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비즈니스사업 진출한 재벌가의 무책임 행태… 이재용씨의 닷컴 퇴각은 무엇을 말하나
‘No risk, High return.’(무위험 고수익)
벤처는 위험을 무릅써야 하는 사업이다. 벤처천국이라는 미국에서조차도 100개의 벤처기업이 생기면 성공하는 데가 고작 5개 정도에 불과하다. 그래서 벤처사업가가 되려면 ‘High risk, High return’(고위험 고수익)이라는 투자의 기본원칙을 달게 받아들여야 한다.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며 독특한 기술이나 사업모델을 만들어내면 가끔 성공을 거둘 수 있지만, 대부분 쪽박 찰 각오를 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국내 재벌 2, 3세들의 벤처투자기법은 사뭇 다르다. 별로 땀을 흘린 흔적이 보이지 않는데도 일약 ‘벤처산업의 선구자’로 부상했다가, 실패의 조짐이 보인다 싶으면 재빨리 위험을 다른 데로 옮긴다. 권한은 봉건시대의 군주처럼 휘두르다가도 경영실패에 따른 책임을 져야 할 상황이 닥치면 ‘자본주의의 기본원칙은 유한책임’임을 강조하는 재벌들의 습관은 디지털시대, 지식기반사회에서도 여전한 것 같다.
디지털 경제 리더 자임하며 너도나도 진출
국내 재벌 2, 3세들이 너도나도 ‘디지털 신경제의 리더’를 자임하고 나선 때가 있었다. (주)SK 최태원 회장, 코오롱그룹 이웅렬 회장, 현대산업개발의 정몽규 회장, 롯데그룹의 신동빈 부회장, 제일제당 이재현 부회장 등이 모두 인터넷 관련 벤처사업을 통해 아버지 세대의 기업모델에 혁신을 불러일으키겠다고 공언을 했고, 현대·기아차그룹 정몽구 회장의 아들 의선(31·구매담당 상무)씨나 대림산업 이준용 회장의 장남 해욱(33·상무)씨 등 30대 초반의 재벌 3세들도 경영일선에 등장하자마자 ‘벤처기업가’로 변신했다.
삼성 이건희 회장의 장남 이재용(33·현재 삼성전자 상무보)씨도 2000년 초 벤처열풍에 동참했다. 하버드 비즈니스스쿨에서 박사과정에 재학중이던 그가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나 삼성의 바깥에서 벤처그룹을 만들어 경영능력을 보여준다는 소문이 들리더니, 드디어 2000년 5월 ‘e삼성’과 ‘e삼성인터내셔널’이라는 벤처지주회사의 대주주(지분율 각각 60%, 55%)로 참여했다.
그뒤 e삼성은 삼성그룹 구조조정본부의 조직적인 지원을 얻어 벤처자회사들을 무서운 속도로 확장해, 불과 6개월여 만에 재용씨 산하에는 모두 16개의 기업을 거느린 ‘e삼성그룹’이 만들어졌다. e삼성그룹은 재용씨가 아버지의 뒤를 잇는 교두보가 되는 듯했다. 즉 얼마 동안 재용씨가 e삼성 대주주와 최고경영자로서 돈도 많이 벌고 디지털경영인으로서의 능력을 객관적으로 입증한 다음 삼성그룹의 총수로 자연스럽게 올라서는 수순을 밟는다는 게 삼성그룹 안팎의 예상이었다.
그러나 닷컴몰락이 전세계적으로 확산되자 이재용씨는 ‘e삼성의 총수’가 아닌 그룹의 주력기업 삼성전자에서 경영수업을 쌓는 것으로 방침을 바꿔버렸다. 삼성전자는 지난 3월9일 정기주주총회에서 이런 방침을 공식화한 다음 그 다음날 곧바로 이사회를 열어 재용씨를 기획담당 임원(상무보)으로 선임했다. 이어 삼성그룹 구조조정본부는 지난 3월27일 ‘그룹 내 e비즈니스사업 개편방안’을 발표했다. 이재용 상무가 보유하고 있는 인터넷 관련회사의 지분을 삼성그룹 계열사들이 인수한다는 게 이 방안의 골자이다. 다시 말해 재용씨가 e삼성으로부터 발을 뺀다는 것.
