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자본 입맛 채우는 이상한 금융구조조정… 은행 대형화 통한 금융기법 선진화 요원
우체국 광고에 등장하는 껄렁한 남자 고객은 천원짜리 한장 가지고 온갖 유세를 부린다. 그래도 우체국 창구의 야들야들한 여직원은 예금에서 보험까지 이것저것 상품들을 다 소개해주고 나중에는 커피까지 대접한다. 천원짜리 고객으로서는 까무러치도록 감동을 주는 서비스다. 그런데 앞으로 은행에서 이런 고객은 문전박대를 당하게 될 것 같다. 껄렁한 태도 때문이 아니다. 천원짜리 들고서는 은행 문턱을 넘을 수 없는 시대가 멀지 않았다. 아니 이미 현실로 다가온 은행도 있다.
지난 99년 말 미국의 뉴브리지캐피털로 넘어간 제일은행. 정부가 지금까지 국민세금 15조8천억원을 쏟아붓고 7천억원에 지분 51%와 함께 경영권을 넘긴 은행이다. 당연히 헐값 매각 시비가 나올 수밖에 없지만, 국제통화기금(IMF)과 약속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선진금융기법을 끌어들여 국내 금융관행 혁신의 전도사 구실을 해줄 수 있다는 게 뉴브리지캐피털로 넘긴 명분이다. 아니나 다를까 제일은행이 요즘 파격적인 금융관행으로 은행가에 충격을 던져주고 있다.
누가 은행 문턱을 높이고 있는가
제일은행은 지난 1월부터 통장에 잔고가 10만원 미만인 고객한테는 월 2천원의 계좌유지 수수료를 받는다. 새로 통장을 만들려면 적어도 5만원 이상 갖고 들어가야 한다. 돈 안 되는 소액고객을 배제하는 대신 고액, 알짜 고객 위주로 서비스를 제공하겠다는 것이다. 윌프레드 호리에 제일은행장은 “음식점에서 물만 먹고 가는 손님과 비싼 음식을 주문하는 손님을 똑같이 대접할 수 없다”며 고객차별화를 당연한 조처라고 강조한다. 당장 다른 은행들이 ‘한수 배웠다’는 듯 따라할 태세이다.
서울은행은 3월19일부터 통장 입출금이 자유로운 저축예금의 경우 3개월 평균잔액 20만원을 유지하지 않으면 이자를 한푼도 주지 않기로 했으며, 한빛·신한·하나은행도 곧 ‘최저평잔기준’을 정해 이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고객에게는 상대적 불이익을 줄 방침이다. 김상훈 국민은행장도 “고객의 은행기여도를 분석해본 결과 상위 12%의 고객이 은행수익의 80∼90%를 기여하고 나머지 고객은 혜택을 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며 “소액예금자에 대한 수수료를 차별화하는 방안을 심도있게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제일은행은 수신만이 아니라 여신운용도 파격적이다. 정부가 ‘국내 금융시스템의 붕괴를 막기 위해 불가피한 조처’라며 ‘회생가능 판정을 받은 기업들’의 회사채 신속인수를 요청했으나 단호하게 거절했다. 또 골치아픈 기업여신 비율은 20%로 낮추고 소매금융에 치중하겠다는 게 올해 제일은행의 여신전략이다. 우리 정부가 제일은행에 기대했던 선진금융기법은 주로 기업금융쪽을 염두에 뒀던 것이다. 국내 은행들이 상대적으로 취약한 분야가 바로 기업금융이기 때문이다. 소매영업은 이미 국내은행들끼리도 포화경쟁 상태이다. 그런데 뉴브리지캐피털의 제일은행까지 소매영업에 치중하기로 해 ‘은행의 해외매각을 통한 선진금융기법의 도입’이라는 정부의 기대는 물건너간 느낌이다.
