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선임한 14개 자리 중 12개나 논란… 공기업 경영부실로 국민 피해 우려
지금은 이미 세간의 기억에서 희미해졌지만, 지난 3월 중순께 ‘아주 이상한’ 정부 인사가 있었다. 외부로 공식발표는 되지 않은 가운데, 주택공사 사장을 비롯한 공기업 사장 6명과 감사 1명이 무더기로 해임 통보를 받은 것이었다.
공기업 경영진이 굴비두름처럼 엮여 떼거지로 밀려난 것도 이례적이었을 뿐 아니라 이보다 더욱 눈길을 끈 점은 밀려난 인사들의 면면이었다.
정부 당국자는 당시 인사조처에 대해 “경영혁신 실적이 미진하거나 비리에 연루된 이들을 솎아낸 것”이라며 밀려난 이들에게 ‘주홍글씨’를 꼭꼭 눌러박았다. 그런데 하필이면 밀려난 이들 가운데 1명을 빼고는 전부 전문경영인으로 분류되고 있던 터여서 솔솔 의혹이 일기 시작했다. 여기에 7명 중 절반 이상이 임기가 한달 남짓밖에 남아 있지 않다는 사실이 보태져 의구심을 증폭시켰다.
임기 한달 남겨두고 무더기 해임 통보
임기 한달 가량을 남겨둔 이들을 굳이 실적부진이란 불명예 딱지를 달아 내쫓은 처사도 그러하거니와 전문경영인 출신 위주로 솎아낸 점은, 어렴풋하게나마 무슨 다른 꿍꿍이속이 있는 것 아니냐는 의문을 불러일으키기에 부족하지 않았다. 그로부터 두달가량 지난 지금, 공기업을 둘러싼 낙하산 시비가 가마솥 기름처럼 부글부글 끓고 있다. 세간의 뇌리에서 흐릿해져가던 지난 3월의 인사조처가 결국은, 새로운 낙하산을 내려꽂기 위한 ‘터닦기’ 아니었느냐는 비난까지 가세하고 있다. 여기에 김대중 대통령의 집권후반기로 접어드는 시점이란 사실까지 덧씌워져 ‘정권 말기의 자리 나눠먹기’라는 혹평까지 나오고 있는 형국이다. 정부의 공기업 인사가 얼마나 엉망이었기에 이렇게 바가지로 욕을 먹고 있는 것일까. 그게 아니라면, 정부·여당의 발목을 잡아야 사는 야당쪽의 상투적인 정치공세에 불과한 것인가. 정부는 지난 5월9일 대한주택공사 사장에 권해옥 자민련 부총재를 임명했다. 권 신임사장의 경력을 잠깐 살펴보자. 71년 공화당 합천지구당 위원장을 시작으로 13, 14대 국회의원(민정당·민자당·신한국당)을 지낸 뒤 15대 총선에서 낙선하자 자민련으로 말을 바꿔탔다. 이후 경남 거창지구당 위원장, 경남도지부 위원장, 부총재를 거친 전형적인 정치권 인사다. 눈을 아무리 씻고 봐도 주택분야에 대한 경험은 찾아보기 어렵다. 주택공사 사장 추천위원회가 내걸었던 후보자 자격요건은 6가지. 주택분야에 대한 전문성과 경험, 대규모 조직을 운영해본 경험, 기업구조조정에 대한 강력한 의지, 공공성과 기업성을 조화시킬 수 있는 경력, 미래지향적인 비전, 국가공무원법상 결격사유가 없을 것 등이 그것이다. 권 사장이 겪어온 삶의 궤적과 이 요건이 얼마나 합치될 수 있을까. 같은 날 한국가스안전공사 사장에 임명된 방용석 전 국회의원도 이런 빈축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방 신임사장은 15대 국회의원을 거친 정치인(민주당) 출신으로 해당분야의 전문성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다. 정치적 배려였다는 점을 어렵지 않게 엿볼 수 있다. 문제는 이처럼 아귀가 맞지 않은 ‘사람-자리’의 배합이 주택공사·가스공사만의 특수한 사례가 아니라는 점이다. 주택공사·가스공사 사장 인사에 앞서 정부는 산업자원부 산하 공기업인 한국석유공사 사장에 이수용 전 해군참모총장을, 대한석탄공사 사장에 유승규 전 민주당 의원을 각각 임명했다. 공기업 인사는 으레 그렇다는 듯 현 정부도 과거 정권의 행태를 되풀이하고 있는 것이다. 민주당과 자민련간 정책공조가 부활된 뒤에는 이런 양상이 더욱 극성을 떨고 있다는 주장을 야당의 트집이라고만 돌리기 어려운 대목이다. 지난 4월 이후 새로 선임된 14개 공기업 및 산하기관장에 부사장이 내부승진한 수자원공사와 수출보험공사를 뺀 12개 공기업 사장이 정치권 출신 등 이른바 낙하산 인사로 채워진 사실은 이를 뚜렷하게 보여주고 있다. “집권 여당과 연줄 없으면 넘보지 말라”
한나라당이 최근 내놓은 정책자료 ‘DJ 정권 낙하산 인사 실태’는 약간의 논란 여지를 남기지만, 낙하산 인사 실태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이 자료에 따르면 관변단체인 한국자유총연맹 총재에는 전 민주당 의원인 권정달씨, 보훈복지공단 이사장에는 전 민주당 은평지구당 위원장인 조만진씨, 예금보험공사 전무에는 대통령 처조카인 이형택씨가 각각 재임중이다. 한국전력공사 사장은 전 국민회의 총재특보인 최수병씨, 조폐공사 사장은 전 국민회의 의원인 유인학씨, 한국마사회 회장은 현 민주당 청송·영양·영덕지구당 위원장인 윤영호씨, 한국공항공단 감사는 전 민주당 연수원 부원장인 신극정씨가 각각 맡고 있다. 또 언론재단이사장에는 김용술 전 국민회의 마포갑 지구당위원장, 한국관광공사 사장에는 조홍규 전 민주당 의원, 국민생활체육협의회 회장에는 엄삼탁 전 국민회의 부총재, 국민건강보험공단 이사장에는 박태영 전 국민회의 의원이 똬리를 틀고 있다.
