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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한국의 루비니’에게 듣는 태풍의 핵

외환보유고 ‘외화내빈’… 은행, 예금 비해 대출 과다… 중소기업·자영업 자금 경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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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8-10-15 13:10 수정 : 2008-10-17 1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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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시기 이후 지난 10여 년간 수많은 한국 경제 위기론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올해 상황만 돌아봐도 사례들은 풍부하다. 국내 채권 만기일이 지난 9월에 몰려 있다는 점에 착안해, 외국인들이 만기가 돌아오는 69억달러의 자금을 재투자하지 않고 한꺼번에 회수하면 국내에 달러 유동성 위기가 발생할 수 있다고 경고한 ‘9월 위기설’이 대표적이다. 촛불시위로 지지도가 최악으로 치달을 때 이명박 대통령과 정부·여당이 고안해낸 ‘촛불 경제위기론’도 있었다. 부적절한 ‘팩트’에 근거해 짜인 ‘경제위기의 각본’들은 제각각 짧은 유통기간이 지나자 사그라졌다.

미국발 금융위기의 충격파가 국내 외환시장으로 밀려들면서 원·달러 환율은 급등락을 거듭하고 있다. <한겨레21> 윤운식 기자

그러나 국내에서 공포와 불안을 조장하는 ‘루머’들만 판을 친 것은 아니다. 정부 당국자들이 그토록 자신하는 한국 경제의 ‘펀더멘털’이 실제론 한없이 취약하다는 점을 꼬집고, 부동산 버블의 붕괴와 중소기업·자영업의 몰락을 엄중히 경고하는 목소리들도 적지 않았다. 지금은 미국발 금융위기가 국내 금융·외환·실물경제의 복합적 위기로 치달을 가능성이 곳곳에서 제기되고, 금융시장의 각종 지표들이 널뛰기를 반복하는 상황이다. 2006년 7월 누리엘 루비니 미 뉴욕대 교수가 제시한, 비우량 주택담보대출(서브프라임 모기지) 부실에 따른 미국 경제 붕괴의 12단계 시나리오가 금융위기의 혼돈 속에서 나침반이 돼주는 것처럼, 한국 경제 비관론자들의 ‘고언’ 속에서 금융위기라는 미로를 헤쳐나갈 ‘아드리아네의 실타래’를 찾아봐야 할 때가 아닐까.

학계와 시민사회에서는 ‘9월 위기설’이 과장됐었다는 데 동의하면서도, 위기설의 본질이 환율 관리 실패와 물가 폭등에서 엿보이는 정부의 위기관리 능력 부재와 시장의 누적된 불신에 있다는 지적을 집중 제기했다. 김대중 정부 초대 청와대 경제수석과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을 지낸 김태동 성균관대 교수(경제학)는 이런 목소리의 중심에 섰던 인물이다.

달러 막혔을때 가장 충격받는 구조


김 교수는 ‘9월 위기설’에 대해 7월 초 ‘위기’를 언급한 이명박 대통령의 부적절한 발언이 도화선이 됐고, 외환보유고 감소라는 악재가 불거지면서 불길이 거세진 것이라고 진단한 바 있다. “대통령의 말에 놀란 전문가들이 여러 상황들을 따져보니 ‘외국인이 가진 채권이 문제’라는 의견이 7월부터 나와 확산된 것이다. 8월 초에 7월 외환 보유액이 100억달러 이상 감소했다는 발표가 나오자 8월 내내 환율이 100원 가까이 올랐다. 8월부터 외환시장이 쇼크 상태였다”는 게 당시 그의 진단이었다. 또 출범 이후 ‘우왕좌왕 정책’을 남발하며 시장의 신뢰를 상실한 현 정부를 위기설의 ‘배후’로 꼽았다.

지난 10월9일 서울 종로구 명륜동 성균관대 연구실에서 만난 김 교수는 “최근의 환율 급등을 수출기업들의 투기 탓으로 돌리는 대통령의 인식은 우리 외환에 구조적 문제점이 있다는 점에 눈감은 것”이라고 비판했다. “환율이 오를 때 무역업체가 수입 물량은 뒤로 미루고, 수출로 들여올 돈을 합법적으로 외국에 놓아두는 것은 교과서에도 나오는 ‘리즈 앤드 래그스’(Leads and Lags)라는 환리스크 관리 방법”이며 “YS 정부가 외환위기 책임을 재벌과 종금사 등에 돌린 것처럼, MB 정부도 희생양을 찾고 있는 셈”이라는 것이다.

