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증시 추락 여파로 세계적 금융대란 우려… 국내 금융시스템 치명적 위기 맞을 수도
2001년 3월 셋째주. 주말을 빼면 불과 5일이지만, 전세계 금융시장이 연쇄적으로 대란에 빠진 역사적 기간이다. 미국 뉴욕증시가 하락세를 주도하기 시작한 뒤 일본과 유럽, 아시아 신흥공업국들의 증시가 한덩어리가 되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동반폭락을 이어갔다. 두달여 전까지만 해도 미국 증시의 침체는 단지 과도한 상승에 따른 자율조정으로 보는 시각이 우세했다. 그런데 지금은 세계적 금융대란과 경제공황의 전주곡이 아니냐는 우려가 점점 커지고 있다.
1929 9월3일 다우존스공업지수가 381로 최고점을 찍고 폭락세로 돌아선 것은 1930년대 대공황의 전주곡이었다. 이후 다우지수는 1932년 6월8일 최저점 41을 기록할 때까지 약 3년 동안 90% 가까이 떨어졌다. 이후 1929년에 기록했던 최고점을 회복한 것은 1954년 11월, 무려 25년이 걸렸다.
나스닥지수 1년 만에 60%나 떨어져
미국 신경제의 상징인 나스닥지수는 지난해 3월10일 5048로 최고점을 찍고 미끄러지기 시작해 1년 만에 60% 이상 떨어졌다. 대부분 투자자들이 심리적 지지선으로 여겨온 지수 2000선마저 붕괴됐다. 구경제를 상징하는 뉴욕증권거래소의 다우지수 역시 심리적 지지선인 1만선을 지키지 못하고 힘없이 무너졌다. 다우지수의 1만선 붕괴는 또다른 의미를 지닌다. 올 들어 미국 증시에서 기술주와 미디어주, 통신 및 인터넷주 등 이른바 ‘TMT’ 관련주식말고 나머지 전통기업들의 주식은 꾸준히 상승세를 기록하거나 하락폭이 그다지 크지 않아 부분적인 침체장의 모습을 보였던 뉴욕증시가 이제는 전 종목으로 하락세가 확산되고 있다. 그야말로 종목 구분없이 매도물량이 봇물터지듯 쏟아지고 있는 것이다.
앨런 그린스펀 미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이 지난 96년에 경고했던 주식투자자들의 ‘이성적 낙관’이 이제는 ‘비이성적 비관’으로 돌아섰다. 지난해 3월 이후 1년 동안 뉴욕증권거래소와 나스닥의 시가총액은 무려 4조달러나 줄었다. 미국 가구 수가 대략 1억 가구라고 치고 이들이 모두 직·간접적으로 주식에 투자하고 있다면, 지난 1년 동안 가구당 평균 4만달러(약 5천만원)씩 날린 셈이다.
FRB의 금리인하도 올 들어서는 약발이 잘 먹히지 않고 있다. 금리란 주식과 경쟁관계에 있는 투자수단인 채권의 수익률이다. 금리를 낮추면 채권값이 올라가(수익률 하락) 그만큼 투자이점을 상실하고 이에 따라 돈이 주식시장으로 몰리게 돼 당장 증시부양 효과를 낸다. 그러나 급격한 경기하강기에는 별 소용이 없다. 지난 1월3일 FRB가 0.5%포인트 금리를 내리자 나스닥지수는 하룻만에 14%나 폭등했지만 한달여 만에 그만큼 떨어졌다. 미국 기업들의 주가에 여전히 거품이 남아 있다는 투자자들의 우려 때문에 금리인하가 하락추세를 뒤집지 못한 것이다. 현재 S&P500지수에 편입된 종목의 평균주가수익비율(PER·주당순이익 대비 주가수준)이 24인데, 1871년부터 1995년까지의 평균은 14였다. 첨단 기술주들이 포진해 있는 나스닥 종목들의 평균PER은 163로, 아무리 미래 성장성을 감안하더라도 지나치게 높다. <비이성적 풍요>의 저자인 예일대 로버트 실러 교수는 “이런 과도한 주가수익비율은 아직도 미국 증시에 거품이 많다는 것을 보여준다”면서 “따라서 투자자들의 간절한 희망에도 불구하고 FRB의 금리인하는 당분간 장세를 반전시키지 못할 것”이라고 단언했다.
