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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기업 민영화는 노동자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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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1-04-24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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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전기술 노조의 지분매입 발표 이후 종업원지주제 활용한 방안에 관심 증폭

사진/ 한전기술 노조는 민영화의 새로운 모델을 만들려고 한다. 이를 위해서는 51%의 지분을 매입해야 한다.(박승화 기자)
종업원지주제, 또는 종업원기업인수를 통한 공기업 민영화 논의가 활발해지고 있다. 이런 논의가 일게 된 것은 한국전력 자회사인 한전기술 노조가 민영화 과정에서 51%의 지분을 매입해 지배주주가 되겠다는 계획(<한겨레21> 354호 특집 참고)을 발표한 뒤부터이다. 지금까지 노동계는 ‘정부가 일방적으로 강행하고 있는 공기업 민영화’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하고 저지투쟁만 벌여왔다. 한데, 한전기술 노조는 종업원지주제를 통해 소유·지배구조가 민주화되고 자율경영이 보장된다면 스스로 민영화에 참여하겠다는 의지를 밝힌 것이다. 노조가 민영화라는 불길에 섶을 지고 뛰어든 셈이다. 한전기술 노조의 요구가 관철될 경우 올해와 내년 말까지 민영화할 다른 33개 공기업 및 그 자회사들의 민영화 일정과 방식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칠 것으로 보인다.

민영화 앞둔 공기업·자회사들 적극 검토

지난 4월18일 국회 의원회관 소회의실에서는 ‘종업원지주제를 활용한 공기업 민영화 방안’을 주제로 노·사·정과 학계 전문가들이 참여한 공개토론회가 열렸다. 이 토론회는 국회 산업자원위원회 안영근 의원(한나라당)이 “노사 합의를 통해 구조조정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종업원지주제에서 찾아보자”는 취지로 마련했다. 이어 4월21일 참여사회연구소도 서울 안국동 참여연대 강당에서 ‘공기업 민영화에 대한 하나의 대안-종업원지주제’란 주제로 월례토론회를 열었다.


두 토론회에 모두 참여한 경기대 신범철 교수(경제학)는 민영화의 한 방법으로 종업원지주제를 활용한 각국의 사례와 효과에 대한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신 교수는 먼저 “종업원지주제는 미국과 영국을 비롯한 서구자본주의 국가들은 물론이고 동유럽의 체제전환국가 및 개발도상국가에서 공기업 민영화의 한 방식으로 광범위하게 활용되었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여기서 종업원지주제를 적극 활용한 주체는 정부이다. 각국 정부가 공기업의 지분을 매각할 때 종업원들에게는 다른 민간기업보다 유리한 조건으로 인수할 수 있도록 하는 법적·제도적 지원정책을 동원했다. 가령 영국 정부는 국영통신기업 브리티시텔레콤(BT)을 민영화하면서 종업원들에게는 1200만주를 무상으로 제공하고 추가 주식 매입시에도 할인가격을 적용해 우선 배정하는 혜택을 줬다. 이 결과 93년 브리티시텔레콤의 민영화가 완료된 단계에서는 특정기업이나 개인의 소유가 아니라 종업원과 일반 국민들이 전체지분의 49.7%를 보유한 집단소유형태의 민간기업이 되었다.

각국 정부가 종업원지주제를 민영화 방식의 하나로 적극 활용한 이유는 무엇일까? 신범철 교수는 “민영화의 효과를 유지하면서도 경제력 집중과 소득불균형 심화, 공공 서비스와 재화의 질적 저하, 대규모 실업유발 등 민영화에 따른 부작용을 최소화할 수 있는 방안이기 때문”이며 “민영화한 이후에도 종업원들의 자발적인 생산성 향상 노력과 노사의 협력적 관계를 자연스럽게 정착시켜 기업의 내부효율성을 높일 수 있음이 외국에서는 경험적으로 입증됐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종업원지주제를 민영화 방안으로 적극 활용할 여건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다. 특히 현행 종업원지주제의 골격인 우리사주제도에는 결함이 아주 많다. 종업원들이 자기회사 주식을 살 때 제공받는 세제·금융상 혜택이 외국에 견줘 훨씬 뒤떨어지고 그나마 점차 축소되고 있는 추세이다. 또 자본시장이 불안해 주가변동에 따른 손실을 종업원들이 고스란히 부담해야 한다. 김석연 변호사(참여연대 경제민주화위원회 부위원장)는 “공기업의 종업원들이 개인자금으로 회사의 지배주주가 될 수 있을 만큼 지분을 확보하기도 만만치 않은데다 주식가치 변동에 따른 위험을 종업원들에게 전가시키는 구조에서는 민영화 이후 고용확대나 후생복지의 향상을 기대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노조의 결단에도 정부·한전은 시큰둥

