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비스 기반 부실해 손쉽게 발신자 감춰… 사업자 위주 정책에 개인정보 오용될 수도
5월1일부터 전화통신 문화에 큰 변화가 일어나게 됐다. 유무선 통신서비스사업자들이 새로 선보이는 서비스 하나가 변화의 계기이다. 전화를 건 쪽의 번호를 받는 쪽 전화기에 나타날 수 있게 해주는 ‘발신자번호표시’(Caller ID, CID) 서비스가 바로 그것이다. 통신 사생활 보호대상을 발신자에서 수신자에게 확대한다는 뜻으로, 정부와 통신사업자들이 지난해 7월부터 준비해온 서비스이다. 4월 한달 동안 시범서비스를 실시했고, 5월1일부터는 신청자들에게 돈을 받고 서비스해준다.
유선전화와 이동전화 모두 자기가 현재 가입해 있는 사업자에 전화나 인터넷으로 신청하면 곧바로 서비스된다. 이동전화는 현재 사용중인 모든 단말기에서 발신번호가 표시될 수 있다. 유선전화는 액정표시장치가 부착된 새로운 단말기가 필요하다. 기존에 나와 있는 전화기에 액정표시장치가 있더라도 처음부터 발신번호표시 기능이 없기 때문에 무용지물이다. 전화기를 통째로 바꾸기가 곤란하면 별도의 표시기능장치만 구입(3만∼7만원선)해 연결하면 된다.
불가능회선 지역 많아… 공중전화는 속수무책
정부나 통신사업자들은 이 서비스를 통해 전화상의 폭언, 협박, 희롱 따위가 크게 줄어들 것으로 보고 있다. 전화를 통한 사생활 침해를 줄이려고 통신사업자들이 95년부터 ‘발신번호확인서비스’를 해주고 있지만 이번에 시작하는 것과는 큰 차이가 있다. 번호확인서비스는 통화가 끝난 다음에, 그것도 사생활 침해 사실을 입증하는 자료를 갖춰야 하는 등 아주 번거로운 신청절차를 거쳐야 했다. 이와 달리 표시서비스는 걸려오는 전화번호를 모두 드러나게 해 전화폭력의 사전예방 기능을 할 수 있다. 단말기에 표시되는 전화번호를 보고 아예 수화기를 들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순기능은 이론적으로만 가능하다. 완벽하게 서비스를 할 수 있는 기반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데다 전화 거는 쪽이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자기정체를 숨길 수 있게 돼 있다. 우선 유선전화는 서비스가 안 되는 지역이 많다. 가장 가입자 수가 많은 한국통신의 경우 전체 회선의 35.1%인 865만 회선이 발신번호 표시기능을 수행할 수 없다. 낡은 반(半)전자교환기와 초기의 전(全)전자교환기가 배치된 지역이다. 이런 서비스 불가능회선은 대도시일수록 비중이 높고 특히 서울지역은 51.6%에 이른다. 발신번호표시가 불가능한 지역의 유선전화 이용자는, 자신의 전화번호만 제공하고 상대방 전화번호는 원천적으로 알 수 없는 처지에 놓인다. 심각한 지역차별이다. 이 문제가 해결되려면 한국통신이 반전자교환기와 구식 전전자교환기를 모두 교체하는 2004년 말까지 기다려야 한다.
구내교환기를 별도로 사용하는 대형건물의 전화(‘0’ 또는 ‘9’번을 눌러 발신하는 전화)는 나가는 전화번호가 아예 찍히지 않거나 엉뚱하게 표시된다. 전화를 받은 쪽에서 발신자 표시를 보고 다시 전화를 걸었는데 안내메시지만 나오는 경우는 대부분 구내교환기가 설치된 곳이다. 통신사업자들은 기술적으로 당분간 해결방법이 없다고 한다. 전국에 있는 모든 건물의 구내교환기를 손봐야 하기 때문이다.
이 밖에 공중전화로 하는 전화폭력도 발신자를 추적할 방법이 없다. 요즘 이용객들이 크게 늘고 있는 인터넷전화로 발신할 경우에도 번호가 표시되지 않는다. 또 통신사업자들이 전화수신자의 사생활 보호 목적으로 발신번호표시서비스를 실시하면서, 발신자가 자신의 전화번호를 수신자에게 전달되지 않도록 미리 조정할 수 있는 서비스(Call Blocking)도 동시에 제공해 앞뒤가 뒤죽박죽이다.
사업자들 요금 챙기고 단말기 회사 살판나
이처럼 명분도 살리지 못하고 시행기반도 갖춰지지 않은 서비스를 왜 도입한 것일까? 시민단체들은 “소비자를 무시한 또다른 행정편의주의와 사업자 위주 정책의 전형”이라고 비판한다. 우선 통신사업자들에게는 큰 신규투자 부담도 없이 요금수입을 늘릴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애초 이 서비스에 대한 요금은 유선이 월 2500∼2800원, 무선은 3천∼3500원으로 책정됐다. 시내전화 가입자 수를 늘리기 위해 가격차별화 정책을 쓰고 있는 하나로통신이 지난 4월15일 기습적으로 발신번호표시서비스 요금을 월 1천원으로 내리겠다고 발표했지만, 다른 통신사업자들은 아직 정부와 여론의 눈치만 살피고 있다. 특히 SK텔레콤, LG텔레콤, 한국통신프리텔 등 3개 이동통신사업자들은 발신번호표시서비스에 실시에 따른 신규투자 비용이 다 합쳐봐야 500억원 남짓에 불과한데도 유선전화보다 1천원 더 비싼 요금을 책정해 가입자들로부터 불만의 목소리가 높다. SK텔레콤 한 회사만 하더라도 가입자가 1300여만명이고 이 가운데 절반만 발신번호표시서비스를 신청하면 최하 월 210억원의 신규 수입을 잡게된다.