신경제를 무너뜨린 미국의 구조적 결함들
지난 10년 동안 ‘인플레이션 없는 경제성장’을 누려온 미국의 신경제는 정보통신 기술의 발달이 기본동력이지만, 사실 주가의 중장기상승기조가 깨지면 무너질 수밖에 없는 구조적 결함을 지니고 있다.
지난해 미국 가계의 평균저축률은 -6%이다. 벌어들인 소득보다 지출이 더 많다는 뜻이다. 이렇게 되면 빚이 늘어날 수밖에 없지만 주가가 계속 올라 자산소득이 늘어남으로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주가가 정점일 때인 지난해 3월에 미국 가계의 가처분소득에서 주식이 차지하는 비중은 평균 175%에 이를 정도였다. 실제로 그 이전까지 주식시세가 폭발적인 상승세를 이어감으로써 주식을 가진 미국 소비자들에게는 소득을 초과하는 지출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나스닥지수는 지난해 3월까지 5년 동안 6배나 올랐다. 만약 92년에 아메리칸 온라인(AOL), 야후, 아마존, atHOME,eBAY 등 5대 인터넷기업들의 주식들에 각 1천달러씩 투자했다면 내내 놀고 먹었더라도 2000년 3월에는 100만달러를 거머쥘 수 있었다.
기업들도 마찬가지였다. 높은 소비수요를 봐서 해마다 두자릿수 이상의 매출성장을 기대하고 막대한 돈을 끌어들여 시설투자에 나섬으로써 부채가 급증했다. 얼마 전 미국 상무부가 발표한 지난해 4분기 경상수지 적자는 1152억달러로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지난해 연간 경상수지 적자도 전년보다 30% 늘어난 4353억달러로 역시 사상 최고치이다. 이런 경상수지 적자를 고달러와 고주가를 바탕으로 한 외부자본유입을 통해 메웠다. 한마디로 미국의 기업과 소비자들은 스스로 상품을 만들거나 서비스를 생산해 얻은 성장이 아니라 금융자산을 뻥튀기해서 왕성한 성장세를 유지해온 셈이다.
미국 신경제의 선순환 효과는 대체로 이렇게 진행돼왔다. 정보통신 관련주식에 대한 투자자들의 기대와 확신이 증가함에 따라 사람들은 현재 소득보다 더 많은 소비를 하게 되고 이는 전반적인 경기를 부양시키며 결과적으로 기업들의 수익을 늘어나게 했다. 기업들의 수익 증가는 다시 주가를 끌어올림으로써 투자자들의 기대와 확신을 신장시키는 작용을 했다. 그런데 이런 선순환 고리가 멈춰버리면 어떻게 될까. 주가급락에 따른 자산의 감소로 개인소비와 기업의 설비투자가 줄고, 부실채권이 늘어난 금융기관은 대출을 회수하거나 줄이고, 신용경색으로 경기는 더욱 악화일로로 치닫고, 기업도산과 잇단 대규모 감원으로 실업자가 늘어나면서 소비수요가 더욱 위축돼 기업실적은 더 나빠지고, 이에 따라 주가는 바닥을 모르고 또 떨어지는 악순환고리에 빠져든다.
