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실악순환 따른 구조적 장기불황 가속… 디플레이션으로 치달아 아시아권 긴장
‘긴 잠, 반짝 기지개, 다시 긴잠?’
요즘 일본경제 돌아가는 모습을 두고 하는 말들이다. 국내 금융시장에서는 미국경제의 경착륙 우려로 가뜩이나 잔뜩 주눅들어 있는 판에 ‘일본, 너까지…’하는 한숨들이 푹푹 터져나오고 있다. 도쿄발 ‘3월 금융대란설’로 국내 금융시장이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는 것이다.
지난 3월2일 도쿄증시에서 닛케이평균주가는 하루 만에 3.3%가 떨어져 1만2261.80엔에 장을 마감했다. 85년 7월 이후 15년 만에 최저치 기록을 갈아치웠다. 거품붕괴가 시작되기 전인 지난 89년 12월의 최고치(3만8915.87엔)에 견주면 3분의 1값에도 못 미친다. 특히 닛케이주가는 2월 말과 3월 초에 걸쳐 1주일 사이 낙폭이 무려 7%를 넘는다.
닛케이주가 1주 사이에 7%나 떨어져
다른 경제지표 역시 심각하다. 일본 총무성이 지난 3월2일 발표한 도쿄 소비자물가지수는 99.9. 지난해 12월에 견줘 1.1%가 떨어져 지난 71년 물가지수를 시작한 뒤로 한달 동안 사상최대 낙폭을 기록했다. 1년5개월 연속 물가가 떨어져 지금 도쿄물가는 6년 전보다 낮은 수준이다. 경제가 나아질 전망이 보이지 않으니까 기업들은 신규고용과 투자를 줄이고, 소비자들도 씀씀이를 줄이고 있다. 1월의 일본 산업생산은 전달보다 3.9% 줄었으며, 봉급생활자들의 한달평균 소비지출액도 33만3천엔으로 1년 전과 같은 수준이다. 1월 실업률은 4.9%, 실업자수 317만명으로 전후 최악의 수준이다. 지난해 금융기관들이 부실 기업대출 20조엔을 처리하면서 1만개 기업이 부도를 내고 쓰러지는 바람에 실업률은 5개월 연속 상승세이다. 그나마 성장을 뒷받침해줬던 무역수지도 올 1월에는 4년 만에 처음으로 적자로 돌아섰다. 이렇게 가다가는 물가하락과 마이너스 성장, 기업도산에 따른 고실업, 소비와 투자 위축이 맞물려 경제활동의 총체적인 축소인 ‘디플레이션’의 늪에 빠질 가능성이 높다. 90년대 초 부동산과 주식 등 자산거품의 붕괴로 시작된 일본의 구조적 장기불황은 지난 99년 4월부터 지난해 9월까지는 뚜렷한 회복조짐을 보여왔다. 지난해 2분기에는 2.4%의 성장률을 기록해 일본국민들 사이에 ‘드디어 10년 불황을 벗어나는 것 아니냐’는 기대를 낳기도 했다. 그래서 일본 정부는 지난해 하반기 들어 공공투자를 대폭 줄이고, 중앙은행인 일본은행은 99년 초부터 시행해온 ‘제로금리 정책’(콜금리를 0.02%선에서 억제)을 벗어던지고 금리인상을 단행하기까지 했다. 10년 불황기 동안 경기부양에 힘쓰다 누적되어온 600조엔대의 재정적자를 줄이는 동시에 경기상승 속도를 조절하기 위한 조처였다. 그러나 지금 돌이켜보면 이 조처는 ‘떡 나오기도 전에 김칫국부터 마시다가 낭패를 자초한 꼴’이 됐다. 일본경제 전문가들은 지난 10년여년 동안 경제를 짓눌러왔던 금융부실과 기업부실의 확대재생산고리를 깨끗이 정리하지 못한 가운데 일시적 청신호만 보고 들떠 있다가 외부충격에 의한 순환적 경기후퇴가 겹쳐 일본경제가 다시 위기에 빠진 것으로 진단한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이홍배 전문연구원은 “지난해 일본의 반짝 경기상승은 정보통신분야의 수출증대와 신규 투자확대가 큰 기여를 했는데 하반기부터 미국을 중심으로 정보통신시장이 급랭하면서 일본경기도 타격을 받게 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일본경기의 하강신호가 본격적으로 나타난 것은 지난 2월 들어서이다. 일본정부가 지난해 4분기(9∼12월) 경제성장률이 마이너스 6%를 기록했다는 발표와 함께 세계양대 신용평가기관인 무디스와 S&P가 잇따라 일본국채의 신용등급을 한 단계 끌어내리자 주가가 폭락하고 미국 달러화에 대한 엔화가치도 급격히 하락하는 등 금융시장이 요동을 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일본은행(BOJ)이 2월에만 재할인금리를 두 차례나 내려(0.5%→0.35%→0.25%) 금융불안을 진정시키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지만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이번에는 시장의 신뢰가 문제다. 왜 불신을 받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영국의 신용평가회사인 피치IBCA가 명쾌하게 정리했다. 정부·통화당국 서로 “니 탓이오” 주장
