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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불량 털어도 신용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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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1-06-07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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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전과기록에 발목잡힌 사면자들… 연체금 상환해도 재기의 기회 가로막혀

사진/ 신용불량기록이 지워져도 금융거래의 불이익은 지속된다. 금융기관은 자체 보유한 기록을 적용해 고객의 신용을 평가한다.(박승화 기자)
지난 4월20일 정부와 여당은 신용불량자들의 귀가 번쩍 뜨이는 내용을 발표했다. 서민금융보호대책의 하나로 5월 말까지 연체금을 모두 갚을 경우 신용불량기록을 삭제해준다는 이른바 신용사면조처였다. 연체금을 모두 갚고도 신용불량기록 탓에 정상적인 금융거래를 할 수 없었던 ‘신용전과자’들에겐 가뭄 끝의 단비 같은 반가운 소식이었다.

연체금 받아내기 위한 흉계였단 말인가

현행 규정(신용정보관리 규약)에는 신용불량기록 보존기간이 명시돼 있어 연체금을 모두 상환했더라도 연체기간 및 액수에 따라 1∼3년간은 ‘신용불량자’라는 낙인이 그대로 남아 있게 된다. 이 때문에 연체금을 모두 갚고도 오랫동안 각종 금융거래에서 불이익을 받을 수밖에 없다.


정부와 여당이 마련한 대책에 따라 은행연합회는 지난 4월30일 일과시간 뒤 신용정보공동 전산망의 가동을 일시적으로 중단하고, 연체금을 모두 갚은 108만명의 신용불량기록을 완전 삭제했다.

그로부터 한달이 지난 지금, 이번 조처에 대해 환호성을 질러야 마땅할 듯한 신용불량자들로부터 되레 갖가지 불만과 비난이 터져나오고 있다. 이는 신용사면조처 초기부터 간간이 제기돼왔는데, 한달을 훨씬 넘긴 지금도 줄어들 낌새가 보이지 않는다. 실효성 없는 조처라는 비판은 그나마 점잖은 편이며, 연체금을 받아내기 위해 정부·여당과 금융기관들이 ‘흉계’를 꾸몄다는 막말까지 나오는 험악한 분위기이다. 은행연합회 은행이용상담실에는 요즘도 신용사면조처와 관련한 민원성 문의전화가 하루 150∼200통씩 이어져 상담직원들을 녹초로 만들고 있다.

이병권씨의 사례. 정부와 여당의 서민금융보호대책이 나온 뒤 몇 군데 거래은행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연체된 금액을 완전히 갚으면 신용불량 해제는 물론이고, 예전의 신용상태로 회복시켜준다는 내용이었다. 이씨는 급전을 꿔 지난 4월30일 연체금을 모두 상환했다. 며칠 뒤 기대감에 젖어 은행창구를 찾은 이씨는 기가막힌 일을 당했다. 신용카드를 발급받을 수 있는지 알아보려고 은행에 갔더니, 예전에 연체된 사실이 있어 안 된다는 것이었다. 신용사면조처에 대해 요란하게 떠들던 신문, 방송의 내용과 너무도 다른 현실에 어이가 없었지만, 머쓱하게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신용사면조처가 나오기 전 이미 연체금을 갚은 신용불량자들도 허탈하고 씁쓸하기는 마찬가지. 황승택씨가 그런 경우이다. 황씨는 한순간의 실수로 신용불량자로 등재돼 지난 4년간 정상적인 금융거래를 할 수 없었다. 연체금을 일찌감치 다 갚은 황씨는 인터넷신용정보 사이트에서 올 8월2일에 불량자 리스트(명단)에서 해제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던 중 언론을 통해 연체금을 모두 상환한 신용불량자들에 대해 5월1일자로 기록삭제 혜택을 준다는 얘기를 들었다. 곧바로 거래은행으로 달려간 황씨는 비씨카드 발급을 신청했지만, 보기좋게 거절당하고 말았다. 은행관계자는 “기록(신용불량자)은 정상적으로 삭제됐지만, 은행이 독자적으로 관리해온 고객의 신용정보로 보아 카드발급이 어렵다”는 것이었다. 이 관계자는 “저희 은행에서 관리하는 고객의 기록은 삭제되지 않고 계속 남기 때문에 앞으로도 (저희 은행과는) 금융거래를 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덧붙였다.

