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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금융권 주무른 모피아 부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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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1-04-17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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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센 재경부 발판으로 산하기관 장악… 금감위 영향력 확대로 모피아 기세등등

일반인들에겐 좀 낯선 회사인 증권예탁원과 증권전산이 지난 3월 말과 4월, 열흘가량 사이를 두고 각각 두 차례씩 주주총회를 열었다.

대주주와 소액주주간 다툼 같은 말썽이 벌어질 턱도 없는 증권 유관회사에서 정기주총이 끝난 지 10여일 지난 시점에 또다시 번거로운 주총을 연 것은 왜였을까.

회사쪽의 공식 설명으로는 정기주총 당시 후임 대표이사 사장을 뽑아야했는데, 적절한 인물이 없어 주총을 연기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런 설명을 액면 그대로 믿는 이는 아무도 없다. 심지어 공식 답변을 해준 회사 담당자들조차 ‘(공식적인 설명과 다른 속사정에 대해) 다 알면서 왜 그러느냐’는 투였다.

열흘 사이에 주총이 두번 열린 까닭


사연인즉, 두 차례에 걸친 주총 앞뒤로 장·차관 인사가 있었던 것이다. 장·차관 인사와 이들 회사의 주총 사이에 무슨 함수관계가 있을까 의아심이 들 수도 있겠지만, ‘장관 인사→차관 인사→산하 기관장 낙점’의 연결 고리를 떠올리면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이른바 ‘낙하산 투입’을 앞둔 시점이어서 주총은 열었지만 섣불리 사장을 뽑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방식의 인사는 과연 타당한 것일까.

증권예탁원 및 증권전산의 대주주는 증권거래소이다. 거래소는 이들 두 회사의 지분 70.23%, 76.62%를 갖고 있다. 또 증권거래소는 증권사들의 회원 조직으로 정부 지분은 전혀 없다. 다만, 재정경제부 장관이 거래소 이사장에 대한 승인권을 갖고 있을 뿐이다. 자본주의의 기본 원리를 들이대면 증권예탁원, 증권전산 두 회사 임원에 대한 인사에서 정부가 끼어들 틈은 어디에도 없는 셈이다. 그나마 증권예탁원의 경우 증권거래법에 설립근거를 두고 있는 공공특수법인이며 대표이사 사장은 재경부 장관의 승인을 받도록 돼 있어 정부의 영향력이 발휘될 공간이 조금 있긴 하다. 하지만, 증권전산은 상법상 주식회사이다.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어디에도 정부가 권한을 행사할 틈새가 없다.

그런데도 정부의 영향력에 따라 그것도, 차관급 인사의 후속 조처로 물러난 옛 재무부 관료(이른바 모피아)를 중심으로 한 공무원들이 자리를 꿰차고 앉는 게 관행으로 굳어져 있다. 이번에 증권예탁원 및 증권전산 사장으로 선임된 노훈건 전 금융감독위원회 감사, 허노중 자민련 전문위원도 이런 맥락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이런 행태는 여의도 증권가에 한정된 일이 아니다. 산업·수출입·기업은행 등 국책은행, 나아가 한빛은행을 비롯한 일반은행 인사에서도 끊임없이 되풀이되고 있다. 외환위기 이후 모피아에 대한 성토 분위기 속에서 금융권을 중심으로 한 산하 기관에 대한 모피아의 ‘낙하산 투입’이 주춤해진 적이 있었지만 잠시뿐이었다. 이는 재경부의 권한 팽창 및 역시 공무원 조직인 금감위의 강화와 맞물려 ‘모피아 망령의 부활’이란 비난을 낳고 있다.

모피아로 대표되는 금융분야 공무원 조직의 막강한 힘은 금융감독체계 개편 과정에서 생생하게 드러났다.

금융감독체계에 대한 수술작업은 지난해 10월 시작됐다. ‘정현준 사건’에 금감원 고위직들이 연루된 것으로 드러남에 따라 금감위와 금감원으로 2원화된 현행 금융감독 시스템을 손질해야 한다는 주장이 일각에서 제기된 데 따른 것이었다. 하지만, 이후 진행된 사연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정현준 사건을 공무원 조직의 일자리를 늘리는 빌미로 삼았다는 의혹이 짙다.

정부는 지난해 11월께 각계 인사 6명으로 금융감독조직 혁신 태스크포스팀을 꾸려 개편방안 검토에 들어갔으며 태스크포스팀은 한달여 작업 끝에 금감원-금감위 통합(1안)을 포함한 4가지 방안을 마련, 공청회를 열었다. 기획예산처는 또 민관합동기구인 ‘금융감독조직 혁신위원회’를 구성, 지난 3월까지 모두 여섯 차례 회의를 열어 감독체계 개편 방안을 논의했다.

금감위 구실 강화한 금융감독 개편안

사진/모피아는 금융감독체계 개편 과정에도 영향력을 발휘했다. 금감위에 날개를 달아준 개편안에 항의하는 금감원 직원들.
당시 태스크포스팀이나 민관합동기구에서는 금감원·금감위를 통합하자는 의견이 우세했던 것으로 파악됐다. 그런데 어찌된 셈인지, 기획예산처를 거쳐 재경부에 보고된 뒤 지난 4월6일 발표된 내용은 이와 영 딴판이었다. 금감위에 불공정거래 조사권을 부여하는 등 금감원에 대한 금감위의 지시·감독권 강화쪽으로 기울었다. 그나마 금감원쪽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혀 다소 완화된 게 이 정도이다. 여섯달에 걸친 감독체계 개편 작업이 결국 금감위 공무원 조직의 일자리 늘리기로 귀결됐다는 비난이 터져나오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물론, 금감위의 역할 증대 자체를 나쁘다고만 단정지을 수는 없다. 문제는 이번 개편안이 금융감독의 효율성을 높일 수 있는가 하는 점일 터이다. 새로운 방안을 시행해보지도 않은 상태에서 섣불리 단정지을 수는 없지만, 이번 방안은 그다지 점수를 얻지 못하고 있다.