구체적으로는 국내에서 인터넷사업 인큐베이션과 투자를 담당해온 e삼성 지분 75%는 제일기획이, 아시아지역의 기업간 전자상거래(B2B)사업과 웹이이전시사업이 주업무인 e삼성인터내셔널의 지분 60%는 삼성SDS·SDI·전기가 인수하고, 온라인금융회사인 가치네트의 지분 57.2%와 전자보안솔루션업체인 시큐아이닷컴 지분 45.5%도 삼성증권·카드·캐피탈 등 금융계열사가 나눠 인수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e삼성 산하의 오픈타이드, 엔포에버, 크레듀, 뱅크풀, 이니즈, 에프엔가이드, 인스밸리 등 나머지 닷컴기업들도 줄줄이 재편될 운명을 맞았다. 삼성은 계열사들의 총인수대금은 초기투자금 505억원을 조금 넘는 511억원 규모이며, 주당 인수가격은 외부 회계법인이 미래기업가치를 감안하지 않고 아주 보수적으로 세법상 평가기준을 적용해 산출했다고 설명했다.
e삼성은 낙동강 오리알 신세로 전락
재용씨가 관계단절을 선언하는 동시에 삼성계열사마저도 인수에 나서지 않는 바람에 ‘낙동강 오리알 신세’로 전락한 e삼성 관계사도 있다. 유무선 인터넷통신의 각종 개인메시지 종합관리서비스를 제공하는 이누카는 4월1일부터 서비스를 중단하고 청산절차를 밟고 있다. 이누카는 지난해 4월 삼성그룹 구조조정본부에서 태스크포스팀을 구성해 발족한 e삼성의 투자1호 기업이다. 지금까지 약 100억원을 투입해 사업기반을 만들어가고 있으나, 설립을 주도했던 구조조정본부에서 수익모델이 불투명하다며 이미 지난 2월 퇴출결정을 내려버린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 구조조정본부는 재용씨의 지분정리 배경에 대해 “그룹 e비즈니스사업의 도입기를 끝내면서 각사의 수익성을 강화하고 시장경쟁력 확보를 위해 독자적인 의사결정과 자율경쟁을 촉진한다는 차원에서 이뤄진 것”이라고 설명했다. 다르게 해석하면 ‘앞으로 독자적인 수익모델을 갖추지 못하는 인터넷 관련기업은 언제든지 사업을 접겠다’는 얘기이다. 이렇게 하면 경영실패에 따른 책임이 대주주에게 돌아오는 것이 당연하겠지만, 재용씨는 지분을 빼기로 했기 때문에 이런 골치아픈 상황을 피할 수 있게 됐다.
하지만 벤처업계와 금융시장으로부터 쏟아지는 비난의 화살이 만만치 않다. 벤처업계에서는 재용씨의 지분 철수와 사업 축소가 다른 재벌기업으로 확산돼 일대 ‘피바람’이 몰아닥칠 것으로 우려하며 ‘배신감을 느낀다’, ‘우리가 싸구려 매춘부냐’는 등 험악한 소리들이 연일 터져나오고 있다. 국내 금융시장을 들었다 놓았다 하는 외국인들의 시각은 더욱 냉소적이다. 영국의 경제지 <파이낸셜 타임스>는 지난 3월28일치 칼럼을 통해 이렇게 비꼬았다. “닷컴기업가는 고전하는 자기사업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 쉽다. 그것은 아빠(daddy)의 기업에 팔아버리는 것이다. 이것이 한국 삼성그룹의 왕위계승자인 이재용씨가 찾아낸 답이다. 요즘 하버드 비즈니스스쿨에서는 이런 것을 가르치는가?”
