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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주기적 위기설에 취약한 한국의 숙명

유동외채·가용 외환보유고 아킬레스건… 유럽계 채권자금 동향에 주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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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9-03-02 11:43 수정 : 2009-03-06 1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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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가 사이클을 갖고 있으니 경제위기도 순환할 것이고 위기설도 주기적으로 찾아올 법하다. 지난해 ‘9월 위기설’은 음력 9월인 것으로 밝혀졌지만, 이번엔 ‘3월 위기설’이다. ‘6월 위기설’도 이미 대기하고 있다. 그런데 위기설은 왜 3의 배수만 좋아하는 걸까? 4월·10월 위기설은 왜 나오지 않는 걸까? 국채의 발행 주기와 기업의 분기별 결산 때문인 듯하다. 3월 결산을 앞둔 일본 기업들이 한국에서 자금을 일시에 빼내가면 국내 금융시장이 위험해질 것이라는 게 3월 위기설의 출발점이다.

2월26일 경기 과천 정부종합청사 기획재정부에서 재정부 허경욱 1차관(가운데), 금융위원회 권혁세 사무처장(왼쪽), 한국은행 이승일 부총재(오른쪽)가 외화 유동성 공급과 관련해 긴급 브리핑을 하고 있다. 사진/ 연합 진성철

일본발 3월 위기설은 ‘글쎄요’

원-달러 환율은 지난해 말 1259.5원에서 두 달이 채 안 된 올 2월20일 다시 1500선을 뚫었다. 원화 가치의 하락 기울기는 부도 위기에 놓인 동유럽 국가들에 비해서도 가파르다. 한국의 외화 유동성 위기 논란을 쟁점별로 살펴보자.


일본은 3월 결산 법인이 많다. 특히 금융기관은 대부분 3월에 결산한다. 장기 불황과 금융위기로 고전하고 있는 이들은 해외에 투자했던 자금을 회수하려고 할 것이다. 또 금리가 낮은 엔화를 빌려 고금리 국가에 투자했던 ‘엔 캐리 트레이드’가 축소되고 있다. 한국에 투자된 자금도 되돌아갈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국내 금융시장에 들어온 엔 캐리 자금의 규모는 그다지 크지 않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금리가 높은 신흥국에 비해 한국은 그다지 선호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정부는 “국내 엔화 대출이 130억달러에 불과하고 3월에 만기가 도래하는 금액은 20억달러 미만”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김병권 ‘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 연구센터장은 “일본 은행이 한국뿐만 아니라 전세계에 투자했던 자금을 회수하게 되면 유럽과 아시아 은행의 자금난으로 번지고 이것이 다시 한국 금융시장에 미치는 간접적인 영향도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은행이 2월19일 발표한 국내 은행의 올해 외화 차입금 만기 도래 규모는 모두 245억4천만달러다. 월별로 보면, 3월 56억달러를 포함해 2~3월 중 전체의 42%인 104억달러가 몰려 있다. 한국은행은 올 1월 말 기준 외환보유액이 2017억4천만달러임을 감안하면 외화 차입금은 큰 규모가 아니라고 밝히며 위기설과 선을 그었다. 하지만 다음날 환율은 보란듯이 1500원을 넘어섰다. 한국은행 자료에는 한국씨티은행 등 외국계 은행과 외국 은행 국내 지점의 외화 차입금이 빠져 있다. 윤창용 IBK투자증권 연구원은 “외국계 은행의 차입금을 더하면 단기 차입금은 750억달러를 초과하는 것으로 추정되는데, 외국계 은행과 외국 은행 지점의 단기 차입금은 상당 규모가 국내 은행과 (파생상품 거래로) 직접 연관돼 있어 외환시장 불안을 조장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한국은행은 또 단기 외채의 만기 연장 비율인 ‘차환율’이 지난해 4분기 37%에서 올 1월은 86%, 2월(13일까지)은 104%로 크게 상승했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김태동 성균관대 교수는 “만기 9개월짜리를 1개월만 더 연장했다면 실질 차환율은 100%가 아니라 11%(9분의 1)에 불과하다”고 반박하면서 “외채의 단기화에 대한 우려를 해소하려면 연장한 뒤의 만기가 어떻게 됐는지를 밝히라”고 역공했다. <로이터통신>도 2월19일 노무라증권 외환분석가의 말을 인용해 “한국은행이 전제하는 만기 연장 비율은 비현실적이며 단기적으로 달러 부족이 지속될 위험이 상존한다”고 보도했다.

