해 나섰던 사람으로 유명하다. 그가 6공화국 시절에 재벌의 업종전문화와 상속세 강화를 통해 재벌체제 수술에 나섰다는 것을 기억하는 학계나 시민단체에서는 재벌개혁의 확실한 마무리를 위해서는 지금 그런 인물이 필요하다고 그의 경제총수 임명을 적극 주창했다.

서울대 정운찬 교수는 정권 초기 한국은행 총재직을 제의받고 이를 고사한 뒤 “김종인 박사를 경제팀에 쓴다면 고려해볼 문제였다”고 말했다. 정 교수는 이번 개각 과정에서도 제의받은 금융감독위원장직을 고사하면서 “김종인씨를 경제팀장으로 쓰고 그와 협의해 인선을 하라”고 청와대에 적극 권유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김씨는 김영삼 정부가 들어서자마자 이른바 ‘동화은행 비자금 사건’으로 구속된 전력이 있다. 그러나 그의 지지자들은 “YS가 대통령 후보가 되는 것을 적극적으로 반대했기 때문에 훗날 표적으로 탄압을 받은 것일 뿐, 그는 돈 문제는 깨끗하다”고 강조한다.

노동계도 김씨에 대해서는 호의적인 눈길을 보내고 있다. 민주노동당 권영길 대표는 개각 전 한 사석에서 “민주노동당에 도움이 안 될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지금은 나라를 위해 ‘김박’(김종인 박사)이 필요한 시기”라고 말했다. 그런 만큼 그는 김대중 정부에 ‘범개혁’ 세력의 폭넓은 지지를 안겨줄 수 있는 확실한 카드였다.

김영삼 정부 이후 7년 넘게 야인으로 지냈다는 점도 그의 장점 가운데 하나였다. 이헌재 전 재경부 장관의 경우도 오랜 야인생활을 하면서 재계나 관가의 인맥으로부터 자유로워 개혁정책을 제대로 펼 수 있었다는 것이다. 청와대 한 수석비서관은 개각 직전 “정말 개혁을 하려면 관료 출신으로는 안 된다. 진 장관도 예외는 아니다. 경제기획원과 재무부 엘리트 관료들은 재벌장학생으로 못 믿게 돼 있다. 따라서 김종인씨가 재경부 장관이 되는 것이 설득력이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개각 결과 김씨는 이번에도 탈락한 것으로 나타났다. 청와대 안에서도 김종인씨에 대한 적극적 추천자들이 많았고, 대통령도 막판까지 김종인 카드를 고려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런데 대통령은 여론의 비판을 감수하면서 왜 김종인 카드를 버렸을까?

재벌의 저지 움직임… 지지자에 편지 압력도

(사진/재벌개혁은 물 건너 갔는가. 진념 재경부 장관을 수장으로 한 개 경제팀은 너무 안정지향적인 인물들이라는 평이다)
청와대 관계자들에 따르면, 청와대가 김종인씨를 새 경제팀의 수장으로 구체적으로 고려하기 시작한 것은 지난 5월부터다. 한광옥 비서실장이 지난 5월 말 직접 김종인, 정운찬씨를 잇따라 접촉했다. 한 실장은 당시 김종인씨에게 입각 제의가 있을 경우 거절하지 말아달라는 요청을 한 것으로 전해졌다. 김종인씨와 친분이 두터운 한 인사는 “김 박사는 이 자리에서 입각 요청을 하려면 1∼2시간 전에 통보하지 말고 사전에 충분히 협의를 해달라고 요청했다”고 전했다. 또 “정운찬 교수의 경우 한은 총재라면 몰라도 금감위원장으로는 적합하지 않다는 의견을 밝힌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청와대쪽은 그뒤 김종인씨와 계속 접촉하면서 새 경제팀의 구성을 놓고 깊은 협의를 해왔던 것으로 전해졌다. 지난 7월10일 김씨가 환갑을 맞아 지인들과 조촐하게 연 잔치에 참석했던 한 인사는 “김 박사는 당시 구체적인 언질을 받고 준비에 들어간 것으로 보였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뒤 김종인씨에 대한 ‘비토’ 세력의 공격이 더욱 거세지기 시작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특히 재벌들이 모든 라인을 동원해 김씨의 입각 저지를 위해 나섰다는 것이었다.