은행연합회 홈페이지(www.kfb.or.kr) 게시판은 이씨, 황씨 같은 이들의 사연으로 홍수를 이루고 있다.

왜 일이 이 지경으로 꼬였을까. 신용불량자는 금융시장의 질서를 어긴 죄가 있으므로 그 정도 불편을 겪는 건 당연하다고 가볍게 넘겨버려야 할까.

정부와 여당이 마련한 신용사면조처는 애초부터 여러 면에서 무리가 있는 방안이란 비판이 많았다. 은행연합회 공동전산망에서 기록이 없어지더라도 개별 금융기관의 정보망에 그대로 남아 실효성이 없다는 점이 우선 거론됐다. 이보다 더욱 중대한 점은 기록삭제조처가 신용사회로 가는 길과 거꾸로 방향이 잡혀, 신용질서를 근본부터 흔들 소지가 다분하다는 것이었다.

금융기관이 보유한 불량기록 적용

사진/ 한번 불량이면 영원한 불량? 신용불량자들은 연체금을 모두 갚아도 신용카드를 발급받기 힘들다.(이혜정 기자)
사실, 신용불량자 정보가 생산·유통되는 체계를 조금만 들여다보면 이번 사면조처가 실효성이 없을 것이란 점은 쉽게 예측할 수 있다.

금융기관 대출금이나 신용카드 대금을 3개월 이상 갚지 않을 경우 신용불량자로 등재되며 이런 정보는 은행연합회 공동전산망에 매일매일 집중돼 관리된다. 은행을 비롯한 각 금융기관들은 공동전산망에 접속, 언제든지 이를 조회할 수 있다. 이를 위해 각 금융기관들은 은행연합회에서 ‘마스터’라고 하는 기초자료(개인대출정보, 신용불량정보, 금융거래정보, 기업여신정보)를 구입, 자신들의 전산망에 깔아둬야 한다. 마스터에 들어 있는 자료 가운데 신용불량정보는 파일(문서)전송 방식에 따라 하루 단위로 업데이트(개선)된다. 이와 별도로 일부 신용정보업자는 주1회 단위로 마그네틱 테이프에 담은 신용불량정보를 사들여 자체적으로 축적·관리하고 있다.

여기서 문제의 신용사면조처로 돌아가보자. 신용사면조처를 통해 연합회 전산망에서 신용불량기록을 삭제한 경우 단순조회를 통해선 신용불량전과를 알아볼 수 없다. 문제는 각 금융기관들이 금융거래(대출, 카드발급)를 재개할 때 공동전산망을 단순조회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는 데 있다. 개별 금융기관들이 자체적으로 확보하고 있는 거래정보나 백업(저장)시켜놓은 과거의 기록이 활용된다. 연합회 호스트(주전산기)에서 기록이 없어졌다고 해서 모든 자료가 없어지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또 카드사들의 경우 연체정보를 서로 교환하기 때문에 신용불량자기록 삭제 뒤에도 고객의 신용상태를 대부분 파악하고 있다. 사실, 이처럼 개별 금융기관들이 신용정보를 축적·관리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며 신용위주의 금융관행을 정착시키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대목이기도 하다.