피치IBCA는 무디스와 S&P보다는 조금 늦은 3월2일 일본의 국가신용등급 전망을 ‘안정적’에서 ‘부정적’으로 하향조정하면서 그 배경을 이렇게 설명했다. “디플레이션의 골이 깊어지고 있는 반면 일본은행의 대증요법은 더이상 민간경제를 자극하지 못하고 있고 당국은 거시정책적 대안이 부족하다. 게다가 정치·경제적 불확실성으로 인해 적정성장을 유지하면서도 정부부채를 해소하기 위한 구조개혁을 진행할 수 있을지 여부가 불투명한 상황이다.” 일본 정치권과 정부는 경제상황이 악화된 원인을 중앙은행이 지난해 8월 섣불리 금리인상을 단행한 탓으로 돌리며 추가금리 인하를 계속 요구하고 있다. 반면에 하야미 마사루 일본은행 총재는 “기업·금융구조조정의 실패가 문제의 근원”이라며 정부쪽을 질타하고 있다. 서로 ‘네탓’이라는 주장을 늘어놓고 있는 셈이다. 영국의 경제신문 <파이낸셜타임스>는 정책당국의 이런 책임공방을 보고 최근 “현재 일본경제는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지경에 빠져 있다”고 혹평을 하기도 했다.
일본경제의 만성적 위기는 실물과 금융부문의 부실악순환이 맞물려 돌아간다는 점에서 한국의 경제위기와 유사하다. 지난해 9월 말 현재 일본은행들의 전체 부실채권은 28조6천억엔으로, 총여신대비 6% 정도다. 하지만 한국의 은행들처럼 국제기준으로 자산을 분류하면 부실채권 규모는 81조9천억원, 부실여신비율은 12.1%에 이른다. 일본 금융시장에 나돌고 있는 ‘3월 대란설’은 은행들이 3월 말 결산을 앞두고 국제결제은행 기준 자기자본비율을 맞추기 위해 보유주식을 무더기 처분하고 대출금도 대거 회수해 기업들의 연쇄도산 사태가 벌어질 것이라는 내용이다. LG경제연구원의 이지평 연구위원은 “최근 일본통화당국이 이전보다는 훨씬 발빠르게 금융상황에 대처하고 있고 98년에 금융구조조정을 위해 조성한 공적자금 70조엔의 여유재원이 많이 남아 있어 ‘3월 위기설’은 기우에 그칠 것”이라면서도 “다만 기업이나 소비자, 투자자들의 심리적 불안 때문에 경기회복의 모멘텀을 상실해버리면 일본경기 침체가 장기화할 가능성도 있다”고 진단했다.
경제가 이런 일대 기로에 서 있는 마당에 정치권에서는 소모적인 정쟁에만 휩싸여 경제회생의 발목을 잡고 있는 모습도 한국과 닮은꼴이다. 일본 정부는 90년대에 9차례에 걸쳐 모두 110조엔의 재정을 투입해 경기부양을 시도했으나 모두 적절한 시기를 놓치거나 정치권 이해관계에 따른 비효율적 예산분배로 매번 경기진작에 실패했다.
위기의 원인 근본적으로 제거해야 한다
아무튼 일본경제의 침체가 장기화 조짐을 보이면, 국내 금융기관과 기업들도 대비책을 세워야 한다. 당장 엔화환율의 급등이 문제이다. 이지평 연구위원은 “지금까지는 엔화와 원화환율의 동조경향이 유지되어 왔지만 앞으로는 엔화환율만 독자적으로 올라갈 수도 있다”며 “해외에서 일본제품들과 경쟁을 하고 있는 수출기업들은 가격경쟁력 약화에 따른 대응방안을 마련해둬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또 98년 상반기에 뼈저리게 경험했듯이 일본이 휘청거리면 아시아지역 전체가 도맷금으로 취급돼 금융·외환위기를 맞을 수도 있다. 국제금융자본이 일본뿐만 아니라 아시아 각국으로부터 속속 이탈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일본이 7년이나 질질 끈 금융부실 청소작업을 우리는 외환위기 이후 곧바로 시작한 것처럼, 일본과는 확실히 차별화된 금융·기업구조조정 노력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 위기의 원인을 근본적으로 제거하지 않고 단기 미봉책으로만 해결하다가는 일본과 똑같이 장기복합불황에 시달려야 한다는 게 많은 전문가들의 경고이다.