정부 눈치를 보지 않고 은행이 철저하게 시장원리와 상업적 기준에 따라 움직이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하다. 하지만 정부 허가를 받아 불특정 다수로부터 돈을 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은행은 공익성을 배제할 수도 없고, 배제해서도 안 되는 특수 민간기업이다. 주주의 이익만 지키기보다 무수한 고객들이 모아준 돈을 제대로 관리하는 의무가 더 중요한 게 은행업이다. 만약 국내 은행들이 모두 국내 기업들의 잠재성을 무시하고 대출을 기피한 채 국내외에서 돈놀이에만 치중하는 바람에 국내 신규투자가 위축되고 가망있는 기업들까지 도산해 실업자들이 들끊게 되면, 세계 최고수준의 저축률(32%)을 자랑하는 국민들에 대한 배신이다.
따라서 은행에 외국자본의 수익성 논리만 지배하고 정부의 정책의지가 전혀 개입할 여지가 없게 되는 것은 경제주권의 상실이나 다름없다. 정부가 국내 은행에 외국자본을 끌어들이려는 했던 목적도 ‘은행의 국제경쟁력을 높여 국내 금융기능을 강화’하자는 데 있지 ‘은행의 국적상실’을 방치하자는 게 아니다. 외자는 수단이지 목적일 수가 없다. 그런데 정부가 지난해 11월부터 발동을 건 2차 금융구조조정은 국내 은행들이 모두 철저하게 수익성 위주로 운영되고, 국적불명의 대형은행만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다. 우선 2차 금융구조조정의 ‘가시적 계기’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국민·주택은행의 합병에서부터 이런 우려가 나올 수밖에 없다.
정부 정책 실종된 은행의 국적 상실
두 우량은행의 합병 명분은 ‘국제경쟁력을 갖춘 대형 선도은행’의 탄생이다. 두 은행이 나가는 방향을 보고 나머지 은행들도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 합종연횡에 나서도록 유도하는 게 정부의 의도였다. 정부 의도대로 두 은행의 합병선언 뒤 한빛은행 중심으로 경남·광주·평화은행이 합쳐져 오는 4월에 금융지주회사를 출범하기로 했고, 최근에는 신한은행이 또다른 2∼3개 우량은행과 합병에 나서고, 중소기업 지원을 위한 특별법에 따라 만들어진 기업은행까지 외환은행과 합병을 검토하고 있다는 소식이 나와 은행가를 후끈 달궈놓고 있다.
신한은행의 합병 추진계획이나 외환-기업은행의 짝짓기 검토는 이기호 청와대 경제수석이 지난 2월21일 서울이코노미스트클럽초청 최고경영자 조찬강연에서 “정부 주도 금융지주회사 외에 기존 우량은행이 포함되는 민간 중심의 별도 금융지주회사도 조만간 선보일 것”이라고 밝힌 뒤 곧바로 터져나온 뉴스이다. 이어 이근영 금감위원장이 지난 2월27일 “경쟁력 있는 우량 금융기관에 대해서는 해외진출 및 신규업무에 대한 우선권을 부여하는 등 각종 인센티브를 제공함으로써 금융기관이 자발적으로 M&A나 구조개혁에 적극 나서도록 해나갈 것”이라고 말해 은행들끼리 합종연횡 움직임에 불을 지폈다. 재정경제부 관계자는 “현재 각 은행들은 대형은행으로 살아남을 것인가, 아니면 군소은행으로 전락해 사실상 신용금고 수준의 영업에 머물 것인가의 기로에 서 있다”면서 정부가 굳이 강요하지 않더라도 어떤 형태로든 합병을 통한 대형화 움직임이 가시화될 수밖에 없을 것으로 내다봤다.