신용불량기록 삭제조처가 일선 금융기관 창구에서 제대로 이행되지 않는다는 비난이 터져나오자, 금융감독원이 팔을 걷고 나섰다. 신용카드회사, 신용평가회사, 여신전문회사를 대상으로 신용불량기록 삭제 여부에 대한 점검을 벌여 과태료 부과, 관련자 문책 등 강도높은 제재를 가한다며 엄포를 놓은 것이다. 금감원은 실제로 정보기술(IT) 검사국 요원들을 대거 투입, 현장점검을 벌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이는 시늉뿐이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는 게 금감원 안에서조차 냉소적인 분위기기 팽배해 있었다는 점이다.

금감원 관계자는 “현실성 없는 정책을 당(민주당)에서 결정해 정부나 금감원, 금융기관들과 협의 한번 없이 밀어붙여 말썽만 빚고 있다”고 비난했다. 이 관계자는 “잘못은 실효성 없는 사면조처를 내놓은 정부와 민주당에 있는 것이지, 금융기관들 잘못이 아니다”고 덧붙였다. 이런 실정에서 불량기록 삭제 여부를 둘러싼 현장점검은 형식적인 수준에 그칠 수밖에 없었다.

정부와 민주당은 물론, 좋은 의도에서 신용사면조처를 내놓았다. 국제통화기금(IMF) 사태 뒤 뜻하지 않게 유탄을 맞아 신용불량자로 등재된 이들을 구제해 정상적인 생활이 가능케 하자는. 문제는 ‘좋은 의도’가 늘 ‘좋은 정책’으로 이어지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더욱이 표를 의식한 인기성 정책이란 성격이 짙다.

이번 신용사면조처를 통해 연합회에서 집계하는 신용불량자 수는 100만명 이상 줄었지만, 이들이 겪는 불편은 전혀 줄지 않았다. 대신, 금융기관들 처지에서 볼 때는 신용자산의 하나인 신용불량기록만 훼손됐을 뿐이다. 우량실적, 불량기록 등 신용정보가 쌓이고 축적돼야 담보가 아닌 신용에 따라 금융거래가 이뤄지는 바탕이 마련된다. 이런 점에서 이번의 신용사면조처는 득은 없고, 실만 도드라져 보인다.

불량자 숫자놀음에 분통터진다

노영기 중앙대 교수(경제학)는 “선의의 피해자를 줄이기 위한 것(신용사면조처)이라고 하더라도 공론화해 합의하는 방식을 거쳐야지 정부와 여당에서 일방적으로 결정해 밀어붙일 경우 후유증만 낳을 뿐”이라고 말했다.

여러 차례 지적됐듯이 신용불량자문제의 핵심은 불량자의 숫자가 아니라 금융기관들이 신용기록을 이용하는 방식에 있다. 신용불량기록 그 자체로 거래가 불가능한 현실을 개선, 보증을 세우거나 일정 조건의 거래로 신용을 쌓아 ‘재기’할 수 있는 길을 터주는 데서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불량자 숫자를 줄여 유권자의 표를 끌어들이려는 계산은 결국 ‘정치적으로도’ 잃는 게임이 된다는 걸 보여주고 있다.

신용불량자 등록기준
구분
현행
7월1일부터
대출금3개월 이상 연체시동일
신용카드5만원 이상
3개월 이상 연체시
동일
상환시
즉시 삭제
카드 100만원
대출금 500만원 이하
카드 200만원
대출금 1천만원 이하
소액신용
불량자 관리
3개월 이후
불량자로 등록
6개월 이후
불량자로 등록
기록 보존
기간
신용불량 등록 뒤 3개월 이내
상환시 : 즉시 삭제

신용불량 등록 뒤 6개월 이내
상환시 : 1년 동안 관리

신용불량 등록 뒤 1년 이내
상환시 : 2년 동안 관리

신용불량 등록 뒤 1년 초과
상환시 : 3년 동안 관리
신용불량 등록 뒤 1년 이내
상환시 : 1년 동안 관리

신용불량 등록 뒤 1년 초과
상환시 : 2년 동안 관리

김영배 기자 kimy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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