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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오염된 시장에 해독제 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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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0-08-02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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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민주화 일구려 진흙탕에 뛰어든 전문인들… 상식과 정의가 통하는 시장을 위하여

(사진/"벤처기업에 법적 인프라 제공하겠다." 법률사무소 지평의 변호사들은 다양한 전문 분야를 가지고 있다)
요즘 인터넷 증권사이트에서는 세종하이테크 주가조작 피해자들의 손해배상소송 준비열기가 뜨겁다. 지난 7월 초 검찰이 세종하이테크 주가조작 사건을 발표하자 팍스넷, 애널스탁 등 9개 증권사이트들이 이 회사 주식을 사들였다가 손해를 본 투자자들을 상대로 소송신청을 받기 시작했다. 그뒤 사이트마다 피해사례와 소송신청이 쇄도하고 있다. 대주주와 6명의 투신사 펀드매니저들이 낀 작전세력에 개미군단의 집단응징이 전개되는 것이다. 피해자들은 “손해본 금액을 돌려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작전세력들에 응분의 대가를 치르게 해줘야 한다”며 서로 궐기할 것을 호소하고 있다.

이 소송을 수임한 법무법인은 한누리. 김주영(35), 강용석(31), 이상훈(31) 변호사와 박응조(28) 회계사 등 참여연대 경제민주화위원회 소속 변호사와 회계사들이 주축이 돼 7월1일 문을 연 로펌이다. 지금까지 따로따로 본업에 매달리며 자투리 시간을 내 참여연대 활동을 해오다가 아예 함께 모여 일상활동과 과외활동(?)의 경계를 없앴다.

개미군단을 농락하는 이들에게 채찍을…


강용석 변호사는 “지금까지 의뢰가 들어온 세종하이테크 주식 투자자들이 약 300명에, 주식 수로는 40만주가 넘는다”며 “금융당국이나 검찰의 단속만으로 주가조작행위를 추방하기에는 한계가 있으므로 투자자들이 직접 소송을 내 대응을 해야 시장질서를 바로잡을 수 있다”고 말했다. 한누리 소속 변호사들은 다수 시장참가자들의 힘을 모아 소수의 시장교란자들을 상대로 법적 책임을 추궁하는 일에는 언제나 발벗고 나섰다. 현대전자 주가조작에 대한 손해배상, 신동방의 허위공시관련 손해배상, 현대투신을 상대로 한 러시아펀드 편법운용 손해배상 소송 등과 소액주주들의 의결권을 무시한 대우전자 주총결의에 대한 효력정지 가처분신청, 대주주 일가한테 헐값으로 주식을 나눠준 LG텔레콤에 대한 명의개서 신청 등 시장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던 사건들이 이들의 손을 거쳐 제기됐다.

“시장의 법과 제도가 불특정 다수의 참가자들에게 불리하게 운용되어왔다. 법률 서비스를 제공하는 전문화된 로펌들은 모두 힘있는 기업과 기업주들이 주고객이다. 이렇게 법률서비스시장이 기업과 기업주에 편향된 때문에 시장의 불공정 경쟁과 왜곡이 심화된 것이다. 지금은 국가권력보다 경제권력이 대중의 이익을 침해할 가능성이 더 크다. 하지만 인터넷의 발달에 힘입어 모래알처럼 흩어져 있는 피해자들도 쉽게 모여 뭉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됐다.”

김주영 대표 변호사가 설명한 한누리 설립배경이다. 한누리가 앞으로 어떤 업무에 주력할지 쉽게 짐작할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소액주주의 대표소송, 일반 주식투자자나 금융기관 고객의 피해구제를 위한 소송, 시민단체들의 공익소송 등이다. 또 소액주주는 물론 우리사주조합과 기관투자가들에게도 법률자문을 해 주주권을 효과적으로 행사할 수 있도록 할 계획이다. 이미 현대자동차 우리사주조합과 자문계약을 맺기도 했다.

서울 강남구 역삼동 성지하이츠 3차의 3층에 들어서 있는 한누리의 바로 옆에는 내장공사가 한창인 또다른 사무실이 있다. 참여연대 경제민주화 위원장인 장하성 교수(고려대)가 만드는 ‘기업지배구조평가센터’(가칭)가 들어설 자리이다. 8월중에 정식으로 문을 열 이 조직은 기업과 금융기관들이 투명경영을 하는지, 주주의 이익을 충실히 반영하는 지배구조를 갖췄는지, 내부 경영감시체계가 효율적으로 작동하는지 등을 수시로 평가해 그 결과를 공개함으로써 기업과 시장을 변화시키는 게 목적이다. 장 교수는 “지배구조에 대한 평가자료를 필요로 하거나 스스로 평가대상이 되고 싶은 기업과 기관투자가들이 회원으로 참여한다”며 “시장의 바깥에서 공익활동의 하나로 펼쳐온 소액주주운동을 좀더 지속적이면서도 광범위하게 확산시킬 수 있도록 시장에 직접 뛰어드는 것”이라고 말했다. 만약 평가센터에 ‘문제 기업’이 걸리면 곁에 있는 한누리에서 곧바로 법적 대응에 들어간다.