김 교수는 거시적 지표에서 현재 환율 급등의 본질을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씨티그룹의 후앙 위핑 이코노미스트가 10월8일 발표한 보고서를 보자. 한국은 중국·인도·타이 등 아시아 10개국과 비교해볼 때, 외환보유고 대비 외부 유동성 공급 비율과 유동자산 비율이 각각 1위와 2위를 기록하고 있다. 세계 6위 수준의 외환보유고를 가졌다고 하지만, 지금처럼 세계적으로 달러 흐름이 말라버렸을 때는 가장 큰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는 구조라는 것이다. 김 교수는 “경상·자본수지의 적자 문제가 근원적인 환율 불안 요인인데, 현 정부는 성장을 높이겠다면서 정부 지출을 늘리고, 감세로 정부의 저축을 줄이고 있다”면서 “재개발·재건축 등 부동산 규제를 완화하고, 전세계적 금융위기 속에서도 ‘골드만삭스’ 같은 글로벌 투자은행(IB)을 키우겠다는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 바로 시장의 불신을 키우고 환율을 끌어올리는 주범”이라고 꼬집었다.

김태동 성균관대 교수(한겨레)·김병권 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 센터장·김광수 김광수경제연구소 소장. 한겨레 김정효·이정아 기자(왼쪽부터)

국책·민간 경제연구소들을 통틀어 부동산 거품 붕괴의 가능성을 가장 강력히 경고하고 나선 곳은 ‘김광수경제연구소’다. 2005년부터 부동산 거품 붕괴 가능성을 경고해온 김광수 소장은 지난 7월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2006~2007년에 일어난 부동산 붐은 수도권에서 뉴타운과 재개발에 기댄 ‘이명박 거품’이었고, 지방에서는 노무현 정부의 행정 중심 복합도시·혁신도시 개발에 뿌리를 둔 거품이 일었다”면서 “붐은 이미 끝났고 거래는 급감하고 있다. 거품 붕괴 초기 단계에서는 거래가 줄고 가격은 떨어지지 않는 기간이 1년 반에서 2년가량 이어진다. 그러다 폭락한다”고 경고했다. 지금도 우리나라 은행들은 집값의 절반 이하로 돈을 빌려줘서 집값 거품이 터져도 금융시장에 큰 혼란이 없다는 분석들이 많다. 하지만 김 소장은 “우리나라 은행은 예금 총액의 130%를 대출해주고 있다. 미국이나 일본의 은행은 대출 총액이 예금 총액의 90% 정도다. 위기의식이 없는 게 가장 큰 걱정”이라고 반박했다.

최근 <부동산 대폭락 시대가 온다>는 무시무시한 제목의 책을 내놓은 같은 연구소의 선대인 부소장은 현재의 상황에 대해 “버블 붕괴 압력이 최고점에 달해 백약이 무효인 상황”이라고 말한다. 가격 하락을 막는 게 소용없는데도 정부가 민간 건설사의 미분양 물량을 사들이고, 고가주택 소유자들의 세금 부담을 줄여주겠다고 나서는 것은 난센스라는 것이다. 그는 “부동산값이 많이 오를 때 투자를 못한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소득이 줄면서 양극화가 심화됐음에도, 집값이 떨어질 땐 정부가 부양책을 써주면 투자를 안 한 사람만 손해 보는 것”이라며 “정상적인 정부가 하는 일이라고 보기 힘들다”고도 했다.

집값 20% 떨어지면 은행 감당 힘들어

그는 한국의 부동산 가격 하락 충격은 서브프라임 모기지 부실의 원산지인 미국보다 심각할 수 있다고 경고한다. “공식적인 부동산 담보대출이 307조원이라지만, 여러가지 형태로 숨어 있는 액수까지 포함하면 500조원이 될 것”이며 “집값이 20% 하락해 100조원 정도가 부실에 빠진다고 보면 국내 은행들이 감당하는 게 쉽지 않다”고 비관했다. 부동산 거품 붕괴의 징후가 곳곳에 나타나는데도 ‘이명박의 마술’만 믿어서는 안되며, 부동산을 ‘단기 투자상품’이 아닌 ‘삶을 영위하는 공간’으로 보는 시각으로 바꿔야 한다는 게 선 부소장의 제안이다.

