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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벼랑에 몰린 그린스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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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1-04-17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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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증시 침체로 성공 신화 흔들려… 추락한 명성 회복할 돌파구는 ‘연착륙’

사진/미국 경제 대통령이라는 찬사를 듣건 앨런 그리스펀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 미국경제의 침체 여파로 그의 명성에 흠집이 났다.
미국 주식시장의 침체로 ‘그린스펀 주가’도 동반 추락하고 있다. 미국경제가 잘 나갈 때 앨런 그린스펀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은 시대의 영웅이었다. 그러나 미국에 불황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지금, 영웅은 궁지에 몰려있다. 지난해 연말까지만 해도 그의 이름 앞에는 ‘미국 경제를 지휘하는 마에스트로(거장)’, ‘경제 대통령’, ‘금융의 신’ 등 온갖 찬사들이 낯설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이런 찬사들이 쑥 들어가고, 그리스펀 의장에게는 비난의 화살들만 쏟아지고 있다. 영국의 경제학자인 마커스 밀러는 “미국 경제가 침체에서 벗어나려면 우선 ‘그린스펀의 초인간적 거품’이 빨리 사라져야 한다”고 비꼬는가 하면, 미국내 보수파 경제평론가인 빌 오라일리도 “금융시장은 더 이상 그린스펀을 신뢰하지 않으며 특히 수백만의 주식투자자들이 그를 믿지 않는다”며 직격탄을 쏘았다.

그린스펀의 명성이 추락하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모든 경제 거울이라 할 수 있는 뉴욕증시가 바닥을 헤매고 있기 때문이다.

올 들어 FRB가 세번에 걸쳐 1.5%포인트나 금리를 내렸는데도 미국 증시는 바닥을 기고 있다. 통화정책이 더 이상 먹혀들지 않고 있는 셈이다. 이에 따라 그린스펀의 권위도 함께 떨어지고 있다. 희망이 크면 실망도 크게 마련이다. 믿었던 그린스펀이기에 더욱 그렇다.

중앙은행 총재로 경제호황기 이끌어


사진/그리스펀의 주가는 신경제의 붕괴로 타격을 받았다. 루슨트테크놀로지의 부도 소문에 휩싸인 뉴욕 증권거래소.(AP연합)
올해로 15년째 FRB 의장을 맡고 있는 그린스펀의 재임기간은 미국 경제의 최장기 호황국면과 맞물려 있다. 그는 경기과열과 경기급랭을 사전에 차단시키는, 이른바 ‘선제적인’(Pre-emptive) 통화정책을 구사해 미국 신경제의 견인차였다는 평가를 받아 왔다. 인플레이션 없는 고성장의 지속이라는 새로운 경기사이클은, 정보통신 기술의 발달에 따른 생산성 향상에 바탕을 두고 있지만 그리스펀 의장의 노련한 통화정책이 없었다면 결코 꽃피지 못했을 것이라는 데 누구나 동의해왔다. 그러나 나스닥의 주가지수 2000포인트선이 무너지고 기업과 민간의 부채가 급증하자 그에 대한 사랑이 한순간에 증오로 변하고 있다.

이제 그린스펀에 대한 사랑이 증오로 변해 가는 과정을 추적해 보자. 멀리 갈 것도 없이4개월부터 그린스펀의 위상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올해 1월3일. 이날은 선제적인 금리정책의 표본으로 두고두고 회자될 날이다. 경기가 나빠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많은 전문가들은 그린스펀이 그렇게 공격적인 금리인하를 단행할지는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 금리인하를 한다 해도 1월5일 발표될 실업률을 통계를 확인한 다음에야 할 것으로 예상됐다. 더구나 금리인하 폭은 0.25%포인트에 그칠 것이라는 게 대다수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런 예상은 보기좋게 빗나갔다. 그린스펀은 긴급 전화회의(Conference call)를 요청해 공개시장위원회(FOMC) 위원들을 불러냈고, 이들에게서 만장일치로 금리인하 동의를 받아냈다. 그리고 전격적인 0.5%포인트의 금리인하를 단행했다. 전날 장에서 폭락세를 보이며 심상치 않은 조짐을 보였던 뉴욕 주식시장은 급반등에 성공했다. 나스닥 지수는 사상 최대의 상승폭(324.83포인트)과 상승률(14.17%)을 기록했다. 그의 트레이트마크인 ‘선제적인’ 금리정책이 돋보이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이후 두번에 걸친 추가 금리인하에도 오히려 주가는 계속 떨어졌다.

