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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누가 TV를 바보상자라 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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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10-20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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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C에서만 가능했던 일들을 리모컨으로 처리하는 디지털 TV 시대… 상품 주문·은행업무·포털 사이트 이용과 채팅까지 가능한 ‘지능 상자’

▣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지난 10월10일 서울 양천구 신정동에 있는 CJ케이블넷 9층 휴게실. 벽에 설치된 대형 액정디스플레이(LCD) TV의 08번 채널에서 CJ홈쇼핑 화면이 방송되고 있다. 가을 의류 상품이다.

CJ케이블넷 직원이 CJ홈쇼핑에서 방송 중인 상품을 디지털TV 화면에서 실시간으로 구매하고 있다.

그런데 화면 오른쪽 상단을 보니 ‘빨간 버튼을 누르세요’라는 문구가 떠 있다. 의자에 앉아서 TV를 보던 CJ케이블넷(복수종합유선방송사업자) 박주희 대리가 손에 든 리모컨의 빨간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CJ케이블넷의 디지털 방송 서비스인 ‘HELLO D’라는 서비스로 화면이 바뀌었다. 헬로 디 서비스 메뉴는 노래방, 증권, 게임, 골프레슨, T뱅킹, CJ쇼핑으로 분류돼 있다.


상품정보는 물론 배송 상황까지 확인

리모컨으로 CJ쇼핑을 선택해 누르자 방송 중인 의류상품은 물론 CJ홈쇼핑 몰에서 팔고 있는 다른 여러 상품의 이미지 사진과 가격 등 상세정보가 주르륵 뜬다. ‘주문하기’ 버튼을 누르자 고유 비밀번호를 입력하라는 메시지가 떴다. 박씨의 신용카드 번호와 자택주소 등 가입자 정보는 TV에 연결된 셋톱박스(디지털 방송 수신장치)에 미리 저장돼 있고, 이에 따라 자신만의 고유번호를 부여받는다. 고유번호를 치고 비밀번호만 누르면 몇 번의 확인 버튼 클릭만으로 간편하게 상품 주문을 끝낼 수 있다. 박씨는 “이 제품을 이미 사용해본 사람들의 상품평도 실시간으로 볼 수 있다. 지금은 버튼을 누른 뒤에 헬로 디 서비스 화면으로 이동해서 상품을 주문하지만, 연말이면 화면을 보면서 동시에 리모컨을 눌러 현재 홈쇼핑에서 팔고 있는 상품을 실시간으로 구매할 수 있게 된다”고 말했다. “지금까지는 홈쇼핑 회사에 전화하고 기다리고 상품에 대한 설명을 듣고 그랬지만, 이제는 그런 절차를 리모컨 하나로 금방 해결할 수 있어요.” CJ홈쇼핑이 홈쇼핑업체로는 처음으로 도입한 홈쇼핑데이터방송(T커머스) 서비스다. 셋톱박스를 갖추고 CJ케이블넷 디지털 방송에 가입한 8만여 가구가 이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다. 안방에서 TV를 시청하다 리모컨 조작만으로 상품 상세정보를 보고, 주문은 물론 배송 상황도 확인할 수 있다.

가정에서 TV로 우체국 홈뱅킹을 할 수 있다. 서울 강서우체국 직원이 시연해 보이고 있다.

‘바보상자’로 불리던 TV가 만능TV로 변신하고 있다. 그동안 TV는 지상파와 케이블TV를 보는 장치에 불과했지만, 이제는 방송-통신 융합에 따라 기존에 PC에서만 가능했던 일들이 TV를 통해서도 가능해졌다. 인터넷의 급속한 보급을 통한 ‘e시대’를 거쳐 휴대전화와 모바일 기기의 광범위한 확산으로 ‘m시대’가 도래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이제 안방에서 TV 리모컨을 통해 상품을 조회하고 즉석에서 주문 결제할 수 있는 ‘T커머스’, 금융업무를 처리하는 ‘T뱅킹’ 등 지능형 TV시대가 열리고 있는 것이다.