박순빈 기자 sbpark@hani.co.kr

사진/지난 3월2일 도쿄 시민들이 시내 한 거리에 걸려 있는 증권시세판 밑을 침울한 표정으로 걸어가고 있다.(AFP 연합)
다른 경제지표 역시 심각하다. 일본 총무성이 지난 3월2일 발표한 도쿄 소비자물가지수는 99.9. 지난해 12월에 견줘 1.1%가 떨어져 지난 71년 물가지수를 시작한 뒤로 한달 동안 사상최대 낙폭을 기록했다. 1년5개월 연속 물가가 떨어져 지금 도쿄물가는 6년 전보다 낮은 수준이다. 경제가 나아질 전망이 보이지 않으니까 기업들은 신규고용과 투자를 줄이고, 소비자들도 씀씀이를 줄이고 있다. 1월의 일본 산업생산은 전달보다 3.9% 줄었으며, 봉급생활자들의 한달평균 소비지출액도 33만3천엔으로 1년 전과 같은 수준이다. 1월 실업률은 4.9%, 실업자수 317만명으로 전후 최악의 수준이다. 지난해 금융기관들이 부실 기업대출 20조엔을 처리하면서 1만개 기업이 부도를 내고 쓰러지는 바람에 실업률은 5개월 연속 상승세이다. 그나마 성장을 뒷받침해줬던 무역수지도 올 1월에는 4년 만에 처음으로 적자로 돌아섰다. 이렇게 가다가는 물가하락과 마이너스 성장, 기업도산에 따른 고실업, 소비와 투자 위축이 맞물려 경제활동의 총체적인 축소인 ‘디플레이션’의 늪에 빠질 가능성이 높다. 90년대 초 부동산과 주식 등 자산거품의 붕괴로 시작된 일본의 구조적 장기불황은 지난 99년 4월부터 지난해 9월까지는 뚜렷한 회복조짐을 보여왔다. 지난해 2분기에는 2.4%의 성장률을 기록해 일본국민들 사이에 ‘드디어 10년 불황을 벗어나는 것 아니냐’는 기대를 낳기도 했다. 그래서 일본 정부는 지난해 하반기 들어 공공투자를 대폭 줄이고, 중앙은행인 일본은행은 99년 초부터 시행해온 ‘제로금리 정책’(콜금리를 0.02%선에서 억제)을 벗어던지고 금리인상을 단행하기까지 했다. 10년 불황기 동안 경기부양에 힘쓰다 누적되어온 600조엔대의 재정적자를 줄이는 동시에 경기상승 속도를 조절하기 위한 조처였다. 그러나 지금 돌이켜보면 이 조처는 ‘떡 나오기도 전에 김칫국부터 마시다가 낭패를 자초한 꼴’이 됐다. 일본경제 전문가들은 지난 10년여년 동안 경제를 짓눌러왔던 금융부실과 기업부실의 확대재생산고리를 깨끗이 정리하지 못한 가운데 일시적 청신호만 보고 들떠 있다가 외부충격에 의한 순환적 경기후퇴가 겹쳐 일본경제가 다시 위기에 빠진 것으로 진단한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이홍배 전문연구원은 “지난해 일본의 반짝 경기상승은 정보통신분야의 수출증대와 신규 투자확대가 큰 기여를 했는데 하반기부터 미국을 중심으로 정보통신시장이 급랭하면서 일본경기도 타격을 받게 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일본경기의 하강신호가 본격적으로 나타난 것은 지난 2월 들어서이다. 일본정부가 지난해 4분기(9∼12월) 경제성장률이 마이너스 6%를 기록했다는 발표와 함께 세계양대 신용평가기관인 무디스와 S&P가 잇따라 일본국채의 신용등급을 한 단계 끌어내리자 주가가 폭락하고 미국 달러화에 대한 엔화가치도 급격히 하락하는 등 금융시장이 요동을 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일본은행(BOJ)이 2월에만 재할인금리를 두 차례나 내려(0.5%→0.35%→0.25%) 금융불안을 진정시키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지만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이번에는 시장의 신뢰가 문제다. 왜 불신을 받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영국의 신용평가회사인 피치IBCA가 명쾌하게 정리했다. 정부·통화당국 서로 “니 탓이오” 주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