물론, 정치권 인사 가운데는 다른 분야에서 경륜을 쌓은 경우도 있고 정치인 출신이라 하더라도 나름대로 해당 부문에 대한 관심과 지식을 갖고 있는 이들도 있을 터이다. 따라서 정치권과 맺은 크고 작은 인연의 고리만을 문제삼아 도맷금으로 싸잡을 수는 없다는 얘기도 일리는 있다. 그렇지만 민주당·자민련 등 집권 여당과 이런저런 인연으로 얽혀 있는 인사들이 공기업 전반에 드넓게 퍼져 있는 현실에선 그다지 설득력을 얻지 못하고 있다.
정부는 공공부문 개혁차원에서 99년 2월 정부투자기관관리 기본법을 바꿨다. 과거의 잘못된 경영진 임명 관행을 고치기 위한 목적이었다. 개정된 법에 따라 정부투자기업 기관장(사장)은 민간인사들이 참여하는 추천위원회를 통해 민주적이고 투명한 절차에 따라 뽑도록 임명과정이 명시적으로 규정됐다. 따라서 이때부터 새로 임명되는 기관장은 법 개정 취지에 따라 임명됐어야 함에도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공기업 사장추천위원회가 얼마나 엉터리로 운영되는지를 잘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례는 지난해 5월 한국관광공사 사장 후보를 뽑는 과정이다. 당시 사장추천위원회는 이사회의 추천위 구성의결이 있은 다음 날인 5월23일 사장후보를 뽑아 추천하는 초특급 ‘순발력’을 발휘했다. 더욱이 표결결과는 물론 선발방법, 선정기준, 추천과정 등 관련회의 내용은 한줄도 기록되지 않아 몇명의 후보자가 누구에 의해, 어떤 절차로 뽑혔는지 모든 것이 흑막에 가려져 있다. 이처럼 베일 속에서 초스피드로 진행된 관광공사 사장 추천위를 거쳐 사장에 오른 조아무개 사장의 경력은 실소를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13대(평민당), 14대(민주당), 15대(국민회의) 국회의원, 새천년민주당 당무위원…. 그의 이력서 어디에도 관광사업과 관련된 흔적은 한줄도 발견되지 않는다.
이는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이 행정정보공개 청구권을 행사해 밝혀낸 사실로 주택공사, 토지공사, 도로공사 등 나머지 정부투자기관에서도 사정이 별반 다르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거꾸로 가는 개혁, 누가 피해 입나
공기업 낙하산 인사는 정부 및 집권여당에 대한 인기를 떨어뜨리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잘못된 인사가 공기업의 경영부실로 이어지고, 결국에는 공기업의 실질적인 주인인 국민들의 피해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
최고경영자에 대한 임명원칙이 지켜지지 않을 경우 공기업 내부개혁도 물거품이 될 공산이 크며 이는 이미 현실에서 경험한 바이기도 하다. 낙하산 사장들은 내부 반발을 잠재우기 위해 ‘퇴직금 갈라먹기’, ‘편법적인 임금 보전’ 등 개혁과는 거꾸로 간 사례가 적지 않았다. 사정이 이러한데, 낙하산 인사시비를 야당쪽의 정치 공세로만 돌릴 수 있을까.