기업윤리·준법체계 컨설팅도 실시

(사진/지평의 구성원들은 수익의 일부를 사회운동 기금으로 적립하고 있다)
한누리, 기업평가센터와 접근 방식은 다르지만 목표는 똑같은 또다른 로펌이 있다. 기업윤리와 준법체계 구축 컨설팅을 해주는 법무법인 광장이다. 광장은 지난해 7월 LG-Caltex정유의 감사팀장 출신인 이민호(47)씨를 영입해 이 업무를 전담하는 경영자문실을 만들었다. 기업과 각종 단체, 전문가그룹을 상대로 윤리시스템과 준법프로그램을 갖추도록 자문하고 효율적인 실행방법도 제공한다. 반부패특별위원회에서 기업윤리전무위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는 이민호 실장은 “5%도 안 되는 지분을 가진 대주주가 마치 100%를 소유한 것처럼 독단적인 의사결정을 행사하고 정상적인 경영활동 감시와 견제기능이 발휘되지 않을 때에는 기업생존에 결정적인 타격을 준다는 것이 입증되고 있다”면서 “따라서 윤리시스템과 준법프로그램은 기업생존을 위해 필수적인 위험관리경영의 핵심수단으로 이해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앞으로 기업의 비윤리행위나 불법행위는 신뢰에 먹칠을 하는 정도가 아니라 시장에서 완전히 매장을 당하는 지름길이라는 얘기이다. 그는 개인적으로 지난 4월에 조직윤리개발센터를 별도로 설립해 인터넷사이트(http://my.netian.com/∼ethicsko/)를 통해 왕성한 윤리계몽활동을 펴고 있다.

건강하고 역동적인 시장경제의 가능성은 기존 대기업들보다 벤처기업에서 더 쉽게 찾을 수 있다. 그래서 학생운동 경험을 가진 386세대 변호사들이 요즘 테헤란밸리로 대거 몰려들고 있다. 지난 3월에 테헤란밸리에 둥지를 튼 법률사무소 지평(대표 강금실 변호사·서울 강남구 대치동 다봉타워빌딩)은, 김&장과 함께 국내 양대 로펌인 세종에서 ‘다른 법조인들도 부러워할 만큼의 고액 연봉’을 받던 변호사 10여명이 한꺼번에 나와 차린 벤처전문 로펌이다. 설립할 당시부터 대표 변호사로 영입된 서울고법 판사 출신인 강금실(44) 변호사를 비롯해 고승호(34) 변리사 등 세종 출신이 아닌 사람들까지 합쳐 지금은 변호사와 변리사들이 16명으로 늘었다.

지평의 변호사들은 사회변혁에 대한 열정에는 한결같으면서도 전문 분야는 다양하다. 지난해 옷로비 특별검사팀에서 기획수사관으로 활동했던 임성택(37) 변호사는 전자상거래와 온라인 지적재산권이 전문분야이다. 그는 서울대 법대 82학번 학생회장, 대학졸업 뒤 노동현장에 투신, 민주쟁취국민운동본부 부평지부 사무국장을 지내며 20대에서 30대 초반까지 줄곧 격동의 한복판에 있었다. 김성수(37) 변호사는 85년 서울대 의대 재학중 시위로 구속된 다음 인천 평화의원에서 노동자들을 상대로 직업병 상담을 하다가 95년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그해 서울대 의대에 다시 복학해 올해 1월에 의사 국가고시에 합격함으로써 국내 최초의 의사 겸 변호사가 됐다. 이 밖에 담배소송으로 유명한 김상준(35), 국내 최초의 생물학 전공(서울대 분자생물학과) 변호사인 김효권(35), 국세청의 과세적부심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박용대(32) 변호사 등 지평에는 그야말로 ‘백화점식 법률서비스’가 가능할 만큼 다양한 경력의 소유자들이 포진해 있다.

다양한 이력의 소유자들, 골리앗에 집단적 대응

(사진/참여연대 경제민주화위원회 소속 변호사와 회계사들을 주축으로 설립한 법무법인 한누리)
수석파트너인 양영태(38) 변호사는 이들의 의기투합 배경과 앞으로 활동방향을 이렇게 소개했다.

“법조문을 기계적으로 적용하기보다는 학생운동을 할 때 가졌던 진보성과 변호사로의 전문성을 결합할 수 있는 분야를 찾다가 벤처전문 로펌을 택했다. 벤처들이 이미 시장을 선점한 골리앗 기업들의 횡포 때문에 좌절하는 일이 없도록 막아주고 회사 설립에서부터 일상적인 운영, 자금조달, 다른 회사와 전략적 제휴 및 인수합병, 코스닥 등록에 이르기까지 반드시 따르게 마련인 법률문제를 말끔하게 처리할 수 있도록 신속하고 저렴한 법률서비스를 제공할 계획이다. 벤처기업들의 기술과 모험정신이 법과 제도의 인프라를 이용해 한껏 꽃필 수 있게 하는 게 우리 모두의 포부이다.”

지평은 구성원들에게 1주일에 평균 2시간 이상 공익활동을 의무화하고, 회사와 개인의 수익 일정부분을 인권·시민운동을 위해 기금으로 적립하는 등 로펌으로서는 파격적인 내부규약을 마련해놓고 있다. 로펌 운용철학이 ‘나눔과 공동체 정신’이다. 이 철학이 시장에 어떤 변화를 불러일으킬지 주목된다.

박순빈 기자sbpar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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