외국인 보유 국내 채권 만기 도래 규모

외국계 은행 차입금 싸고 논란

경상수지 적자와 외국 자본 이탈을 동시에 겪고 있는 우리나라에 외환보유액은 ‘생명보험’이다. 적정 외환보유액 수준은 유동외채(단기외채+만기가 1년 이내 도래하는 장기 외채)를 감당할 수 있는 정도라고 한다. 2008년 말 기준 우리나라의 유동외채는 외환보유액의 96.4%다. 아슬아슬하다. LG경제연구원은 단기 자본 유출액까지 고려하면 우리나라 외환보유액은 적정 수준에 미치지 못할 수 있다고 봤다. 비상식량인 한-미 통화 스와프 300억달러가 든든하다고 했지만 이미 절반이 넘는 163억5천만달러를 뽑아썼다. 이 달러는 채워넣어야 할 빚이므로 실질 외환보유액은 되레 1853억9천만달러(2017억4천만-163억5천만)라고 볼 수 있다. 한-일 스와프는 4월30일 끝나고 한-중 스와프 300억달러엔 달러가 없다(모두 위안화). 현재 외환보유액의 85%는 유가증권에 투자돼 있다. 여기엔 쏟아지는 미국 국채는 물론 망가진 국책 모기지 업체의 채권과 무시무시한 파생상품인 자산유동화증권(MBS·ABS)이 들어 있다. 통화 스와프 체결로 인한 미 국채 매각의 제한 가능성과 모기지 유동화증권의 거래 여부 등은 당장 달러 현금으로 바꿀 수 있는 가용 외환보유고와 관련해 여전히 시장의 의구심을 낳게 하는 대목이다.

최근 동유럽 국가들의 부도위기는 언뜻 우리와 직접 관련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동유럽에서 뺨 맞은 유럽 금융기관들이 한강에서 화풀이할 수 있다. 2007년 말 기준으로 한국에 투자된 자금 중 유럽 비중은 미국의 1.4배 수준이다. 특히 유럽계 은행의 한국 채권 투자금액은 2천억달러에 육박하는 것으로 알려져 자금 이탈 때 파괴력이 클 것으로 보인다. <블룸버그통신>은 2월23일 “한국 외채의 62%가 유럽계 은행에서 빌린 것으로, 동유럽 위기에 서유럽이 타격을 받을 경우 한국 은행들의 외채 만기 연장이 어려워질 수 있다”는 골드만삭스 분석가의 견해를 소개하면서 “한국 원화 가치가 하락 압박을 받을 수 있다”고 보도했다. 김영익 하나대투증권 부사장은 “서유럽 은행들이 동유럽에 대출해준 돈은 1조7천억달러로 추정되며 동유럽 위기가 심화되면 서유럽 은행들이 자본 확충을 위해 우리나라에서도 돈을 빼내갈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했다. 반면 박희찬 미래에셋증권 이코노미스트는 “서유럽의 동유럽 대출은 전체 해외 대출의 6% 수준인데다 동유럽은 단기 차입 비중이 40%대 초반에 불과하다”며 확대해석을 경계했다.

외채 의존 성장 구조에 원인

동유럽과 한국은 동병상련이다. 세계 금융시장이 흔들리면 외국 자본이 가장 먼저 이탈하고 환율은 빨갛게 달아오른다. 기축통화를 갖고 있지 못해 위기에 취약할 수밖에 없는 이머징 국가의 숙명인 것이다. 무슨 종말론처럼 시기를 특정한 외환위기설이 배회하는 데는 지난해 3분기를 기점으로 한국이 채권국에서 채무국으로 전락한 것도 한몫했다. 한국 금융시장을 배회하는 유령을 내쫓으려면 일단 경상수지 흑자와 외환보유고의 안정화라는 ‘부적’이 필요하다. 외평채 추가 발행과 외환보유액 공동 운용 등 국가 간 협력 강화라는 대책도 촉구되고 있다.

하지만 외채에 의존해 성장을 추구하는 벌거숭이 경제의 길을 수정하지 않는 한 한국 경제는 국제 금융시장의 움직임에 운명을 내맡길수밖에 없다. 하루가 멀다 하고 외화 유동성 위기를 반박하는 자료를 내놓던 정부는 급기야 2월26일 외국인의 국내 채권 투자를 유도하기 위해 이자소득세를 면제하고 매매차익에도 비과세하는 방안을 내놨다. 시장은 어떤 신호로 받아들일 것인가? 3월은 양력이든 음력이든 무사히 넘어가야 할 것이다.

한광덕 기자 kd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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