미국의 위기는 세계를 뒤흔든다
물론 미국경제가 이런 식으로 악순환의 늪에 빠져들 가능성은 희박하다. 그러나 미국경제의 경착륙(급격한 경기하강)은 가능성이 아니라 현실로 나타나고 있고, 이에 따라 전세계 금융시스템이 충격을 받고 있다. 미국경제는 지난해 여름까지만 해도 연 5%의 성장이 무난할 것으로 점쳤다. 그러나 4분기 경제성장률은 5년 반 만의 최저치인 1.4%에 그쳤다. 올 들어서도 경기하강이 지속되고 있다. 국제통화기금(IMF)이나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올해 미국 경제성장률을 2.5%선으로 예상하고 있는 반면에, 현재 미국 내 경제학자들 사이에는 1%대, 좋아봐야 2%선을 넘지 못한다는 전망이 압도적으로 우세하다. 문제는 미국기업과 가계의 과다부채이다. 신경제가 지속될 것으로 보고 무리하게 빚을 내 신규투자를 한 기업이나 자신의 벌이 이상으로 돈을 써버린 미국 소비자들에게는 이미 금융기관의 빚독촉이 시작됐다. 이에 따른 신용경색과 금융시스템 붕괴를 우려한 FRB가 올 들어 세 차례나 금리를 내렸지만 뚜렷한 개선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전세계 금융시스템은 거미줄처럼 얽혀 있다. 세계경제의 양대축인 미국이나 일본에서 발생한 금융악재는 97년 인도네시아나 타이 등 동남아국가에서 시작된 금융위기와는 비교할 수 없는 가공할 파괴력으로 전세계 금융시스템에 전염된다. 특히 한국의 경우 IMF사태 이후 자본시장 개방을 가속화해 외부의 조그마한 충격도 통제할 수 없을 지경에까지 와 있다. 국내 금융시장에서 ‘미국이 재채기를 하면 캐나다와 멕시코는 심한 몸살을 앓고 한국은 독감에 걸린다’는 얘기는 이미 구문이다. 밤새 나스닥시장의 등락이 그날 아침 곧바로 국내 주식시장에서 재연된다.
정부도 최근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는 세계 금융상황이 예상보다 훨씬 심각하다는 사실을 느끼고 있다. 재경부 관계자는 “국제금융시장이 이처럼 급박하게 돌아갈지는 솔직히 예상하지 못했다”며 “올해 거시경제 운용계획을 작성한 지 3개월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현재 미국경제와 국제금융상황을 봐서는 수정이 불가피하다”고 말했다. 당장 수출이 큰 타격을 받아 정부가 목표로 잡은 올해 100억달러 무역흑자 달성이 불투명하다. 재경부는 최근 ‘경기동향 설명회’에서 미국·일본의 경기둔화에 따른 직접적인 수출감소와 엔화가치의 하락으로 빚어지는 자동차, 기계, 전기전자 등의 수출가격경쟁력 악화를 우려했다. LG경제연구원도 미국의 경제성장률이 애초 예상치 2.5%에서 1%포인트 더 떨어지면 수출은 56억달러가 줄어들 것으로 추정하면서, 이보다 더 우려스러운 사태는 전세계적인 경기둔화로 전체적인 수출이 타격을 받아 경제성장이 정부목표치인 5∼6%선을 크게 밑도는 것이라고 밝혔다.
금융시스템 개편전략 전면 재검토 필요
그러나 정책당국은 그 어느 때보다 곤혼스럽다. 이미 국내 금융시스템에 대한 정부의 통제력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가령 전면적인 경기부양에 나서고 싶더라도 외국자본 눈치를 봐야 한다. 정부는 지난 3년 동안 유입된 650억달러의 외국인 직접투자는 경제회복과 구조조정의 밑거름이었는데, 섣불리 경기부양책을 썼다가는 외국인들이 구조조정을 포기하는 것으로 보고 자금이 한꺼번에 빼나가지 않을까 우려한다.
한신대 전창환 교수(경제학)는 “미국식 신경제가 붕괴되고 있는 마당에 연기금 주식투자 확대 등 증시부양을 통해 경제를 끌고나가는 정책은 자칫 그동안 쌓아놓은 성장기반을 송두리째 날려버릴 수도 있다”고 경고하면서 “우선 국제금융시장의 충격이 파급되는 경로를 차단하는 데 노력하고 중장기적으로는 무분별한 외자확대정책과 자본시장 중심의 금융시스템 개편전략을 전면 재검토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박순빈 기자 sbpark@hani.co.kr

사진/미국 신경제의 상징인 나스닥지수가 1년 동안 60%이상 떨어졌다. 투자자들의 심리적 저지선인 2천선이 무너진 전광판을 바라보고 있다.(AP 연합)

사진/전세계 금융시스템이 거미줄처럼 연결된 상태에서 미국 증시는 절대적 영향력을 발휘한다. 주가 동반하락에 휩싸인 일본의 증권시장.(AP 연합)

사진/주가 동반하락에 휩싸인 독일의 증권시장.(AP 연합)

사진/아시아 금융시스템도 홍역을 앓고 있다. 폭락을 거듭하는 홍콩증시의 투자자가 놀란 표정을 짓고 있다.(AP 연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