T뱅킹 서비스, 해킹에도 안전

날마다 거듭되고 있는 TV의 진화는 TV를 통해 은행업무를 처리하는 T뱅킹 시대의 개막에서도 피부로 느낄 수 있다. 서울 강서우체국 한쪽에 마련된 휴게실에는 ‘우체국 TV뱅킹 서비스, 체험하세요’라는 문구가 텔레비전 수상기 위에 큼직하게 나붙어 있다. 한 우체국 직원이 케이블TV 방송을 보다가 리모컨을 누르자 i-PTV 포탈이라는 ‘TV 포탈’이 제공하는 요리·뉴스·교통·금융 등 수십 개의 방송 메뉴가 떴다. 다시 금융을 누른 뒤 증권·보험·은행 중에서 은행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한국금융TV가 제공하는 ‘i-DIGITAL’이라는 T뱅킹 서비스가 떴다. 거기에서 우체국·국민은행·대구은행·부산은행 등의 T뱅킹 서비스를 고르면 된다. 우체국의 T뱅킹 메뉴를 클릭하자 계좌이체, 계좌조회, 공인인증센터, 내 정보 관리함 등 4가지 메뉴가 떴다. 이제부터는 인터넷 뱅킹과 똑같다. 자신의 아이디와 비밀번호, 공인인증서 암호를 넣으면 리모컨 조작만으로 은행업무를 간편하게 처리할 수 있다. 공인인증서는 TV를 통해 발급받으면 된다. 물론 우체국 예·적금 가입자들이 T뱅킹 서비스를 이용하려면 별도의 셋톱박스를 달고, 디지털 케이블 방송에 가입해야 한다.

삼성(왼쪽)과 LG가 출시한 디지털 TV들. TV의 진화는 우리 생활 전반에 적잖은 변화를 몰고 오고 있다.

정보통신부 우정사업본부는 지난 8월 말부터 서울 강서·동대문구, 경기도 과천, 부산시 남구 등 49개 지역에서 이런 ‘우체국 TV뱅킹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TV를 보다가 디지털 방송 상태로 전환하면 리모컨을 이용해 다양한 우체국 금융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다. 우정사업본부는 “가정에서 아이들이 컴퓨터를 독차지하고 있을 때 갑자기 인터넷 뱅킹을 해야 할 일이 생기면 자리 다툼이 일어나기도 하는데 TV뱅킹 서비스를 이용하면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고, 인터넷 뱅킹 서비스에 친숙하지 못한 중·장년층의 어려움도 해소할 수 있다”고 말했다. 또 컴퓨터와 달리 TV는 구동시키는 데 시간이 별로 걸리지 않고, 전원 플러그만 꽂으면 곧바로 이용할 수 있다. 일종의 ‘플러그 앤드 플레이’다. 특히 TV뱅킹 서비스는 개방된 인터넷이 아니라 폐쇄된 전용 케이블망을 이용하기 때문에 해킹에도 더욱 안전하다. TV뱅킹은 현재 우체국뿐 아니라 국민은행·우리은행·농협·경남은행·광주은행·대구은행·부산은행 등도 도입했다.

현재 케이블TV의 디지털 데이터 방송은 CJ케이블넷 등 7개 복수종합유선방송사업자들이 각각 디지털미디어센터(DMC)를 구축해서 종합유선방송사업자(SO)한테 디지털 방송 신호를 송출해주는 방식이다. 디지털 케이블 방송에는 현재 전국적으로 15만 명이 가입해있지만 2010년에는 760만여 가구를 넘어설 것으로 전망된다.

이효리 클릭하면 상품 정보 보여줘

TV의 진화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생활 전반에 적잖은 변화를 몰고 오고 있다. PC에서나 가능할 것으로 여겨지던 동영상 포털 사이트들이 TV에서 구현되는가 하면 자신이 원하는 화면을 언제든 볼 수 있는 주문형비디오(VOD) 서비스도 가능해진다. 하나로텔레콤이 인터넷에 연결된 TV를 통해 서비스하는 초기 단계의 IPTV(하나TV)를 서비스하고 있지만, 이르면 내년부터 수백 개의 채널을 공급하는 본격적인 IPTV 시대가 열릴 전망이다. 우선 국제 축구경기의 경우 약 20대의 카메라가 경기장에서 돌아가는데, 양방향 IPTV에서는 이 카메라들을 내 맘대로 선택해 볼 수 있게 된다. ‘멀티앵글 서비스’를 통해 자신이 보고자 하는 영상에 가장 가까운 각도로 현장을 포착하는 카메라를 직접 선택해 경기를 즐길 수 있다.

인터넷 포털의 콘텐츠도 TV를 통해 실시간으로 이용할 수 있는 시대가 열렸다. 디보스가 다음커뮤니케이션과 공동으로 출시한 ‘디보스-다음 TV’.

