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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부실회계 ‘일망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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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1-02-27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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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총 앞두고 외부감사에 의한 회계대란 임박… 부실 털어낸 기업 면책설 파문 일기도

사진/기업의 분식회계를 원천적으로 방지하기 위해서는 금감원의 감리기능이 대폭 강화돼야 한다. 금감원 회계제도실 모습.(이정용 기자)
지난 2월16일 금융감독원에서는 아주 이상한 인사 조처가 이뤄졌다. 회계제도실 책임자인 유아무개 실장을 증권검사1국 수석검사역으로 발령한 것. 실장급 간부직원을 사실상 평직원인 수석검사역으로 강등시킨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다. 금감원 출범(99년 1월) 때 국장급을 팀장 수준으로 내려앉힌 적은 있었지만, 당시는 은행감독원을 비롯한 4개 감독기구를 섞는 전체 판짜기 과정의 하나였을 뿐이다. 이번 유 실장에 대한 단독 인사는 성격이 판이하게 다르다.

실세 국장이 평직원으로 강등된 까닭은…

유 실장에게 어떤 ‘미운 털’이 박혀 이런 인사가 이뤄졌을까. 이번 인사의 배경에는 ‘회계대란설’이 깔려 있다. 지난해부터 금융시장에서 스멀스멀 기어나오던 회계대란설은 12월 결산법인들의 주총철(2월 말∼3월)이 다가올수록 훨씬 현실감을 얻으며 빠르게 증폭돼왔다.


회계대란설의 내용은 대략 이렇다.

‘기아자동차, 대우계열사에 대한 부실감사로 해당 회계법인들이 잇따라 중징계를 받게 되자 공인회계사들의 감사가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엄격해졌다. 이 때문에 상당수 기업들이 올해 주총을 앞두고 실시되는 (회계법인들의) 외부 감사에서 불합격 판정을 받고 심한 경우 퇴출 위기에 몰릴 가능성이 높다. 이는 자금시장 전체의 불안요인으로 작용할 것이다.’

이런 소문이 확산돼 있던 와중에 유 실장은 일부 기자들과 만나 “기업들이 분식회계를 통해 숨겨온 부실을 3월 주총에 앞서 스스로 털어낼 경우 행정·사법적인 처벌을 면제해주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으며 형사책임 면제를 요청하는 방안을 검토중”이라고 밝혔다. 이로 인해 파문이 일자 금감원은 실무진의 아이디어에 불과하며 금감원의 공식입장이 아니라는 해명서를 내고, 곧이어 유 실장에 대한 인사 조처를 단행했던 것이다.

언뜻 보기에 한 실무자의 실언에 따른 해프닝 정도로 보이는 이 사건에는 국내 기업회계 관행에서 비롯된 문제점이 고스란히 농축돼 있다. 유 실장은 옛 증권감독원 출신이며 공인회계사로 기업회계 분야의 전문가로 꼽힌다. 이번에 문제가 된 그의 발언은 전문가 처지에서 나름대로 고민한 끝에 나온 것으로 실언으로 보기 어렵다는 게 대체적인 분석이다.

국내 기업들이 처한 상황이 얼마나 급박하기에 회계대란설 및 면책론 검토 발언까지 나왔던 것일까.

이에 대한 답변에 앞서 외부감사제도를 잠깐 살펴볼 필요가 있다. 외부감사는 자산총액 70억원 이상인 주식회사의 재무제표 등 각종 회계가 기업회계 기준에 따라 적정하게 이뤄졌는지를 검증하는 것을 말한다. 적정 여부는 내부사람이 아닌 외부인이 평가하며 이는 투자자들에게 신뢰성 있는 정보를 제공하기 위한 절차로 ‘주식회사 외부감사에 관한 법률’에 바탕을 두고 있다.

외부감사는 회계사로 구성된 감사반(공인회계사 3명 이상 확보)이나 회계법인(회계사 20명 이상)만 할 수 있도록 돼 있다. 지난해 말 현재 외부감사 대상 회사는 증권거래소 상장 704개, 코스닥 등록 544개를 포함해 모두 8253개사에 이르고 있다. 이들 기업은 주총 전에 외부감사 보고서를 제출해야 한다는 규정에 따라 공인회계사들로부터 감사를 이미 받았거나 받고 있다.

회계법인 및 감사반은 해당 회사의 회계자료에 자신들의 감사 의견을 덧붙여 외부감사보고서를 작성하게 되는데, 이때 감사 의견은 4가지로 나뉜다. 적정, 한정, 부적정, 의견거절이 그것이다. ‘적정 의견’은 기준에 맞게 회계가 이뤄졌다는 것이며 ‘한정 의견’은 일정한 단서 아래서 적정하다는 뜻이다. 또 ‘부적정’은 회계가 기준에 맞게 이뤄지지 못했다는 것이며, 회사쪽의 비협조 등으로 감사가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을 경우 내려지는 게 ‘의견거절’이다.