김종인씨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이 무렵 금감위원장이나 경제수석으로 거론되던 정운찬 교수에게 ‘이상한 편지’가 전달된 것이 결코 우연은 아니라고 말한다.

정 교수의 한 동료인사에 따르면, 지난 7월18일 서울대 정 교수의 방에 문틈을 통해 한장의 편지가 들어왔다. 서울대 마크가 찍힌 편지지에 손으로 또박또박 쓴 이 편지에는 정 교수에게 학문적인 일 외에는 나서지 말라고 ‘협박 반 권고 반’으로 요구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편지는 “나뿐 아니라 사직동팀이나 야당, 청와대 관계자들도 이미 오래 전부터 정 교수의 강의실에 촉각을 곤두세워왔다”며 “정 교수가 강의실에서 얘기한 것과 달리 부나 권력, 명예에 관심이 있다면 지금은 절호의 기회다. 그러나 그말이 순수한 학자의 충정에서 나온 것이라면 학문적 저술활동을 제외한 방송출연, 신문기고 등도 이제 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쓰고 있다. 또 “교수님은 이미 태풍 중심축에 들어와 있다. 태풍이 사그라든 뒤(DJ 임기가 끝난 뒤)에는 (의견을) 발표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덧붙이고 끝에 “DJ는 이미 정 교수의 자택, 연구실까지 도청에 들어갔을 가능성이 높다”고 썼다. 정중한 표현을 쓰기는 했지만, 나서지 말라는 은근한 협박이 담겨 있었던 것이다.

누가 그런 편지를 보낸 것일까? 정 교수는 편지를 받은 사실을 시인하면서도, 이 편지를 누가 썼을 것이라고 보느냐는 질문에는 “서울대 주변에는 별의별 사람이 다 있다”는 말로 대답을 비켜갔다. 그러나 그의 주변 인사들은 ‘김종인-정운찬’을 위축시키기 위해 반대세력들이 ‘심리전’까지 편 것 아니냐고 의심한다. 7월 말 김종인씨와 정운찬 교수를 함께 만났던 한 인사는 “헤어질 때 김 박사가 먼저 자리를 털고 일어났는데 정 교수가 재빨리 일어나 멀리 골목에 세워둔 김 박사 차까지 뒤쫓아갔다”며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몰라 그랬다고 하더라”라고 전했다.

적극적인 반대운동이 인다는 소문과 함께 청와대의 기류에도 변화가 생겼다. 그러나 어떤 형태로든 김종인씨를 기용한다는 데는 변함이 없었다. 진념 재경부장관, 김종인 경제수석을 함께 쓰는 방안도 흘러나왔다. 그러나 개각 직전이 되자, 상황은 달라졌다.

청와대 인사는 개각 전날 ‘개혁’ 대신 ‘국가경쟁력강화’를 위한 경제팀을 구성할 것임을 밝혔으며, 내각은 팀워크를 중시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는 재경장관에 진념씨를 앉혀 후배 관료들을 통솔하겠다는 선언이나 다름없었다. 신문들은 일제히 ‘재경장관 진념 유력’으로 보도했다.

‘김종인 신드롬’은 사그라들 것인가

청와대 한 관계자는 이런 결과가 나온 것에 대해 “6공 때 김종인씨가 경제수석을 했을 때 재계에서 일제히 반대해 재벌개혁을 못한 일이 있다”고 말했다. 김씨에 대한 재벌들의 반대운동이 만만치 않았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금융시장에서는 김종인씨에 대한 반대세력으로 몇몇 재벌의 이름이 구체적으로 나돌기도 했다.

새 경제팀이 현대사태를 제대로 수습한다면 ‘김종인 신드롬’은 곧 사그라들 것이다. 그러나 이번 개각을 통해 김대중 정부가 개혁세력과의 확실한 거리두기에 들어간 것 아니냐는 인식이 퍼지고 있는 것은 주목되는 대목이다. 참여연대의 한 간부는 “노동계에 이어 개혁세력 전체에 대해 김대중 정부가 등을 돌리고 있다”며 “만약 현 정부가 현대사태 처리에서 실기를 할 경우 예상밖의 문제도 생길 수 있다”고 우려했다.

정남구 기자/ 한겨레 경제부jej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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