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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알짜 CEO’ 모두 모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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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1-05-29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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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경영자 문화 일구려는 CEO포럼… 기업 총수 머슴 노릇은 이제 그만

사진/ CEO포럼은 바람직한 CEO 모델 정립을 목표로 삼았다. 지난 5월22일 포럼 발기인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이제 일반인들도 친숙하게 느낄 정도로 널리 쓰이고 있는 경영용어 가운데 하나가 ‘CEO’이다. ‘Chief Executive Officer’의 머리글자를 모은 것으로, 기업의 최고책임자(경영자)를 일컫는다. 바깥으로는 기업을 대표하며 안으로는 주주들의 위임을 받아 이사회의 결의를 집행하고 회사 업무에 관한 최고 의사결정을 내리는 막중한 자리이다.

이런 사전적 의미에 맞게 온전하게 제구실을 하고 있는 CEO가 국내에 얼마나 있을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한국을 대표하는 재벌그룹으로 눈길을 돌려보면 대단히 회의적이다. 재벌 총수를 위해 대신 감방에 가고, 2세와 3세로의 경영권 세습을 앞장서 옹호하는 등 재벌 일가를 위해 ‘몸을 던지는’ 충신(?)들이 한국 CEO의 주류를 이룬다. 정태수 전 한보그룹 회장이 말한 ‘머슴’이 바로 ‘한국적 CEO’의 전형적 이미지였다.

대표적 전문경영인·학계인사 등 참여


재벌 총수 한 사람을 향한 불타는 충성심 앞에 주주, 고객, 임직원 등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을 염두에 둔 경영은 늘 뒷전일 수밖에 없다. CEO의 이런 행태는 해당 기업의 불행에 머물지 않고, 나라 전체의 경제에 커다란 해악을 끼치기도 했다.

그런데 이런 국내의 암울한 CEO문화를 바꿔보자는 ‘조용한 반란’이 시작됐다. 국내 대표적인 전문경영인과 학계인사들이 전문경영인체제 정착과 독립적인 정책대안 제시를 깃발로 내건 대규모 모임 창립에 나선 것이다.

윤병철 우리금융지주회사 회장, 강석진 제너럴일렉트릭(GE) 코리아 사장, 정광선 중앙대 교수(이상 공동대표) 등 전문경영인과 학계인사 70여명이 지난 5월22일 오후 서울 삼성동 인터콘티넨탈호텔에서 ‘한국CEO포럼’ 창립을 위한 발기인대회를 열었다. 이들은 창립 취지문에서 “경영자가 먼저 기업의 혁신을 주도할 때 근로자를 포함한 모든 경제 주체들의 진정한 변화를 기대할 수 있다”며 “경영인들이 지난날의 불합리한 관행을 먼저 겸허하게 반성하면서 혁신을 주도하고 새로운 경영문화를 정착시켜 나가야 할 시점”이라고 강조했다. 한국CEO포럼은 오는 6월20일 정식으로 창립식을 열 계획이다.

CEO포럼 발족을 지켜보면서 드는 의문은 기존의 경제단체나 경영인 모임과 다른 점이 무엇일까 하는 점이다. 이미 결성돼 활동중인 경영자 모임과 별반 다를 게 없다면 ‘그들만의 잔치’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각종 모임에 숫자 하나를 더 보태는 데 불과하다.

CEO포럼의 공동대표를 맡고 있는 정광선 교수는 “기존의 경제단체뿐 아니라 시민단체와도 분명히 구별된다”고 못박았다. 정 교수는 전경련이나 경총 같은 ‘이익단체’가 아니며 바람직한 CEO 모델 정립을 목표로 삼고 있다고 말했다. 또 회원들의 친목을 다지는 정도에 머물고 있는 각종 경영자 모임과 달리 주요한 경제현안에 대한 의견을 적극적으로 낼 것이라고 덧붙였다.

준비모임 단계부터 열성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최영상 프라이스워터하우스쿠퍼스(PWC)코리아 사장도 “여러 경영자 모임이 있지만, 단순히 이슈별 지식을 공유하고 안면을 익히는 정도에 머물고 있다”며 “CEO포럼은 이런 수준을 벗어나 경영인의 사회적 역할과 책임에 대해 토론하고 ‘롤 모델’을 만드는 데 주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기업 관련제도 및 관행을 바꾸기 위해 독립적인 정책대안을 제시하고 모범적인 투명경영을 실천함으로써 전문경영인의 위상을 정립한다는 것이다.

CEO포럼의 싹은 지난해 5월로 거슬러올라간다. 가톨릭대 곽만순 교수가 중앙대 정광선 교수를 만나 전문경영인들의 모임이 필요하지 않겠느냐며 운을 뗀 게 출발이었다고 한다. 두 사람 모두 기업지배구조개선 및 투명경영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던 터여서 의기투합하는 데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곽만순 교수는 “첫 출발만 그랬을 뿐 이미 넓게 공감대가 형성돼 있는 사안이이서 뜻을 같이하는 이들을 모으는 게 어렵지 않았다”고 전했다. 발의만 자신이 했을 뿐 정작 발로 뛰고 모임의 내실을 다진 이들은 따로 있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경영인의 ‘롤 모델’ 만들어 투명경영

사진/ 이제는 기업 최고경영자가 달라져야 한다. CEO포럼의 공동대표를 맡고 있는 정광선 중앙대 교수, 윤병철 우리금융지주회사 회장, 강석진 GE코리아 사장(맨 왼쪽부터).
어찌됐건 이번 모임의 싹을 틔운 이는 곽 교수인 셈인데, 그의 경력을 거슬러올라가다 보면 다소 뜻밖의 사실을 만나게 된다. 곽 교수는 지난 81년 설립한 한국경제연구원(이하 한경연) 창립멤버이다. 97년 가톨릭대로 떠날 때까지 16년 동안 이 연구원에 몸담았다. 한경연은 재벌 총수들의 모임인 전경련 산하 연구원, 그러니까 재벌의 ‘싱크 탱크’인 셈이다.