김영배 기자 kimyb@hani.co.kr

임기 한달 가량을 남겨둔 이들을 굳이 실적부진이란 불명예 딱지를 달아 내쫓은 처사도 그러하거니와 전문경영인 출신 위주로 솎아낸 점은, 어렴풋하게나마 무슨 다른 꿍꿍이속이 있는 것 아니냐는 의문을 불러일으키기에 부족하지 않았다. 그로부터 두달가량 지난 지금, 공기업을 둘러싼 낙하산 시비가 가마솥 기름처럼 부글부글 끓고 있다. 세간의 뇌리에서 흐릿해져가던 지난 3월의 인사조처가 결국은, 새로운 낙하산을 내려꽂기 위한 ‘터닦기’ 아니었느냐는 비난까지 가세하고 있다. 여기에 김대중 대통령의 집권후반기로 접어드는 시점이란 사실까지 덧씌워져 ‘정권 말기의 자리 나눠먹기’라는 혹평까지 나오고 있는 형국이다. 정부의 공기업 인사가 얼마나 엉망이었기에 이렇게 바가지로 욕을 먹고 있는 것일까. 그게 아니라면, 정부·여당의 발목을 잡아야 사는 야당쪽의 상투적인 정치공세에 불과한 것인가. 정부는 지난 5월9일 대한주택공사 사장에 권해옥 자민련 부총재를 임명했다. 권 신임사장의 경력을 잠깐 살펴보자. 71년 공화당 합천지구당 위원장을 시작으로 13, 14대 국회의원(민정당·민자당·신한국당)을 지낸 뒤 15대 총선에서 낙선하자 자민련으로 말을 바꿔탔다. 이후 경남 거창지구당 위원장, 경남도지부 위원장, 부총재를 거친 전형적인 정치권 인사다. 눈을 아무리 씻고 봐도 주택분야에 대한 경험은 찾아보기 어렵다. 주택공사 사장 추천위원회가 내걸었던 후보자 자격요건은 6가지. 주택분야에 대한 전문성과 경험, 대규모 조직을 운영해본 경험, 기업구조조정에 대한 강력한 의지, 공공성과 기업성을 조화시킬 수 있는 경력, 미래지향적인 비전, 국가공무원법상 결격사유가 없을 것 등이 그것이다. 권 사장이 겪어온 삶의 궤적과 이 요건이 얼마나 합치될 수 있을까. 같은 날 한국가스안전공사 사장에 임명된 방용석 전 국회의원도 이런 빈축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방 신임사장은 15대 국회의원을 거친 정치인(민주당) 출신으로 해당분야의 전문성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다. 정치적 배려였다는 점을 어렵지 않게 엿볼 수 있다. 문제는 이처럼 아귀가 맞지 않은 ‘사람-자리’의 배합이 주택공사·가스공사만의 특수한 사례가 아니라는 점이다. 주택공사·가스공사 사장 인사에 앞서 정부는 산업자원부 산하 공기업인 한국석유공사 사장에 이수용 전 해군참모총장을, 대한석탄공사 사장에 유승규 전 민주당 의원을 각각 임명했다. 공기업 인사는 으레 그렇다는 듯 현 정부도 과거 정권의 행태를 되풀이하고 있는 것이다. 민주당과 자민련간 정책공조가 부활된 뒤에는 이런 양상이 더욱 극성을 떨고 있다는 주장을 야당의 트집이라고만 돌리기 어려운 대목이다. 지난 4월 이후 새로 선임된 14개 공기업 및 산하기관장에 부사장이 내부승진한 수자원공사와 수출보험공사를 뺀 12개 공기업 사장이 정치권 출신 등 이른바 낙하산 인사로 채워진 사실은 이를 뚜렷하게 보여주고 있다. “집권 여당과 연줄 없으면 넘보지 말라”

사진/ 개혁은 입으로만 하는가. 개혁추진 점검회의에 참석한 진념 경제부통리와 전윤철 기획예산처장관, 이근영 금감위원장(왼쪽부터)이 대화를 하고 있다.
| 공기업 | 신입사장 | 취임일자 | 전직 |
| 대한주택공사 | 권해옥 | 5월10일 | 13·14대 국회의원 |
| 가스안전공사 | 방용석 | 5월10일 | 15대 국회의원 |
| 수자원공사 | 고석구 | 5월10일 | 수자원공사 부사장 |
| 환경관리공단 | 이석현 | 5월4일 | 14·15대 국회의원 |
| 에너지관리공단 | 정장섭 | 5월3일 | 산자부 무역투자실장 |
| 석유공사 | 이수용 | 5월2일 | 해군참모총장 |
| 산업안전공단 | 문형남 | 4월30일 | 노동부 기획관리실장 |
| 석탄공사 | 유승규 | 4월27일 | 13·14대 국회의원 |
| 근로복지공단 | 김재영 | 4월27일 | 노동부 고용정책실장 |
| 가스기술공업 | 민병군 | 4월21일 | 중소기업청 광주전남청장 |
| 전기안전공사 | 김영대 | 4월21일 | 국방부 원가관리국장 |
| 한국감정원 | 이수일 | 4월9일 | 경찰대학장 |
김영배 기자 kimyb@hani.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