문제는 이렇게 정부가 그린 밑그림대로 합병을 통한 대형화로 국내 은행산업의 구도가 바뀐다고 해서 은행의 효율성 강화와 국내 금융시스템의 선진화가 보장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은행합병의 경제적 효과는 국내에서 70년대 서울-신탁은행의 합병이나 IMF 사태 이후 한일-상업은행과 보람-하나은행 합병사례에서 잘 알 수 있듯이 성공여부가 불투명하다. 외국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웃 일본의 경우 역시 금융구조조정의 일환으로 90초부터 중반까지 사쿠라-아사히, 도쿄-미쓰비시 등 세계 최대규모의 은행합병이 잇따랐으나 총자산이익률이나 자기자본이익률 등을 잣대로 합병 뒤 3년 동안 수익성을 따져보면 개선은커녕 되레 악화된 것으로 나타났고, 일본의 전체 금융시스템은 여전히 낙후돼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무수한 2군은행, 소비자 밀착형 적소은행(니치 뱅크)들 없이 3∼4개 대형은행만 휑하니 존재하는 상황도 한국적 현실과는 전혀 맞지 않다. 정부는 국민-주택은행이 올 들어 수신금리 인하에 앞장서 금융시장 안정에 선도적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고 평가하지만, 뒤집어보면 시장지배력 강화를 통한 독점이익을 챙길 수 있는 여지도 있다. 정부가 지난해 초 은행합병의 세계적 대세론을 주장할 때 근거로 내세웠던 독일 드레스너은행과 도이체방크의 합병은 무산됐다. 독일 금융당국이 소매금융에서 두 은행의 시장점유율이 25%를 넘어 시장의 경쟁을 저해하고 독점이익을 챙길 수 있다면서 합병을 허가해주지 않은 탓이다. 국민-주택은행을 합치면 현재 국내 은행 총자산의 30% 이상을 지배하는 은행이 등장하는데도 우리 정부는 이에 대해 박수를 치고 있다.
대형화 효과 미미… 금융 불안정 대책없어
은행규모의 증대와 수익성 위주의 은행영업은 중소기업과 소액저축자 및 차입자의 금융접근을 봉쇄할 가능성도 크다. 금감위 관계자는 이에 대해 “대형화에 따른 부작용을 최소화할 수 있도록 감독기준과 창구지도방식도 함께 바꾸면 된다. 감독권을 이용한 다른 통제방식이 있다”고 주장하지만, 전혀 설득력 있게 들리지 않는다. 이런 주장은 금융선진국들도 비웃을 일이다. 지난 1월 선진 10개국(G-10) 특별작업반이 발표한 보고서는 “지난 10년간 세계 금융산업의 통합화 움직임에 따른 거대하고 복잡한 은행과 금융 대기업의 탄생은 개별 금융회사의 건전성을 측정하는 것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고, 구조조정의 필요성이 있을 때도 그 과정에 개입할 수 어렵게 해 어느 한 나라에서 일어난 금융불안정이 세계 전체의 금융시스템까지 위태롭게 할 가능성이 커졌다”고 경고했다.
정부 당국이 심지어 외환-기업은행 짝짓기 구도까지 그리고 있는 것을 보면, 은행 대형화에 부작용에 대한 대처의지조차 의심스럽게 한다. 현재 기업은행과 거래하고 있는 16만여개 중소기업은 주식이나 채권을 통해 기업자금을 조달해주는 직접금융시장은 물론이고 시중은행의 문턱에도 접근하기 어려운 기업들이 대부분이다. 규모의 경제논리, 수익성의 논리로 기업은행이 외환은행과 합치게 되면 이들 16만여개 중소기업에 대한 약 23조원의 여신은 원리금 지급이 확실한 소수의 대기업으로 가거나 아니면 너무 덩치가 커서 망하게 할 수 없는 부실 대기업을 살리기 위한 자금으로 전용될 게 뻔하다.
