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겨레21 ·
  • 씨네21 ·
  • 이코노미인사이트 ·
  • 하니누리
표지이야기

어둠에 묻힌 ‘보따리수출’

356
등록 : 2001-04-24 00:00 수정 :

크게 작게

동대문시장 찾는 외국 바이어 갈수록 줄어… 다품종 소량 생산의 잠재력 발휘 못해

사진/ 동대문시장에서 큰손 바이어는 줄어들고 조무래기만 남을 건가. 러시아에서 온 보따리 장사꾼이 물건을 챙기고 있다.(강창광 기자)
동대문시장 안에 있는 5층짜리 상가 ‘아트프라자’. 이 상가 4층과 지하 1층에선 매주 화요일 밤 11시부터, 물건을 팔려는 상인들과 외국인 바이어들이 뒤엉켜 북새통을 이룬다. 4층엔 아동복, 지하 1층엔 숙녀복을 파는 상점이 빽빽이 몰려 있는데, 모두 수출상품만 취급하고 있다. 화요일 밤 11시부터 시작된 이 북새통은 다음날 새벽 6시까지 이어진다. 바로 동대문 ‘보따리수출’의 현장이다.

아트프라자 연합상우회(회장 서성옥)에 따르면, 화요일마다 이곳 아트프라자를 찾는 외국 바이어는 300∼400명에 이르며, 이 가운데 80% 이상이 대만계이다. 이들 바이어는 한국 방문 첫날 상가를 돌아다니며 꼼꼼히 ‘샘플’을 살핀 뒤 현지에서 팔릴 만한 것들을 추려, 오더(주문)를 낸다.

그늘진 한국경제의 고민이 동대문에도…


아트프라자 상인들은 수출 오더를 따내면 평소 밀접한 관계에 있는 공장으로 생산 주문을 낸다. 아트프라자와 인연을 맺고 있는 공장은 주로 서울 삼양동, 면목동, 봉천동에 몰려 있으며 생산 주문을 받은 지 2∼3일이면 제작을 완료할 정도로 대단한 ‘스피드’를 자랑한다. 이는 동대문시장만이 갖고 있는 특별한 강점이기도 하다.

대만계를 중심으로 한 외국 바이어들은 주문 이튿날부터 생산공장에 직접 들러 제품을 점검하는 등 분주한 나날을 보내게 된다. 통관절차를 비롯한 여러 가지 수출업무를 대행해주는 ‘포장회사’에 일감을 맡기는 것도 빠뜨릴 수 없는 일정이다. 바이어들은 이런 일련의 과정을 금요일까지 마치고 주말과 월요일에 걸쳐 대만, 일본 등 현지로 돌아가 영업에 나서고는, 화요일 밤이면 또다시 한국으로 날아오는 일상을 반복한다. 바이어들의 이런 쳇바퀴 일정에 맞춰져 화요일 밤의 아트프라자는 늘 불야성이다.

이처럼 겉보기에는 생기에 넘치는 듯 보이는 아트프라자에도 근래 들어 그림자가 서서히 드리우고 있다. 지난해와 올해 시각이 지날수록 수출이 점점 줄고 있기 때문이다. 외국 손님들을 중국에 뺏기고 있는 게 주원인이라고 한다. 한국경제의 현실과 고민이 아트프라자를 비롯한 동대문시장에도 고스란히 반영되고 있는 것이다.

아트프라자 4층 ‘레델로’에서 일하고 있는 정주영(30)씨. 디자이너 출신인 누나와 함께 이 가게를 꾸려가고 있다는 정씨는 “찾아오는 바이어들이 예전보다 많이 줄고 있다”고 말한다. 그는 “제대로 된 작품을 내느냐 못내느냐에 따라 들쭉날쭉해 구체적인 숫자를 얘기할 수는 없지만, 지난해에 비해 수출실적이 훨씬 못한 것은 분명하다”고 덧붙였다.

하긴, 잘돼도 안 된다고 우기는 상인들의 ‘엄살’을 감안할 때 이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만은 없을지도 모른다. 사실, 개별 상가는 물론이고 아트프라자 전체적으로도 수출실적이 어느 정도에 이르는지 추정하기가 어렵다. 각 상가들이 정보를 꽁꽁 숨기고 공유하지 않는 폐쇄성으로 인해 대략적으로 윤곽을 그리는 일조차 불가능에 가깝다. 이런 형편에서 상인들의 엄살(?)만으로 수출이 줄었다거나 늘었다는 식으로 단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여러 상점을 다니는 과정에서 외환위기 직후 보따리수출이 활기를 띠었을 때와 견주면 침체 분위기인 것은 뚜렷하게 느낄 수 있다.