참여연대 작은권리찾기운동본부(실행위원장 김남근 변호사)는 “발신번호표시 요금은 또다른 ‘가입자 등치기’이며 뚜렷한 근거를 내놓지도 않은 채 사업자들끼리 협의해 일방적으로 요금을 책정했다”며 공정거래위원회에 담합의혹 조사를 요청했다. 참여연대 안진걸 간사는 “하나로통신은 담합을 거부한 것으로 볼 수 있지만 다른 사업자들은 공동광고 등 여러 가지 행태로 봐서 담합을 사전모의한 흔적이 있다”고 주장했다.
통신사업자들은 “요금이나 서비스에 불만이 있으면 신청 하지 않으면 될 것 아니냐”고 반문한다. 하지만 통신서비스는 전형적인 공급자 우위의 시장이다. 공급자가 새로운 부가서비스를 내놓으면 그게 수요의 표준이 되는 경향이 강하다. 가격 변동이 수요에 큰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공급자가 마음만 먹으면 수요를 조절하기가 쉽다. 여기서 수요자들의 편인은 별로 따지지 않는다. 특히 LG텔레콤은 4월중 무료서비스기간에 전체 가입자들에게 발신번호표시서비스를 제공한 다음 나중에 별도로 해지신청을 하지 않으면 자동적으로 요금을 부과하기로 해 빈축을 사고 있다.
단말기 제조회사들에게도 발신번호표시서비스가 ‘가뭄의 단비’이다. 단순통화기능만 있는 유선전화기는 공급포화에다 이동전화의 급신장, 또 열악한 부가서비스 등으로 98년 이후 시장규모가 급감하는 추세이다. 97년 유선전화 단말기 매출규모가 2795억원까지 커졌다가 98년에는 2165억원, 99년에는 1717억원 수준으로 떨어졌다. 하지만 발신번호표시서비스 도입시 기존 전화기 보유자들의 대체구입 등으로 액정화면을 갖춘 고기능 전화기의 신규수요가 발생해 2003년에는 유선전화기 시장이 3980억원으로 2000년(1800억원) 대비 121%나 증가한다는 게 정보통신부의 예측이다. 정통부 스스로 발신번호표시서비스 기본계획안을 마련하면서 ‘침체국면에 있는 유선전화기 시장의 판로개척’이 도입취지 가운데 하나임을 강조했다.
서비스 기반 넓어지면 사생활 침해 부각
중장기적으로 서비스 이용기반이 넓어지면 상업적 목적으로 개인정보가 광범위하게 활용될 가능성도 있는 것도 큰 문제이다. 발신번호표시서비스는 보험회사나 유통회사 등 텔레마케팅을 적극 활용하는 기업들에 아주 반가운 소식이다. 잠재고객의 데이터베이스를 효과적으로 구축할 수 있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서울여대 우지숙 교수(영상정보학과)는 “집에서 받는 귀찮은 전화들은 폭력전화보다 원하지 않는 마케팅 전화가 더 많다”면서 “발신번호표시서비스의 도입은 이런 전화들을 장기적으로 증가시켜 민간사업자들이 개인정보를 마케팅에 이용하면서 일어나는 사생활 침해문제를 더욱 심각하게 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민간사업자들이 전화발신자의 정보를 불법적으로 이용하거나 통합관리를 하고 있다는 증거를 얻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사업자들 처지에서 발신자표시서비스를 통해 고객명부를 확보하게 되면 상업적인 동기를 갖고 이를 활용할 유혹은 얼마든지 느낄 수 있나는 점이다. 우 교수는 “문제는 발신자의 처지에서 나쁘다 좋다의 문제를 떠나 고객의 동의를 받지 않은 상태에서 정보를 이용한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박순빈 기자 sbpark@hani.co.kr

사진/발신자를 표시해 전화폭력 추방한다? 발신번호표시서비스는 액정화면을 갖춘 고기능 전화기로 제공된다.(이용호 기자)

사진/이동통신 사업자들은 별도의 비용부담 없이 요금인상 효과를 누리려 하고 있다. 이동통신 요금 인하를 주장하는 시민들.(박승화 기자)

사진/공중전화는 발신자를 추적할 방법이 없다.(강창광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