그렇다면 금융 불안에 대한 처방전으로 금리 인하를 꺼내드는 것에 대해 김광수연구소는 어떤 목소리를 낼까. 지난 10월9일 한국은행은 기준금리를 연 5.25%에서 5%로 0.25%포인트 내렸다. 총액한도 대출금리도 3.5%에서 3.25%로 낮췄다. 한은이 기준금리를 내린 것은 4년 만으로, 통화정책 기조가 물가 안정에서 경기 진작으로 급전환됐다는 신호다. 그러나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국내에 본격적인 영향을 끼치기 이전부터 강력한 경고 신호를 내온 김광수연구소는 그동안 금리 인상을 통해 부동산 가격을 낮춰 고유가로 인한 인플레이션 압력을 상쇄하고, 외국인 투자자의 증시 이탈을 막아야 한다고 지속적으로 주장해왔다.

한편 ‘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의 김병권 연구센터장은 연초부터 중소기업과 자영업에 닥친 먹구름을 꾸준히 경고해온 인물로 꼽을 수 있다. 진짜 위기는 외국인이 만기가 도래한 채권을 모두 현찰로 바꿔버리는 게 아니라 우리 실물경제 안에 있다는 것이다. 김 센터장은 9월 위기설에 대해 “불안한 금융시장을 이용해 차익을 얻으려는 외국인 투기세력이 대대적인 주식 공매도를 감행하며 금융 불안을 최고도로 증폭시킨 사건”이며, “이렇게 공매도한 주식을 투기자본이 되사는 ‘숏커버링’이 시작되고, 미국의 부실 모기지 업체에 대한 구제금융으로 금융시장이 안정되자 9월 위기설은 잦아들었다”고 분석한 바 있다. 투기적 외국 자본이 조장한 9월 위기설을 그 자신들이 거둬가버렸다는 것이다.

그는 위기의 본질을 다른 곳에서 찾았다. 내수침체, 소득감소, 수출둔화 등 실물경제의 악화와 더불어 기업과 가계의 부채가 경제 회복에 결정적 걸림돌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김 센터장은 “외환위기가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의 명예퇴직·정리해고 등을 빚으며 충격을 안겼다면, 이번 경제 위기는 자영업과 중소기업에서부터 충격이 올라가는 방식으로 진행될 가능성이 있다”면서 “특히 지금은 중소기업과 자영업에 돈줄이 막혀버릴 우려가 크다”고 밝혔다.

최근 제기됐던 한국 경제 위기론·비관론의 교훈들 (※이미지를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실물 악화와 부채가 위기 진원

지난해 10월 코스피 지수가 2천 선을 훌쩍 넘은 시점에서 증시 1500설을 내세운 애널리스트들도 있었다. 이종우 HMC투자증권 리서치센터장은 부동산·주식 등 자산 가격이 지나치게 높아졌고, 세계 경제의 불안 요소가 커졌다는 점이 분명했기 때문에 ‘업계의 상식’을 깨고 비관론을 폈던 것이라고 설명한다. 인구나 산업 구조상 5% 성장도 힘든 한국 경제에서 ‘7% 성장론’을 내세운 새 정부가 출현한 것도 주요 ‘악재’였다는 분석이다. 이 센터장은 “정부가 경제 운용의 철학과 전략을 재정립해야만 시장의 신뢰를 회복할 수 있을 것”이라며 “중국 의존도가 높은 우리 경제의 특성상, 앞으로 중국 경기의 침체에 따른 경제 불안이 가중될 수 있다는 점도 염두에 둬야 한다”고 말했다.

중국 경기 침체가 더 무서워

이렇게 한국 경제 비관론자들의 논의를 따라가보면, 외환위기나 부동산 가격 거품 등 한 가지 요소만을 강조하기보다는 이들이 유기적으로 작용해 중산층·서민들의 생활에 직격탄을 날리게 될 가능성을 경고하고 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금융위기에 잘 대처하고 있다”는 정부의 자화자찬과 달리, 시장이 정부정책을 극도로 불신하고 있다는 쓴소리도 빠지지 않는다. 세계 경제는 이미 금융 쪽에서 터진 충격이 실물로 번지고, 그게 다시 금융 부문으로 되돌아오는 악순환에 빠졌다. 정부가 당장의 외환 불안만이 문제고 수출기업들이 투기세력이라는 식의 억지논리를 접고, 외환·금융·실물경제의 복합위기가 심화되는 것을 막아야 할 때라고 ‘한국의 루비니’들은 입을 모으고 있다.

임주환 기자 eyeli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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