사진/ 종업원 지주제를 통한 공기업 민영화 논의가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 참여사회연구소가 종업원지주제를 주제로 연 월례토론회.(강창광 기자)
한전기술 노조는 국내 종업원지주제의 이런 문제점을 그대로 감수하면서도 지분인수에 나서려고 한다. 대주주인 한전에 제시한 지분인수 가격이 1주당 25만6700원, 51%의 지분 667억원어치를 인수하려면 1760명의 우리사주조합원이 1인당 평균 3800만원씩 자기부담으로 투자해야 한다. 이 회사는 비상장기업이어서 노조가 지분인수가격을 산출할 때 주당순자산가치를 100% 인정했다. 재벌 오너의 가족들처럼 온갖 편법을 동원해 헐값에 인수하겠다는 게 아니다. 그런데 순자산가치를 100% 인정해 주식을 사면 사실 투자매력이 별로 없다. 현재 상장기업의 평균 주가순자산배율(PBR: 주가를 주당순자산가치로 나눈 것) 0.5 정도에 불과하다. 그나마 당장 환금성이 있는 상장기업조차도 주가수준이 주당순자산가치의 절반에 불과한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전기술 종업원들이 겁없이 지분인수에 뛰어든 배경에 대해 박용성 노조위원장은 이렇게 설명했다. “회사주식을 투기개념이 아닌 자율경영의 보장과 소유·지배구조 민주화 수단으로 활용하기 위해 노조가 수개월간 고뇌하고 내부토론을 거친 끝에 내린 결단이다.” 게다가 노조는 투자금액이 이익배당으로 환수되는 시점까지 무쟁의 선언을 하고, 당장에 올해 임금도 지난해보다 10% 삭감하는 등 스스로 고통분담에 앞장서는 모습을 보여주기로 했다.

한전기술의 노조가 이렇게까지 희생과 양보를 전제로 한 종업원인수 방안을 내놓았는데도, 정부나 대주주인 한전쪽의 반응은 시큰둥하다. 산업자원부 김영준 전력사업구조개혁단장은 “한전기술이 수행하고 있는 원전설계사업은 국민의 생명과 재산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칠 수 있는 특수성이 있기 때문에 자본력과 원전설계 능력을 겸비한 국내외 유수기업에 의한 안정적인 경영참여가 필요하다”면서 ‘노동자경영 불가론’을 주장했다. 또 “종업원기업인수에 의한 민영화의 선례가 없고 지금까지 추진한 다른 공기업의 경우 지분의 10% 범위 안에서만 종업원에게 우리사주를 우선 배정해왔기 때문에 한전기술에만 예외를 두면 형평성 문제를 야기하게 된다”는 것도 반대 명분의 하나이다.

김진성 한전 기획본부장도 “이미 지분매각 입찰공고(2월28일)를 내고 국내외 기업들로부터 입찰의향서를 받은 터여서 번복하기가 곤란하다”면서 “다만 국내 종업원지주제가 보완되고 종업원기업인수가 원활해질 수 있도록 하는 제도적 토양이 성숙되었다고 판단될 경우에는 종업원에 의한 지분 51% 이상 소유를 검토할 수 있다”고 말했다. 정부가 태도를 바꾸면 종업원기업인수가 가능하다는 얘기로 들린다. 하지만 정부와 한전이 확정한 한전기술 민영화 일정은, 지분입찰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을 ‘법인 또는 법인컨소시엄’으로 제한해놓고 오는 8월까지 우선협상대상자를 선정해 10월 말까지 매각계약 체결을 마무리한다는 것이다.

이승현 경남대 교수(경영학)는 “정부의 민영화 정책에는 몇 가지 잘못된 전제가 깔려 있다”며 “특히 반드시 민간기업이 지배권과 경영권을 가져야만 민영화 효과를 달성할 수 있다는 생각과 노동자의 경영참여에 대한 의구심은 오해에서 비롯됐거나 논리적, 실증적 근거도 전혀 없다”고 말했다.

공기업 매각 걸림돌 제거한 실험적 모델

종업원기업인수를 통한 공기업 민영화는 정부의 주장대로 ‘위험한 실험’일 수도 있다. 하지만 공공부문 개혁과 경제민주화라는 두 가지 과제를 동시에 해결할 수 있는 ‘의미있는 실험’이기도 하다. 따라서 정부는 실험의 성공 가능성을 적극 살리려는 의지를 보이는 게 마땅하다. 민주노동당도 한전기술의 종업원기업인수와 관련해 논평을 내고 “정부의 무분별한 공기업 매각방식의 문제점을 해소하고 국부유출 방지, 고용안정, 재벌체제 타파, 공공성 유지 등을 실현할 수 있는 새로운 민영화 모델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적극 지원할 것”을 촉구했다.

박순빈 기자 sppar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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