드라마를 보면서 채팅도 할 수 있다. ‘소서노가 주몽을 봤어.’(ID: 주몽갤러) ‘너무 슬퍼, 다시 만나도 아무 소용이 없는 거잖아.’(ID: 제주토박이) 문화방송 드라마 <주몽>의 마니아인 김아무개씨의 TV에는 별도의 채팅창이 떠 있다. 이 채팅창에는 ‘주몽폐인’이라고 불리는 드라마의 열혈팬들의 의견이 실시간으로 올라온다. 주몽폐인끼리만 의견을 주고받을 수 있는 폐쇄형 채팅창을 TV화면에 띄우고 서로 소감을 나누는 것이다. 이에 따라 ‘나홀로’ 싱글족도 IPTV를 통해 외롭지 않게 드라마를 즐길 수 있게 된다. 폐쇄형 쌍방향 서비스를 통해 직접 제작한 콘텐츠를 회원들끼리 TV에서 공유하는 것도 가능하다.

또 TV 가요 프로그램을 보다가 가수 이효리의 모자·치마·재킷 등에 커서를 갖다대면 별도의 창을 통해 상품정보를 확인하고, 몇 번의 리모컨 조작만으로 IPTV의 인터넷망을 이용해 직접 구입할 수 있다. 이처럼 인터넷 포털처럼 TV포털에서도 TV와 인터넷 콘텐츠를 다양하게 결합한 무궁무진한 서비스가 가능하다.

TV와 인터넷 화면 동시에 띄우기

인터넷 포털의 콘텐츠를 TV를 통해서도 실시간으로 이용할 수 있는 ‘인터넷 포털 TV’도 등장했다. 중견 전자업체인 디보스는 지난 8월 다음커뮤니케이션과 공동으로 ‘디보스-다음 TV’를 출시했다. 이 TV는 인터넷과 연결해 TV는 물론 다음에서 제공하는 1만 편 이상의 영화와 18만 곡 이상의 음악파일 등 다양한 콘텐츠를 TV에서 즐길 수 있다. 노래방 서비스와 인터넷 게임도 고선명도(HD) 화질로 이용할 수 있다. 디보스는 또 인터넷 검색과 전자앨범 편집 등이 가능한 인터넷 디지털TV ‘비체’를 이미 선보였다. TV 속에 셋톱박스는 물론 컴퓨터까지 내장돼 있는 셈인데, TV의 대화면 고화질로 인터넷을 검색할 수 있다. 드라마를 보다가 화면을 두 개로 분할해 TV화면과 인터넷을 띄워놓고 온라인 쇼핑을 할 수도 있다. 디보스 쪽은 “거실에서 인터넷을 사용하게 되므로 자녀들을 음란 사이트로부터 보호할 수 있고,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이 적은 요즘의 거실 풍속도를 새로 바꿀 수도 있다”고 말했다.


HD와 SD방식의 차이

한국이 선택한 미국식 전송 방식에선 디지털TV가 필수

대부분 알겠지만, TV 화면 왼쪽 상단에 ‘HD’라고 표시된 프로그램은 디지털 방송을 뜻한다. 우리나라 디지털 방송 전송 방식은 HD(고화질급)이다. 예전에 디지털 방송 전송 방식을 둘러싸고 미국식(HD)이냐 유럽식(SD·표준화질급)이냐를 둘러싸고 한창 논란을 벌인 끝에 정부는 미국식을 채택했다. HD는 화질은 좋지만 이동성이 좀 떨어지고, 반면 SD는 화질은 좀 떨어져도 이동성이 좋고 HD보다 훨씬 더 많은 채널을 확보할 수 있는 전송 방식이다. 방송위원회 쪽은 “우리나라 소비자들이 이동성보다는 고화질급을 선호한 것으로 나타났고, 그래서 HD를 채택했다”면서 “최근 DMB의 도입으로 TV의 이동성이 높아지고 있기 때문에 HD 방식이 안고 있는 이동성 문제도 차츰 해소되고 있다”고 말했다.

2010년 이후 디지털 방송 전면 실시를 앞두고 방송위원회는 현재 각 지상파 방송사들에게 전체 방송 편성비율의 25% 이상을 디지털 방송으로 내보내도록 권고하고 있다. 그래서 드라마, 다큐멘터리, 쇼 프로, 뉴스까지 HD 방송을 다양하게 시범 실시하고 있는 중이다. 디지털 방송에서는 프로그램 자체를 처음부터 0과 1의 디지털 신호로 제작해 송출한다. 그런데 기존 아날로그 TV를 가진 가정도 별도의 셋톱박스를 달지 않고서도 현재 HD로 제공되는 디지털 방송 프로그램을 보고 있다. 이유는 방송사들이 디지털과 아날로그 방송을 동시에 송출하고 있기 때문이다. 디지털 신호로 제작된 프로그램을 아날로그로 컨버팅(변환)한 뒤에 똑같은 프로그램을 두 개의 송신탑에서 하나는 디지털 신호로, 다른 하나는 아날로그 신호 주파수로 송출하는 형태다.