“한경연 재직 때 주로 재벌정책을 담당했습니다. 창립멤버로서 연구원에 오래 몸을 담았기 때문에 회장단과 말상대가 되기도 했지요. 작고한 최종현 전 SK그룹 회장이 전경련 회장을 맡고 있을 때 회장단과 자리를 같이할 기회만 있으면 ‘가신그룹이 아닌 전문경영인을 데려다 써야 한다’고 조언했지만 좀처럼 받아들여지지 않더군요.”

곽 교수는 지난 97년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사태가 발생하기 직전 한경연을 떠났다. “이미 경력이 꽉 차 부원장 같은 관리직으로 옮겨 앉아야 할 처지였는데, 그렇게 될 경우 개인 소신은 지켜기 어렵다는 판단을 내렸기 때문”이었다. 마침 가톨릭대에 교수 자리가 나 미련없이 연구원을 떠났다고 한다.

CEO포럼에 참여하고 있는 학계 인사들은 모두 기업지배구조 개선에 관심이 깊을 뿐 아니라, 이 분야에 대한 연구활동도 활발하다. 중앙대 정광선 교수는 국내에서 기업지배구조 개선과 관련한 체계적인 연구보고서를 처음으로 발표한 학자로 정평이 나 있다. 지난 94년 한국금융연구원에서 발간한 ‘기업경쟁력과 지배구조’가 그것이다. 보고서 발간 직후 정 교수는 당시 세계화추진위원회쪽의 요청에 따라 지배구조개선안을 만들기 위한 연구간사로 활동하기도 했다.

“당시엔 지배구조 개선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습니다. 재계의 반발도 심했고. 96년 총선을 거치면서 흐지부지되고 결국 완결짓지 못했지요. 국민의 정부 들어 그때 생각했던 방안들이 대부분 실현된 셈입니다.”

CEO포럼에 뜻있는 인사들을 대거 끌어들여 외연을 넓힌 데 공헌한 이로는 최운열 서강대 교수가 꼽힌다. 최 교수 또한 증권경제연구원장, 초대 코스닥위원장 등을 맡으며 기업지배구조를 개선하는 데 일조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특히 지난 99년 지배구조모범규준제정위원회 자문위원장으로 활동하며 선진화된 지배구조 모델의 산파역을 맡았다. 당시 이 위원회에서 같이 활동했던 강석진 GE코리아 사장, 김승유 하나은행장, 김영무 법무법인 김&장 대표(변호사) 등이 이번 CEO포럼 창립멤버로 들어와 있다. 학계인사 중에는 참여연대 추천으로 SK텔레콤 사외이사로 활동하고 있는 고려대 남상구 교수도 포함돼 있어 눈길을 끈다.

국내기업의 CEO로는 유상부 포항제철 회장, 이상철 한국통신 사장, 김정태 주택은행장, 조왕하 코오롱그룹 부회장, 박종섭 하이닉스반도체(옛 현대전자) 사장, 남승우 풀무원 사장, 김선진 유한양행 사장, 정문술 전 미래산업 회장, 서두칠 한국전기초자 사장, 강찬수 서울증권 회장, 문국현 유한킴벌리 사장, 오상수 새롬기술 사장 등 쟁쟁한 인물들이 포진해 있다. 다국적기업의 한국법인 대표들도 대거 들어왔다. 홍성원 시스코코리아 사장, 신재철 한국IBM 사장, 김손영 한국푸르덴셜보험 사장, 윤문석 한국오라클 사장, 최준근 휴렛팩커드(HP)코리아 사장 등이 이번 모임의 회원으로 가입해 있다.

경영인의 낡은 행태 확실히 바꿀 건가

CEO포럼의 창립 취지문은 이렇게 끝을 맺는다. ‘CEO포럼은 경영인들만의 이익을 옹호하는 또 하나의 편협한 이익집단으로 변모하는 것을 스스로 경계할 것이다. 또 정당의 이념이나 이해에 초월할 것이며 국가경제 전체의 효율성을 위해 균형된 입장을 견지할 것이다.’

정식 창립을 앞둔 CEO포럼은 현재 서울 세종로 광화문빌딩(동화면세점) 9층에 임시 사무실을 두고 있다. 모임의 회원인 한국채권평가 김세진 사장이 사무실 한 귀퉁이를 무료 제공한 것이다. CEO포럼이 오로지 재벌 총수만을 바라보는 ‘해바라기’ 경영인들의 낡은 행태를 개선하는 데 이바지할 수 있을까.

김영배 기자 kimy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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