깐깐한 감사 의견으로 부실기업 솎아낸다

%%990002% 여기서 문제되는 것은 ‘부적정’과 ‘의견거절’이다. 이런 의견을 받을 경우 해당 기업으로선 신뢰도에 치명타를 입게 된다. 장부작성이 부실하거나 내용에 의문이 간다는 낙인을 받은 꼴이기 때문이다. 이는 자금줄 차단으로 이어지고 해당 기업은 결국 생사의 갈림길에 서게 된다.

지난 99년 회계연도(12월 결산) 외부감사대상 기업 7116개 가운데 의견거절(2.3%), 부적정(0.9%) 의견을 받은 기업은 3.2% 수준이었다. 96년 1.1%, 97년 1.7%, 98년 2.1%에 이어 꾸준히 높아져온 것인데, 올해는 이 비율이 10%를 웃돌 것이란 게 금감원쪽의 추정이다. 공인회계사들이 기아, 한보, 대우 분식회계로 도덕성 시비에 휘말린데다 중징계 조처로 혼쭐이 나 엄격한 감사 의견을 낼 수밖에 없다는 판단에서다.

외환위기 이전만 하더라도 외부감사에서 힘의 우위는 기업쪽에 있었다. 기업이 외부감사 받을 회계법인을 선택하는 방식에서 엄격한 감사를 하는 회계법인은 ‘일감’을 따내기 어려웠다. 이런 풍토에선 ‘회계 일감’과 ‘물렁한 감사’의 바꿔치기가 이뤄지고, 이는 장부를 조작하는 회계 분칠로 이어졌다. 금융감독 당국의 감리(외부감사가 적정하게 이뤄졌는지를 점검하는)를 통해서도 분식회계는 제대로 적발되지 않았다. 또 적발되더라도 해당 기업의 경리담당 임원을 해임하라는 권고 조처를 내리는 데 머물러 분식회계를 번성케 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이제는 그러나 사정이 달라졌다. 기업회계 투명성에 대한 요구가 높아졌으며 분식회계에 대한 처벌 수위가 높아져 공인회계사들이 긴장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금감원 추정대로라면 800개를 웃도는 기업들이 올해 외부감사에서 의견거절 또는 부적정 의견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그동안 곪은 상처가 하나둘 드러난 데 이어 올해 들어 한꺼번에 터질 지경에 이른 것이다.

이와 관련해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 곳은 현대건설이다. 현대건설에 대한 외부감사는 삼일회계법인이 실시중인데, 여기서 나오는 결과에 따라 해당 기업이나 회계법인이 치명상을 입고 나아가 자금시장 전체의 불안요인이 될 것이란 분석이 고개를 들고 있다. 회계대란설 와중에 금감원 실무진에서 ‘(과거 부실회계에 대한) 면책설’을 검토한 것도 이와 맥이 닿아 있다는 해석도 있다.

김일섭 한국회계연구원장은 회계대란설과 관련, “보는 눈에 따라선 대란으로 비쳐질 수도 있겠지만, 숨기는 것보다는 낫다”며 “어차피 한번은 겪어야 할 과정”이라고 말했다. 김 원장은 “엄정한 회계를 통해 부실기업을 솎아내면 증시에서 안개가 걷혀 오히려 자금시장의 호재가 될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감사의견에 대한 오해가 적지 않다는 점이다. 적정, 한정 등 4가지 의견은 회계기준에 맞게 장부가 작성됐는지를 보여주는 것일 뿐 기업신용도와 직접적인 관계는 없다.

외부감사 의견은 절대적 기준 아니다

이정조 향영21세기리스크컨설팅 대표는 “한정, 부적정 의견은 회계법인과 기업간에 합의가 이뤄지지 않은 데 따른 것으로 그 이유로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며 “해당 기업이 외부감사보고서에 ‘반론’을 게재하는 방안도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한정, 부적정 의견을 받은 기업 중에도 옥석이 섞여 있을 개연성이 있으며 거꾸로 적정 의견이 우량기업임을 나타내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이 대표는 “외부감사를 통해 분식회계를 밝혀내는 데는 많은 한계가 있어 원천적인 방지 장치가 필요하다”며 “이를 위해 분기별 외부감사 보고서도 작성토록 하고 금감원의 감리 기능을 대폭 강화하는 등의 방안이 마련돼야 한다”고 덧붙였다.

주요 회계법인 현황

회계법인명

소속공인회계사 수
(1월 말 현재)

주요 피감사 회사

삼익

598

현대건설, 현대중공업, 삼성전자

안진

254

현대자동차, 포항제철, 한빛은행

안건

266

SK텔레콤, 코오롱상사

영화

154

제일은행, 동양메이저

삼정

178

두루넷, 한국통신, 고려아연, 한솔

김영배 기자 kimy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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