기존 아날로그 방송은 하나의 전파에는 하나의 영상밖에 실을 수 없었고, 음성은 다른 전파로 보내야 했다. 그러나 디지털 방송은 하나의 전파에 여러 영상이나 음성 등을 실을 수 있기 때문에 채널이 여러 개로 늘어나고, 다중화면을 구성할 수 있어 한 텔레비전 화면에서 2, 3개 방송사의 화면을 동시에 볼 수 있다. 그런데 SD 방식에서는 아날로그 TV에 셋톱박스만 장착하면 디지털 TV와 비슷한 화질로 TV를 볼 수 있지만, 우리나라가 채택한 HD 방식에서는 디지털 TV를 갖고 있는 집에서만 디지털 방송을 제대로 즐길 수 있다. 아날로그 TV에 셋톱박스(30만원 안팎)를 달아 디지털 방송을 볼 수는 있지만 화질과 음질이 크게 떨어진다. 디지털 TV를 갖고 있더라도 셋톱박스 내장형이 아닌 분리형이라면 별도의 셋톱박스를 따로 구입해야 한다. 디지털 TV로는 PDP, LCD, 프로젝션TV만 있는 것은 아니고, 보급형으로 나온 브라운관(CRT) 방식의 완전평면 슬림형 디지털 TV도 있다.



1천억원 정도는 국민이 내라?

아날로그 TV로 디지털 방송 보기 위한 디지털 튜너 비용 떠넘기기

현재 정부는 디지털 방송으로의 전면 전환에 따른 특별법을 만들고 있는 중이다. 애초에 정보통신부는 2010년에 디지털 방송을 전면 실시한다는 방침이었는데, 디지털 TV 보급률이 아직 낮기 때문에 2015년 정도로 늦출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현재 디지털 TV 보급률은 25% 정도인데 2010년에 53% 정도로 증가할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런데 디지털 방송으로 전면 전환되면 기존 아날로그 TV를 갖고 있던 가정에서는 TV가 먹통이 되고 만다. 지상파 방송들이 아날로그 방송을 중단하고 의무적으로 모든 프로그램을 디지털 신호로 송출하면 아날로그 TV로는 시청이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날로그 TV에 ‘디지털 튜너’라는 것을 장착하면 아날로그 TV로도 디지털 방송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 튜너의 설치 비용은 누가 부담해야 할까? 최근 정보통신부가 국회 과학기술정보통신위원회 김희정 한나라당 의원에게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정통부는 아날로그 TV에 디지털 튜너의 장착이 의무화될 경우 아날로그 TV 1대당 10만원 정도의 가격상승 비용은 소비자가 부담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통부는 “디지털 튜너 장착을 의무화할 경우 비용은 누가 부담하게 되는가”라는 김 의원의 질문에 “미국에서도 생산자가 디지털 튜너를 아날로그 TV에 장착하게 되면 소비자가 그 비용을 부담하고 있다. 비용은 최종적으로 소비자 구매비용에 추가될 것”이라고 답변했다.

이럴 경우, 정부가 이미 디지털 방송 전환을 예고했지만 아날로그 TV가 2010년까지 연간 100만 대 정도 팔린다고 추정하면 국민들은 연간 1천억원 정도의 디지털 TV 전환비용을 부담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현재 월소득 100만원 이하 가구는 우리나라 전체 1600만 가구 중 180만 가구에 이른다. 한국전자통신연구원 변상규 연구위원은 “지난 5월 전국 광역시에 살고 있는 성인 1천여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100만원 이하 소득 가구 중 디지털 TV를 갖고 있는 집은 단 한가구도 없고, 100∼200만원 소득 가정도 디지털TV를 보유한 곳이 거의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말했다. 김 의원은 “무리한 디지털 방송 전환에 따른 부담을 국민들에게 전가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며 “정통부는 디지털 튜너 장착을 위한 재원 마련 방안을 마련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2009년 디지털 방송 전면 전환을 앞둔 미국은 저소득층 가구에 셋톱박스 무료 구입 쿠폰을 제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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