아트프라자 연합상우회 권영기 상무는 “아직은, 중국산에 비교할 때 이곳 제품의 디자인 경쟁력이 앞서고 이른 시일 안에 납기를 맞출 수 있는 강점이 있어 그럭저럭 수출이 되고 있지만, 중국으로 발길을 돌리는 바이어들이 많아지고 있다”고 말한다. 권 상무는 “그나마 아트프라자의 경우 주로 대만 손님들을 상대하고 있어 형편이 나은 경우”라고 귀띔했다. 일본 엔화 시세와 달리 대만 달러가 강세를 보이고 있는 게 큰힘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값싼 중국으로 발길 옮기는 바이어들

사진/ 한 바이어가 동대문시장 안에 설치된 외국인구매안내소에서 상담하고 있다.(한국무역협회)
실제, 일본계 바이어를 주로 상대하는 업체들의 어려움은 더욱 커 보였다. 광희시장 2층에 자리잡고 있는 ‘위너스’도 그런 곳 가운데 하나. 가죽의류를 중심으로 피혁제품을 주문생산하고 있는 위너스는 일본경제의 불황과 맞물려 수출 또한 신통치 않다고 한다. 이 가게 주인 신동섭씨는 “이탈리아에서 들여온 피혁원단값에 크게 영향을 받는 상황인데, ‘구제역’ 파동으로 원단값이 크게 올라 중국제품에 밀리고 있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원단 1평(땅 평수와 달리 30㎠ 정도 크기를 일컫는다) 가격이 3100원 수준이었지만, 지금은 3500원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중국의 경우 인건비가 쌀 뿐 아니라 원단을 현지에서 조달할 수 있기 때문에 가격경쟁력에서 우리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는 게 신 사장의 설명이다. 요즘 원화 환율이 올라 수출 때 유리한 것 아니냐는 질문에 신 사장은 “(이 가게 특성상)환율이 오르는 데 따라 원재료값도 덩달아 상승하기 때문에 그다지 재미를 볼 수 없는 실정”이라고 말했다.

신 사장은 “요즘 수출물량은 한달에 대략 100장 정도로, 한창 호황을 누리던 90년대 초의 10분의 1 수준이며 지난해(적게는 200, 많게는 500장)와 비교해서도 크게 부진하다”고 말했다.

보따리수출의 전진기지라는 차원에서 볼 때 동대문시장은 대략 네 분야로 나뉜다. 평화시장, 동평화시장, 광희시장, 아트프라자 등이다(포털사이트 동대문닷컴(ww.dongdaemun.com) 전찬오 차장). 이는 바이어의 지역별 특성에 따라 나눈 것으로 각 섹터(분야)는 주력품목이 다를 뿐 아니라, 주요 상대국의 경제 여건에 따라 수출 경기에서도 차이를 보인다.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해 머리 속에 사각형을 그리고, 사각형의 중간 꼭대기에 동대문을 놓으면 중앙보다 약간 오른쪽 부분이 광희시장이다. 광희시장에서 약간 더 오른쪽으로 가면 동평화시장이, 그 바로 아래에 아트프라자가 자리잡고 있다. 사각형의 맨 왼쪽 중간쯤이 평화시장이다.

이렇게 나뉜 분야별로 불황의 깊이는 조금씩 다른 것으로 파악된다. 아트프라자의 경우 앞에서 언급한 대로 대만 바이어들을 주로 상대하고 있으며 주문생산만 받기 때문에 다른 곳에선 찾아보기 어려운 특화된 아이템이 많다고 한다. 이는 다른 상가에 비해 불황을 덜 타는 요인으로 꼽힌다. 동평화시장은 중남미 바이어들을 상대로 주로 의류제품을 수출하고 있으며, 광희시장은 일본인들을 상대로 한다는 바이어의 지역적 특징과 함께 가죽제품에 특화돼 있다는 점이 눈에 띈다.

평화시장은 주로 북유럽, 러시아, 중앙아시아쪽을 겨냥하고 있다. 울 제품을 중심으로 한 겨울의류를 주력으로 삼아오다 최근 들어 자동차부품, 에어컨 등으로 품목 다변화가 이뤄지고 있다고 한다. 러시아경제 위기 이후 가장 타격을 많이 받은 분야로 파악된다. 수박겉핥기식으로나마 상가를 둘러본 결과 실제, 이곳 평화시장에 입주해 있는 상인들의 어려움이 가장 크다는 점을 어렴풋하게마나 느낄 수 있었다.

