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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미래가 없었던 ‘신경제 효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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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1-03-20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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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의 장기적 내제가치 외면한 호황… 이유있는 붕괴에서 무엇을 배울 건가

90년대 미국경제의 장기호황은 신경제론을 낳았다. 과거 경기순환 경험에 따르면 완전고용이 지속될 경우 인플레이션이 나타날 수밖에 없는데 미국은 90년대 내내 완전고용의 호황을 구가하면서도 물가안정을 유지했다. 따라서 신경제론자들은 미국경제가 90년대에 정보산업을 중심으로 과거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경제체제에 진입했다고 주장했다. 즉 미국이 정보통신(IT)산업에 집중 투자하면서 높은 생산성 향상을 달성했고 이것이 인플레이션 압력을 흡수했기 때문에 장기호황 속에서도 물가안정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구조조정 통한 단기적 수익에 치우쳐

사진/미국 대기업들은 주식 가치 위주의 경영에 치중했다. 지난해 뉴욕 증권거래소 폐장 모습.(AFP 연합)
이런 신경제론이 아직도 유효하다면 사상 최고의 경상수지 적자를 내고 있고 미국 주식시장이 요동을 치고 있는 것을 사실 크게 걱정할 필요가 없다. 낙관론자들이 말하듯이 미국경제의 장기호황이 거품이 아니고 실물경제의 기초조건(Fundamentals)에 근거한 것이라면 경착륙의 가능성은 희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경제론이 미국경제의 장기호황을 설명하는 전부가 아니라는 것은 신경제를 외쳐댔던 월가의 애널리스트와 펀드매니저들이 더 잘 알고 있다. 미국식 신경제는 밝은 측면과 함께 어두운 측면도 있는 것이다.


90년대 미국경제의 장기호황은 80년대 구조조정(Restructuring)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70년대 미국경제가 장기불황에 놓였을 때 미국대기업들은 사실 심각한 비효율을 안고 있었다. 대표적 사례가 석유회사들이었다. 미국 석유회사들은 70년대 유가상승에 힘입어 막대한 여유자금을 보유했다. 하지만 중장기적으로 석유수요가 크게 줄어들 것으로 예상돼 고유사업에는 투자를 늘리지 못하고 유통업, 부동산업, 광산업 등에 진출하는 다각화전략을 추구했다. 경험과 전문성 없는 분야에 대한 이런 무분별한 다각화가 심각한 비효율을 초래했다. 당시 미국대기업 주주들은 경영자가 기업을 비효율적으로 운영하고 있어도 주식을 매각하는 것 외에 별다른 행동을 취할 수 없었다. 이 때문에 주가가 떨어져도 석유회사들은 개의치 않았다. 여유자금이 풍부해 주식시장을 통해 자금을 조달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80년대 들어서면서 적대적 기업인수합병(M&A)이나 차입을 통한 기업매수(Leveraged Buy-out)와 같은 주주자본주의의 반격이 시작된다. 즉 기업인수자가 등장해 공개매수를 통해 다수의 지분을 확보한 다음 기존 경영진을 몰아내고 비효율적 사업부문을 매각하고 여유자금은 주주에게 배당함으로써 주가를 올렸다. 이처럼 80년대 미국의 구조조정은 경영효율이 낮은 기업을 정리함으로써 구조조정을 촉진하고 자원을 IT산업과 같은 고수익 부문으로 이동시키는 자원배분 구실을 해 경제 전체의 효율을 높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 기업인수자들은 장기적 기업경영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구조조정을 통해 주가를 상승시킨 뒤 매각함으로써 시세차익을 얻으려는 목적으로 인수·합병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 결과 안정적 노사관계나 노동자들의 숙련향상과 같이 기업의 장기적 생산성 증대에 필요한 투자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오히려 이들은 장부상 비용만 늘리고 단기적 주가상승에 별 도움이 안 되는 무형자산은 파괴시키는 구조조정을 추구했다. 따라서 80년대 이후 정리해고, 임금 및 기업 내 근로복지 삭감, 정규직 축소 등에서 나타나듯이 노동배제적 구조조정은 자본수익성을 높였지만 그중 상당부분은 기업의 비효율을 제거한 데 따른 것이라기보다는 노동자 소득을 자본투자자에게 이전시키는 재분배 과정에 의한 것이었다. 이게 바로 미국경제가 장기호황을 누리면서 20 대 80의 신자유주의적 사회로 나간 배경이다. 80년대 구조조정을 거친 뒤 90년대 들어서 미국대기업 경영자들은 철저하게 주식가치 위주의 경영을 추구하는 주주자본주의를 확립했다. 그런데 주가는 기업의 장기수익성, 즉 기업의 장기적 내재가치를 반영해 결정되기보다는 단기수익성에 크게 좌우되었기 때문에 기업경영도 단기업적과 주가극대화에 초점을 맞추게 되었다.