책임지지 않는 재벌 “시장 요구 따랐다”
메릴린치증권도 삼성SDI분석 보고서를 통해 “e삼성인터내셔널과 같은 벤처회사는 현재 순자산가치에서 30∼40% 할인돼 팔리고 있다”면서 SDI가 재용씨로부터 주당순자산가치를 기준으로 삼아 인수하는 것은 적절하지 못한 것으로 평가했다. WI카증권은 제일기획의 주가전망 분석보고서에서 “e삼성 지분 75%를 매입하기로 한 이유를 투자자들에게 이해시키기 힘들다”라며 “제일기획의 현금능력으로 봐서 지분매입 대금 208억원은 미미하지만 삼성의 기업지배구조상 문제점이 다시 한번 드러났다는 점에서 단기적으로 주가가 20∼25% 하락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아니나 다를까. 재용씨의 e삼성 관계사 지분을 계열사에 넘기기로 발표한 다음날 주식시장에서 삼성의 상장계열사 주식은 대부분 외국인들의 대규모 매도공세로 큰폭의 하락세를 기록했다.
“황태자 위해 계열사는 망가져도 좋다”
이런 ‘시장의 평가’에 대해 삼성은 한마디로 ‘억울하다’는 반응이다. 우선 재용씨의 지분정리는 그동안 정부와 일부 시민단체가 제기해온 부당내부거래의 의혹을 해소한다는 점에서 ‘시장의 요구’를 들어준 것이라고 삼성은 주장한다. 삼성 구조조정본부 관계자는 “재용씨가 대주주로 참여하고 있는 이유 때문에 공정거래위원회가 사업초기부터 e삼성을 부당내부거래 조사의 표적으로 삼았고 참여연대 장하성 교수도 지분정리를 계속 촉구해오지 않았느냐”며 ‘외압론’을 펴면서 “그룹 내부적으로도 계열사간 영역충돌 가능성이 많아 지분정리가 불가피했다”고 말했다. 실제로 e삼성 관계사들이 본격적인 영업에 나서면서 삼성물산, 삼성SDS, 유니텔 등 그룹 내 관계사들과 집안싸움을 벌인 사례도 있다. 얼마 전 삼성물산이 운영하는 전자상거래사이트 삼성몰의 고객관리시스템(CRM) 입찰에서, 그룹사의 e비즈니스주도권 장악을 노리던 오픈타이드(e삼성인터내셔널 자회사)가 먼저 응찰을 했고 그러자 그간 삼성몰 시스템구축과 운영 등을 맡아온 삼성SDS가 ‘원래 우리 것’이라며 맞대응을 해 날카로운 신경전을 벌였다.
삼성은 재용씨의 지분정리를 두고 ‘경영실패’ 운운하면서 마치 e삼성의 전반적인 사업이 전반적으로 위축될 것처럼 보는 시각도 잘못된 것이라고 못박는다. 대부분 e삼성 관계사들은 아직 매출이 발생하지 않은 초기 시작단계인데 벌써 경영의 성과를 논하는 것은 ‘결혼을 하지 않았는데도 아들 내놓아라’격이나 마찬가지라는 주장이다. 삼성 구조조정본부 관계자는 “더구나 이재용 상무는 e삼성의 대주주였지만 실제 경영과는 관계가 없고 지금까지 e삼성은 전문경영인체제로 운영돼왔다”면서 “지분을 계열사로 재편한 것 또한 기존의 오프라인과 온라인사업을 융합발전시켜 강력한 수익모델을 만들어 나가겠다는 의지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요컨대 재용씨의 지분정리로 계열사간 영역충돌과 부당내부거래 의혹의 해소함으로써 e삼성관계사들이 그동안 위축되었던 홍보·마케팅 활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올해 많은 사업분야에서 흑자달성도 가능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래도 이재용씨의 지분정리 과정은 재벌기업들의 고질적 병폐인 ‘오너 개인의 이익과 위험분산을 위해 계열사가 희생하는 모습’의 전형이라는 의혹을 충분히 살 만하다. 무엇보다 계열사가 재용씨 지분을 인수하는 가격의 적정성이 문제이다. 삼성은 505억원을 투자해서 511억원을 받고 넘기니까 수익률이 1%에도 못 미치고, 미래가치까지 감안하면 계열사가 덕보는 장사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는 금융상식을 무시한 주장이다. 재용씨가 e삼성에 투자한 시점은 지난해 초, 그러니까 코스닥지수가 200을 웃돌 때이다. 지금 코스닥지수는 50∼70선에서 맴돌고 있다. 어느 정도 기업가치가 검증된 코스닥등록기업들조차도 이처럼 주가가 반의 반 토막난 지경인데, 아직까지 매출성과가 미미하고 수익모델도 불투명한 닷컴기업에 투자를 해 1년도 안 돼 1%의 수익률을 거뒀다면 세계 최고수준의 펀드매니저에 오를 만하다. 삼성은 주식가치를 외부 회계법인의 공정한 평가에 따랐다고 하지만, 구체적으로 공개를 꺼리고 있으며 회계전문가들은 “매출이 미미하고 이제 겨우 1년치 결산회계자료를 작성하는 단계에 있는 기업의 주식가치는 평가의뢰자의 주문에 따라 고무줄처럼 늘었다 줄었다 할 수 있다”고 말한다.