평화시장 1층 ‘영화상회’의 주인 이모(가게를 찾아온 외국인들이 자꾸 ‘이모’, ‘이모’ 하고 불러서 아예 이름을 이렇게 바꿨다)씨는 “올해 들어선 두달에 1t짜리(1억원어치 상당) 컨테이너 하나밖에 채우지 못한다”며 손사래를 쳤다. 목걸이를 비롯한 각종 액세서리, 잡화를 주문 제조하는 이 업체는 평화시장의 다른 상가처럼 주로 러시아인들을 상대하고 있는데, 러시아의 모라토리엄 선언(98년 8월) 뒤부터 줄곧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한다.

불황 도미노 이어져… 수출액 절반으로

사진/ 동대문시장의 수출부진에 따라 운송회사도 일감이 줄어들고 있다. 물건을 포장하고 있는 운송회사 직원들.(강창광 기자)
수출상들의 어려움은 수출품 운송회사에도 그대로 반영되고 있다. 흔히 ‘러시아거리’라고 부르는 광희동1가에 자리잡고 있는 (주)에코비스 익스프레스의 김정환 차장은 “지난해까지 매달 취급한 운송 물량이 250t가량이었는데, 요즘은 절반에도 못 미쳐 100t에 지나지 않는다”고 전했다. 김 차장은 “외국 바이어들이 중국으로 돌아서고 있기 때문 아니겠느냐”고 나름대로 분석했다.

물론 동대문시장 보따리수출에 온통 먹구름만 끼어 있는 건 아니다. 다품종소량생산, 단납기(2∼3일 만에 제작해내는 신속성) 등 강점을 활용해 여전히 건재를 과시하는 상가도 얼마든지 많다. 이와 맞물려 동대문시장에서 만들어진 독특한 디자인, 품질에 만족을 표시하며 앞으로도 동대문시장을 찾겠다는 바이어도 적지 않다.

일본 마루이어패럴의 매니저(상품담당 이사) 이이지마 마사오미는 “중국제품이 싸긴 하지만, 납기·품질면에서 한국산을 따라오지 못한다”며 “대량으로 물건을 취급하지 않는 한 당분간 동대문시장과 거래관계를 맺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숙녀복, 벨트, 액세서리를 취급하는 독립 오퍼상 아쿠자와 센야도 “단추를 비롯한 부자재, 끝마무리 등에서 한국산이 크게 앞서는 것으로 판단돼 아직은, 중국으로 옮아갈 생각이 없다”고 말했다.

이런 희망적인 싹에도 불구하고, 동대문 보따리수출이 전반적으로 침체에 빠져든 것은 분명해 보인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 김양희 부연구위원은 “동대문시장의 수출실적을 정확히 추정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98년쯤에 정점에 달했다가 지속적으로 줄어든 것으로 분석된다”고 말했다. 김 위원은 삼성경제연구소 재직 시절이던 지난해 동타닷컴(www.dongta.com)의 신용남 사장과 함께 동대문시장에 관한 종합보고서 <재래시장에서 패션네트워크까지>(삼성경제연구소)를 펴낸 바 있다.

동대문시장에 설치된 한국무역협회 외국인구매안내소가 1999년 한햇동안 동대문시장의 수출실적을 추정한 결과, 대략 19억달러(2조원) 수준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동대문시장 인근의 7개 외국환은행과 23개 환전소 및 40여명의 암달러상을 대상으로 한 것으로, 정확하지는 않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실제 수출실적은 이보다 클 것이란 점이다. 동대문시장 인근이 아닌 곳에서 환전한 경우와 누락된 것까지 포함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 동대문시장 보따리수출이 한창 활기를 띠었을 때는 40억달러를 웃돌았을 것이란 추정도 있다. 이후엔 수출실적에 대한 추정이 이뤄지지 않아 구체적인 모습은 확인할 길이 없지만, 점차 줄었을 것이란 분석이 주류를 이룬다.

구조적 위기 극복할 인프라 확충해야

김양희 위원은 “동대문시장은 외환위기 직후 환율 상승으로 인해 반짝 호황을 맞았지만, 너도나도 비슷한 아이템을 갖고 뛰어들면서 과잉 가격경쟁이 벌어지고, 구조적인 위기 속에 빠져들었다”고 분석했다. 그는 “수요는 한정돼 있는데 공급과잉이 이뤄지고, 싸게 가격을 맞추려다보니 디자인·품질관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고 평가했다. 이 때문에 다품종 소량을 이른 시일 안에 제작해낼 수 있는 동대문시장 고유의 잠재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김 위원은 “당장 현실화하기 어렵겠지만, 이런 구조적 위기를 극복할 구심점을 만들고 정부 차원에서도 인근에 상설전시장을 짓는 등 인프라를 지원하는 노력이 있어야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김영배 기자 kimyb@hani.co.kr


좋은 언론을 향한 동행,
한겨레를 후원해 주세요
한겨레는 독자의 신뢰를 바탕으로 취재하고 보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