실물부분에 투자하지 않는 주주자본주의

사진/미국경제의 장기호황은 거품이었나. 나스닥 지수가 2000포인트 아래로 떨어진 전광판.(AP 연합)
이와 같이 단기주의(Short termism) 문제가 발생하는 근본적인 원인은 ‘정보의 비대칭성’ 때문이다. 하버드대학의 마이클 포터 교수는 단기주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기업의 장기적 내재가치가 우수하다는 것을 외부주주가 이해할 수 있도록 기업의 내부정보를 공개해야 하지만, 공개되는 순간 대부분의 정보자산 가치가 파괴되기 때문에 외부주주들에게 정보를 완벽하게 공개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했다. 따라서 주식시장의 외부투자자들은 기업의 장기적 내재가치를 제대로 알 수 없기 때문에 기업의 단기성과를 기준으로 투자를 하게 되고 주가는 기업의 장기적 내재가치로부터 유리될 수 있는 것이다. 게다가 클린턴 행정부 때 재무부 장관이기도 했던 서머스(Summers)의 ‘행동금융학’(Behavioral finance)에 관한 논문에 따르면, 투자자들은 다른 투자자의 행동을 주시하고 뒤따르는 경향이 있어 주식시장이 군중심리에 따라 움직일 수 있다고 한다. 기업의 기초조건이 아니라 자신들의 신념이나 정서에 의존해 투자하는 투자자를 잡음거래자(noise traders)라고 하는데, 비합리적인 잡음거래자들의 임의행보(random walk)는 서로 상쇄되어 신고전파 경제학자들이 생각하듯이 주가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잡음거래자들의 ‘판단편의’(Judgement bias)가 한꺼번에 같은 방향이라면 잡음거래자들의 행동은 상관관계를 갖게 되어 주가가 한쪽 방향으로 폭등, 폭락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또 투자심리학에 따르면, 투자자는 다수 여론에 편승할 때 더 안심할 수 있기 때문에 대세만 좇는 경향이 있으며 기관투자가들도 이런 심리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정보비용 때문에 다른 투자자 행동을 뒤따르는 것은 경제적 기초조건 분석에 근거한 투자방식에 견줘 값싼 대안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므로 90년대 내내 미국 대기업들이 주식가치 위주의 경영을 하고 미국 주가지수는 계속해서 상승했지만, 이런 주가 상승이 과연 미국기업들의 장기적 내재가치 상승을 반영하는 것이냐, 혹시 거품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 끊임없이 제기되는 것도 충분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90년대 미국의 장기호황을 논할 때 많은 사람들(특히 한국의 경제전문가들)이 간과하는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다. 미국의 가계와 뮤추얼펀드, 연기금의 주식투자가 급증해 주식유통시장에서 수요는 엄청난 규모로 증가했는데도 주식공급물량은 별로 증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나스닥시장에서 많은 유상증자와 기업공개가 있었지만 실제로 1970년에서 94년까지 미국기업들의 주식발행을 통한 순자금조달(Net source of finance)은 -7.6%이었다. 즉 미국 주식시장 전체적으로 볼 때 기업공개나 유상증자에 의한 자금조달보다 자사주와 타사주 매입, 배당 등을 통해 기업잉여가 밖으로 유출된 규모가 더 컸던 셈이다. 단기주가 극대화가 경영목표인 주주자본주의에서는 주식시장 활황으로 유상증자가 가장 저렴한 자금조달 방식일지라도 경영자는 유상증자 선택에 신중하게 된다. 왜냐하면 유상증자로 유통시장에서 자사주 공급물량이 증가하게 되면 주가하락으로 연결될 가능성이 커지기 때문이다. 또한 정보의 비대칭성 때문에 외부투자자가 기업의 내재가치를 정확히 알기 힘든 상황에서 경영자의 유상증자 결정은 ‘경영자는 자사주가 고평가되어 있다고 판단하고 있다’는 신호를 외부투자자에게 전함으로써 주가하락으로 연결될 가능성이 커지게 된다. 이런 이유로 주가 상승에도 불구하고 주식공급물량은 별로 증가하지 않았던 것이다. 따라서 기업잉여의 상당부분이 실물부분에 투자되지 않고 M&A와 자사주 매입같이 기존 금융자산에 투자됨으로써 전체적으로 주식공급물량이 별로 증가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수요 공급의 원리상 미국 주가가 계속 상승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미국경제의 경착륙에 대비해야 한다

이처럼 미국 기업들이 잉여자금의 많은 부분을 실물이 아닌 금융자산에 투자한 것은 미국에서 장기호황에도 불구하고 인플레이션이 발생하지 않은 또다른 이유 중 하나이다. 미국 금융시장으로 다른 나라의 투자자들도 대거 몰려들어 자본수지 흑자를 유지하고 이를 바탕으로 한 달러강세도 수입물가를 낮추어 물가안정에 기여했다.

90년대 미국의 주가 상승은 기초조건의 변화에 일부 근거한 측면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투기적 거품의 성격도 분명히 띠고 있다. 가계저축률은 음(-)인데도 불구하고 주가상승에 의한 ‘부의 효과’(Wealth effect)로 미국 가계가 고소비를 했고 이에 따라 장기호황이 유지되었지만 이것은 분명 비정상적인 것이다.

미국모델이 세계기준이기 때문에 미국모델을 한국경제 개혁의 준거로 삼아야 한다는 사람들이 있지만 이들은 미국경제의 실상에 대해 면밀한 검토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한국경제에 끼칠 영향 때문에 우리는 모두 미국경제의 연착륙을 바라고 있지만 요망사항일 뿐 미국경제의 경착륙에 대비할 필요가 있다.

조영철/ 국회사무처 예산분석관·경제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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