삼성 구조조정본부가 수익이 나지 않을 것 같은 일부 e삼성 관계사들은 통폐합하거나 청산작업에 들어간 것도 앞뒤가 맞지 않는 대목이다. 삼성 스스로 인정했듯이, 대부분 출범한 지 채 1년도 안 된 e삼성 관계사들에 대해서는 경영이 실패했느냐, 아니냐를 논하기 어려운 단계이다. 더구나 이재용씨는 지난해 7월 한 국내일간지와 인터뷰에서 “일반 닷컴기업은 헝그리 정신이 있는 벤처들이 해야 할 몫이지만 장기적으로 큰 투자비용이 들어가는 사업은 자본력이 튼튼한 기업의 참여가 불가피하다고 본다”고 주장했다. 삼성은 일확천금을 노려 무분별하게 닷컴영역을 침범하지 않고, 장기적인 안목으로 벤처투자에 나서겠다는 얘기이다. 그러던 대주주가 느닷없이 지분을 빼고, 그룹 구조조정본부는 수익모델이 불투명한 기업을 6월 말까지 정리하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청산절차를 밟고 있는 이누카의 한 직원은 “애초 3년 정도 적자를 감수하고 사업을 계속하기로 해놓고서 계열사에 지분매각이나 M&A 등 다른 해결방안 없이 청산하기로 결정한 데 배신감을 느낀다”라고 말했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으면 그만인가
‘대박 터지면 좋고 안 되면 계열사로 떠넘기’는 벤처투자방식은 사실 다른 재벌 2, 3세들도 마찬가지이다. 전경련의 e비즈니스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는 이웅렬 코오롱그룹 회장은 개인돈으로 지난해 3월 코스닥기업 동특의 실권주 69만7천주를 액면가에 인수해, 지난해 7월과 9월 말 코스닥이 곤두박질치는 시점에 장외에서 코오롱정보통신 등 계열사에 약 15만주를 팔아넘겼다. 이때 매도가격은 주당 1만5천∼5만원, 투자원금을 회수하고 수억원의 시세차익을 챙겼다.
벤처 컨설팅 및 인규베이팅회사인 AT벤처의 배재광 사장은 “재벌들이 벤처사업환경이 좋을 때에는 오너 2, 3세 성공신화의 발판으로 활용하다가 환경이 나빠지니까 무더기로 발을 빼는 행태를 보여주고 있다”면서 “재벌 2, 3세들이 돈이 많아서 e비즈니스에 뛰어드는 것은 좋지만 우선 사업추진방식부터 달라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순빈 기자 sbpark@hani.co.kr

사진/삼성 황태자 이재용(가운데)씨가 ‘벤처기업가’에서 그룹 후계자로 돌아가 경영수업을 받고 있다. 경기도 용인 인력개발원에서 신임 임원교육을 받고 있는 이재용씨.

사진/디지털 경제의 리더를 꿈꾸는 재벌가의 사람들.

사진/재벌들의 벤처가 흔들리고 있다. 아시아 B2B벤처스 컨소시업 조인식에 대거 참석한 재벌 2·3세들.

사진/“삼성이 결정하면 닷컴은 망한다.” e삼성 투자1호 기업으로 출발한 이누카는 서비스를 중단하고 청산절차를 밟고 있다.(DOT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