지난 1월31일 뉴욕증시는, FRB가 금리를 0.5%포인트 내렸다는 발표에도 3대 지수가 모두 하락했다. 금리인하의 기대가 이미 시장에 반영돼 있었고, 이날 미 상무부가 지난해 4분기 경제성장률이 전분기의 2.2%보다 크게 낮아진 1.4%에 그쳤다고 발표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달포 뒤인 3월20일. FRB는 또 0.5%포인트의 금리인하를 단행했다. 그러나 나스닥 지수는 전날보다 4.8%(-93.74포인트)나 떨어진 1857.44로 마감해 1998년 11월 이래 최저치를 기록했다. 금융시장에선 0.75%포인트의 금리인하를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때부터 미국 증시는, 항생제를 너무 많이 맞아 더 이상 주사약발이 먹혀들지 않는 중환자로 비유되기 시작했다.

주식투자자들 가혹한 비판자로 돌아서

사진/부시 대통령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그리스펀.(AFP연합)
상황이 이렇게 되자 그동안 그린스펀의 열렬한 팬이었던 주식투자자들은 가혹한 비판자로 돌변했다. 현재 그린스펀에게 쏟아지는 비난은 크게 두 가지. 첫째 지난해 상반기 주식시장이 너무 과열됐다는 이유로 금리를 과도하게 인상한 점, 둘째 올 들어 미국경제가 침체로 가고 있다는 분명한 신호를 보내고 있음에도 금리인하에 너무 소극적이라는 점이다. 또 더 거슬러 올라가, 98∼99년에 금리를 지나치게 낮게 유지해 거품을 자초했다는 비난도 있다. 주식투자자들의 이런 비난은 사실 논리적이지 않다. 90년대에 FRB는 여러차례 과감한 금리인상을 단행했으나 미국 주식시장은 과열 양상을 보였다. 만약 그린스펀이 금리를 더 인상했다면 주식시장의 과열은 완화됐을 것이고, 따라서 지금의 고통스런 거품 붕괴도 없었을 것이다.

비교적 객관적인 영국의 경제학자들은 그린스펀이 비판받아야 할 점은 자산가치의 인플레이션을 간과한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주식을 포함한 자산가치가 올라갈수록 그 거품이 터질 때의 고통은 심하다. 특히 기업이나 개인 모두 낮은 저축률을 기록하고 있는 미국의 경우는 더하다. 미국의 낮은 저축률은, 기업과 개인들이 보유자산의 가치가 계속 올라갈 것이라는 기대심리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린스펀 역시 신경제의 환상에 젖어 있었다. 그는 1996년 주식시장이 ‘이상 과열’(irrational exuberance)에 빠졌다고 경고하기도 했지만 신기술의 발전으로 인플레이션이 없는 가운데 생산성이 증가해 고성장이 지속될 수 있을 것으로 믿었다. 이런 그의 신념은 미국 주가가 터무니없이 과장돼 있음에도 이를 정당화하는 빌미를 제공했다.

그의 모든 결정은 훗날 역사가 평가할 것이다. 지금 중요한 것은 그가 다시 미국경제의 해결사가 될 수 있느냐이다. 하지만 천하의 그린스펀일지라도 미국경제를 구원하는 일은 쉽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정보통신 분야의 끊임없는 고성장과 이를 받쳐주는 금융시스템간의 선순환 연결고리가 끊어져 지금은 ‘아노미 상황’에 빠져있다. 어느 누구도 현재 미국경제의 현상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며, 새로운 분석의 ‘틀’도 없다. 그렇다면 FRB의 통화정책이 아무리 완벽하다 할지라도 경기를 당장 소생시킬 가능성은 적어지는 것이다.

그는 연착륙 통해 불사조가 될 것인가

사실 중앙은행 총재가 그 나라의 경제를 모두 책임질 필요도 없고, 또 그렇게 할 수도 없다. 영국은행의 부총재인 머빈 킹은 “성공적인 중앙은행 총재가 되는 길은 게임을 공정히 관리하는 심판의 구실에 충실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 이상 나아가서는 안된다는 뜻도 담겨 있다. 그렇지만 이것이 그린스펀에게 면죄부를 주는 것은 아니다. 미국인들은 그를 단순한 심판으로 보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그린스펀이 경기침체와의 전쟁에서 맥없이 주저앉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일찍이 1987년 10월27일 미국 증시의 블랙 먼데이, 1998년 8월17일 러시아의 모라토리엄(국가부도) 선언에 따른 세계 금융시장의 동요 등 전세계적인 대형 금융참사를 효과적으로 수습한 경험이 있다.

그가 비록 최대의 위기를 맞고 있지만 미국경제를 연착륙시키는 데 성공한다면 ‘역시 그린스펀’이라는 찬사가 다시 쏟아질 것이다. 마치 월가의 전설적 투자가 워런 버핏이 닷컴 열풍이 불었을 때 닷컴주를 외면하다 한물간 노인 취급을 받았지만 결국 닷컴의 거품이 걷힌 지금, 최후의 승자로 미소짓듯 말이다. 그린스펀은 과연 불사조처럼 부활할 수 있을까. 결국 문제는 ‘미국 경제의 연착륙’이다.

박형기/ 머니투데이 국제금융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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