이번 감독체계 개편안의 핵심은 불공정거래 등 조사부문의 개편이다. 금감위 증권선물위원회 밑에 공무원 조직으로 조사정책국을 신설, 금감원의 조사국을 폐지하고 금감원의 조사업무를 옮긴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조사정책국에는 당분간 금감원 조사국 직원을 파견받아 업무의 연속성을 꾀하고 일정 시점에 파견 직원을 돌려보낼 것이란 전망이 덧붙는다. 이에따라 파견 금감원 직원 외에 당장 30명을 웃도는 공무원이 추가로 충원될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재경부나 금감위쪽은 이런 방향으로 개편한 것에 대해 증권시장의 불법적인 사건의 신속한 조사를 위해서라고 설명한다. 과연 그런 효과를 기대할 수 있을까.

이번 감독체계 개편안은 우선 ‘작은 정부’를 지향한다는 김대중 정부의 기본에 어긋난다. 여기에는 또 금융감독기능을 민간에 이양하는 세계적인 추세와도 맞지 않는다는 비판도 덧붙는다. 김대중 정부 출범 이후 금융개혁에 관한 한 영국의 모델을 따랐는데, 영국의 통합감독기구(FSA) 역시 순수 민간조직이다. 영국 모델을 따라야 한다는 법은 없지만, 공무원 조직에 유리한 방향으로 모든 걸 끌고 가는 것 아니냐는 시비를 불러일으키는 대목이다.

조사업무의 전문화라는 기본 방향에 비춰서도 이번 개편은 그리 후한 점수를 얻지 못하고 있다. 증권범죄의 지능화에 대비하기 위해선 전문지식이 필요한데, 공무원 조직의 잦은 인사이동을 감안할 때 전문성 확보가 곤란할 것이란 분석이 많다.

외환위기 이후 숨죽여지내던 모피아가 다시 득세하게 된 것은 지난해 1월 이헌재 초대 금감위원장이 재경부 장관으로 옮아갈 때부터였던 것으로 분석된다. ‘구조조정 전도사’로 불리며 강력한 지도력을 발휘하던 이 전 장관이 재경부로 간 뒤 금융권력의 무게추가 금감위에서 재경부로 차츰 옮겨졌으며 이후 제도적 뒷받침까지 이뤄졌다. 금감위의 구조개혁기획단이 해체돼 금융·기업 구조조정은 재경부 몫이 됐다.

여기에 덧붙여 지난해 말 정부조직법 개정에 따라 재경부가 부총리 기관이 됨으로써 재경부는 예전의 재경원 못지않은 힘을 갖게 됐다. 외환위기 이후 과도할 정도의 비난과 성토의 대상이었던 모피아가 예전의 힘과 명예를 거의 회복한 것이다. 재경원이 쪼개져 금융감독 기능은 금감위로, 예산업무는 기획예산처로 옮겨져 힘의 분산이 이뤄진 듯하지만 모피아의 관점에서 볼 때는 오히려 ‘힘의 확산’ 과정이었던 것이다.

서울시립대 김영천 교수(행정학)는 “공무원들이 선호하는 힘있는 부처, 부서의 권한과 인력만 자꾸 늘어나고 있다”며 “민원인을 중심에 둔 재편성이 아쉽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개혁을 했다고 할 수 있고, 무슨 명분으로 개혁을 이끌어갈지 의문”이라고 덧붙였다.

재경원은 쪼개져도 모피아는 강해진다

새로 선임된 증권예탁원, 증권전산 사장의 경력을 간단히 살펴보자. 노 사장은 △재무부 자금관리과장 △국유재산과장 △예금보험공사 감사 △금감위 감사를 거쳤다. 한편, 허 사장은 △재경원 대외경제국장 △국세심판소 상임 심판관 △자민련 제2정책연구실 실장 등을 지냈다. 허 사장이 옛 재경원 시절 잠시 국제금융·증권심의관을 지냈다는 점을 빼고는 두 사람의 경력에서 ‘증권’을 찾아볼 수조차 없다.

재경부, 금감위 등 공무원 조직의 힘이 세지고 산하 기관에 재무 관료가 내려가는 것 자체만을 두고 왈가왈부할 수는 없다. 문제는 적절한 곳에 적절한 권한 및 사람이 배치되느냐 하는 문제일 것이다.

금융감독체계 개편작업에 참여했던 한 교수는 “재무관료는 개개인으로 보면 똑똑하고 우수한 인력인데 넓게 보는 자세가 부족한 것 같다”며 “좀더 멀리 보는 미래지향적인 자세를 당부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이번 금융감독체계 개편은) 학자적인 견해로는 말도 안 되는 것”이라고 덧붙여 태스크포스팀이나 공청회 과정에서 제시된 민간위원들의 의견이 제대로 반영되지 않았음을 분명히 했다.

김영배 기자 kimy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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