무분별한 대형화와 함께 은행에 대한 외국자본의 지배력이 정부가 통제할 수 없는 수준으로 높아지는 것도 큰 문제이다. 국민-주택은행이 6월 합병을 하게 되면 자산규모 140조원으로 국내 최대, 세계 100대권 은행 안에 진입한다. 그런데 이 국내 최대은행의 지배주주는 외국자본이 된다. 지금은 정부가 국민은행에 6.5%, 주택은행에는 14.5%의 지분을 확보하고 있지만 “여건만 성숙되면 민간은행에 대한 정부지분은 매각한다”(진념 재경부 장관)고 대내외에 천명한 터라 정부는 합병 뒤 곧 지분을 빼야 한다. 이렇게 되면 국민은행의 18% 지분을 가진 골드만삭스와 주택은행 지분 10%를 보유한 ING베어링이 합병은행의 1대 주주가 된다. 두 은행의 경영진들은 합병조건에서 여러 가지 유리한 고지를 확보하려고 서로 ‘외국인 주주의 백’을 동원하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 점차 지분이 더 늘어날 수도 있다. 김정태 주택은행장은 최근 기자간담회에서 “ING쪽과 체결한 투자약정서에 따르면 ING쪽은 국민은행과 합병 뒤 90일 이내에도 9,99%의 지분을 보유하게 돼 있다”고 뒤늦게 공개했다. 두 은행이 일대일 합병을 하면 ING의 지분 10%는 5%로 떨어져야 하는데, 이미 체결한 투자약정상 10%선을 유지되도록 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국내 최대은행이 외국 금융기관으로 넘어가 외국자본의 논리로 국내 금융시장을 선도하게 되면 어떤 상황을 맞게 될까?
국민경제적 차원에서 보면 은행은 저축과 투자를 매개시켜 성장을 견인해주는 구실을 한다. 그런데 월가의 잣대로 국내 기업들을 보면 마땅히 투자할 대상이 별로 없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미국의 경우 기업들의 평균 이자보상배율(이자비용에 대한 영업이익 규모)이 99년 말 기준 3.54인 반면에 한국기업들은 0.96에 불과하다. 한마다로 기업활동을 해서 벌어들인 이익으로 차입금에 대한 이자조차 제대로 감당할 수 없는 지경이다. 외국자본의 처지에서 보면 이런 기업들에게 대출을 해주는 것보다 국공채에 투자해 안정적으로 ‘금리 따먹기 장사’를 하거나 고수익을 좇아 국내외에서 파생금융상품 따위에 투자하는 게 훨씬 낫다.
성공회대 유철규 교수(경제학)는 “외국은행가들이 투자할 만한 기업들이 한정돼 있다고 해서 이런 국내기업들을 무책임하게 시장논리로 방치할 수 있느냐”고 반문하며 “특히 국내 은행시스템에 정부가 개입할 수 있는 공간이 사라진 가운데 외국자본이 과도하게 지배해버리면 경제상황이 나빠졌을 때 언제든지 국가위기를 초래할 가능성이 있다”고 경고했다.
외국자본이 국내 기업을 살려낼 건가
인천대 이찬근 교수(무역학)도 “은행이 철저한 수익성에 기초한 외국자본의 논리대로만 움직인다면 국내 금융과 산업과의 연관체계 붕괴, 중장기적 안목의 투자가 필요한 기간산업의 육성 포기, 금융파이프라인을 통한 국내 주력기업들의 전략 노출, 고용파괴의 확대재생산 등 여러 가지 부작용을 초래하며 이게 바로 중남미화 시나리오”라며 지금 추진하고 있는 금융구조조정 계획의 전면 재검토를 요구했다.
박순빈 기자 sbpark@hani.co.kr

사진/금융권에 외국자본이 몰려오면서 파격적인 관행이 자리잡고 있다. 소액거래자는 은행 창구에서 문전박대당할 수도 있다.(이용호 기자)

사진/윌프레드 호리에 제일은행장이 인터넷 뱅킹을 시연해보이고 있다.(이정우 기자)

사진/국제경쟁력을 합병 명분으로 내세운 주택·국민은행장이 추진위원회 첫회의에 참석했다.(김진수 기자)

사진/은행들의 무분별한 대형화는 빛 좋은 개살구에 그칠 가능성이 높다. 외환-기업은행 합병에 반대하는 기업은행 노조원들이 행장실 점거농성을 벌이고 있다.(강창광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