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영배 기자 kimyb@hani.co.kr
서울 중구 순화동 동화약품 본사 2층 안내실에는 1996년 발행된 ‘기네스북 인증서’가 전시돼 있다. 동화약품이 가장 오래된 제조회사이자 제약회사이며, 가장 오래된 등록상표인 ‘부채표’(1910년 등록)와 최장수 의약품 ‘활명수’를 보유하고 있다는 공식 확인서다.
‘목숨을 살리는 물’이란 뜻의 활명수는 고종이 대한제국 황제로 즉위한 1897년 당시 궁중 선전관(지금으로 치면 대통령 비서실장)이던 민병호가 궁중 비방에 서양 의학을 합쳐 만들었다고 <동화약품 100년사>는 전하고 있다.
그해 9월25일 민 선전관의 아들 민강이 동화약품의 전신인 ‘동화약방’을 세워 국내 첫 양약인 활명수를 선보였다. 활명수와 동화약품의 나이가 올해로 109살에 이르는 셈이다.
활명수는 계피를 비롯한 11가지 생약 성분으로 제조돼 소화불량과 복부 팽만감 등에 효능을 발휘함으로써 초창기부터 큰 인기를 끌었다. 해방 전까지만 해도 1병에 20전으로 설렁탕 4그릇 값과 맞먹는 가격을 책정한 데서 이를 엿볼 수 있다. 활명수가 유명해지면서 유사 제품이 떠돌자 동화약방은 1910년 심벌마크인 ‘부채표’의 상표를 등록하기에 이른다(일제 통감부 특허국 상표등록 제514호). 활명수란 브랜드 이름과 부채표라는 심벌마크가 누구 작품이었는지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고, 다만 창업자에서 비롯됐을 것으로 짐작할 뿐이라고 회사 쪽은 밝혔다. 재미있는 사실은 부채표를 심벌마크로 삼은 속뜻이다. 이 마크는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시집인 <시경>(詩經)을 쉽게 풀이한 책 <시전>(詩傳)의 글귀 “지죽상합(紙竹相合) 생기청풍(生氣淸風)”에 뿌리를 두고 있다. ‘대나무와 종이가 합해(부채를 이뤄) 맑은 바람을 일으킨다’는 뜻으로, ‘민족이 합심하면 잘살 수 있다’는 염원을 담은 것이란다. 이는 회사 이름인 ‘동화’(同和)와도 일맥상통한다. 부채표 마크에는 또 의학적 상징성도 담겨 있다. 부채는 예로부터 더위를 식히는 기능에 더해 구급약통 구실도 했다. 단오 때 임금이 3품 이상의 벼슬아치에게 하사하는 부채에는 옥추단(玉樞丹)이 달려 있어 복통이나 곽란 같은 급병 때 응급처치용으로 사용됐다고 한다. 부채표 활명수의 동화약방은 1937년 새로운 주인을 맞게 된다. 창업자인 민강이 독립운동을 지원하고, 한성임시정부수립 운동에 관여했다는 이유로 1년6개월의 옥고를 치르는 동안 회사 기반이 흔들린 뒤끝의 일이었다. 동화약방의 새 주인은 보당 윤창식(5대 사장·1890~1963)씨였다. 윤 전 사장은 보성전문학교(고려대학교 전신)를 졸업하고 신간회,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중앙상무위원 등으로 일하던 인물이었다고 전한다. 동화약방은 1962년 동화약품으로 거듭났고, 현재 경영은 윤 전 사장의 손자인 윤길준 사장이 이끌고 있다. 회사 이름과 대주주가 바뀌고, 경영의 주역이 새 주인의 손자대에 이르는 세월의 변화에도 아랑곳없이 부채표 활명수는 여전히 회사의 대표 브랜드로 그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활명수는 지난해 329억원어치가 팔려 회사 전체 매출의 21%를 차지했다. 국내 액제 소화제 시장에서 점유율 1위 실적이다. 100살을 훌쩍 넘은 활명수가 200살에 이르는 2097년에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활명수는 계피를 비롯한 11가지 생약 성분으로 제조돼 소화불량과 복부 팽만감 등에 효능을 발휘함으로써 초창기부터 큰 인기를 끌었다. 해방 전까지만 해도 1병에 20전으로 설렁탕 4그릇 값과 맞먹는 가격을 책정한 데서 이를 엿볼 수 있다. 활명수가 유명해지면서 유사 제품이 떠돌자 동화약방은 1910년 심벌마크인 ‘부채표’의 상표를 등록하기에 이른다(일제 통감부 특허국 상표등록 제514호). 활명수란 브랜드 이름과 부채표라는 심벌마크가 누구 작품이었는지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고, 다만 창업자에서 비롯됐을 것으로 짐작할 뿐이라고 회사 쪽은 밝혔다. 재미있는 사실은 부채표를 심벌마크로 삼은 속뜻이다. 이 마크는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시집인 <시경>(詩經)을 쉽게 풀이한 책 <시전>(詩傳)의 글귀 “지죽상합(紙竹相合) 생기청풍(生氣淸風)”에 뿌리를 두고 있다. ‘대나무와 종이가 합해(부채를 이뤄) 맑은 바람을 일으킨다’는 뜻으로, ‘민족이 합심하면 잘살 수 있다’는 염원을 담은 것이란다. 이는 회사 이름인 ‘동화’(同和)와도 일맥상통한다. 부채표 마크에는 또 의학적 상징성도 담겨 있다. 부채는 예로부터 더위를 식히는 기능에 더해 구급약통 구실도 했다. 단오 때 임금이 3품 이상의 벼슬아치에게 하사하는 부채에는 옥추단(玉樞丹)이 달려 있어 복통이나 곽란 같은 급병 때 응급처치용으로 사용됐다고 한다. 부채표 활명수의 동화약방은 1937년 새로운 주인을 맞게 된다. 창업자인 민강이 독립운동을 지원하고, 한성임시정부수립 운동에 관여했다는 이유로 1년6개월의 옥고를 치르는 동안 회사 기반이 흔들린 뒤끝의 일이었다. 동화약방의 새 주인은 보당 윤창식(5대 사장·1890~1963)씨였다. 윤 전 사장은 보성전문학교(고려대학교 전신)를 졸업하고 신간회,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중앙상무위원 등으로 일하던 인물이었다고 전한다. 동화약방은 1962년 동화약품으로 거듭났고, 현재 경영은 윤 전 사장의 손자인 윤길준 사장이 이끌고 있다. 회사 이름과 대주주가 바뀌고, 경영의 주역이 새 주인의 손자대에 이르는 세월의 변화에도 아랑곳없이 부채표 활명수는 여전히 회사의 대표 브랜드로 그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활명수는 지난해 329억원어치가 팔려 회사 전체 매출의 21%를 차지했다. 국내 액제 소화제 시장에서 점유율 1위 실적이다. 100살을 훌쩍 넘은 활명수가 200살에 이르는 2097년에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