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겨레21 ·
  • 씨네21 ·
  • 이코노미인사이트 ·
  • 하니누리
표지이야기

막힌 돈줄을 뚫어라!

320
등록 : 2000-08-02 00:00 수정 :

크게 작게

시중자금 넘쳐나도 자금시장 꽁꽁 얼어… 기업들 경영전략 없이 자금막기 급급

(사진/자금경색 현상이 깊어만 가고 있다. 금융기관들은 오는 9월로 예정된 경영평가를 앞두고 여유자금을 쉽사리 꿔줄 형편이 아니다)
경제지표와 현실 사이의 괴리는 늘 있는 것이라지만 요즘 자금시장에선 이게 좀 심하다. 금리가 대단히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는 데서 알 수 있듯 시중에 돈은 남아도는데 기업들은 돈이 모자란다고 비명을 지른다. 하루이틀 된 얘기도 아니고 지난 3월 이후 계속된 현상이다. 이른 시일 안에 기업자금난이 풀릴 낌새도 없다. 당분간은 악재만 이어질 것이라고 걱정하는 목소리가 많다. 기업들이 돈 꾸기가 어렵다는 얘기는 만날 써먹는 단골 메뉴 아닌가. 지금 들리는 비명소리도 엄살 아닐까. 이런 의문이 제기될 법도 하다.

시중에 자금이 풍부하다는 것은 금리지표에서 잘 드러난다. ‘현대사태’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장단기 금리가 안정궤도를 벗어나지 않고 있다. 단기금리 지표인 하루짜리 콜금리는 5%대 초반에서 굳건히 유지되고 있다. 장기금리를 대표하는 국고채(3년), 회사채(3년)는 각각 8%, 9%를 약간 웃돌아 연초에 비해 1%포인트 정도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다.

‘신4대 그룹’ 아니면 돈 빌릴 생각 못해


금리가 낮을 뿐 아니라 은행, 2금융권 모두 7월 들어 수신이 각각 4조, 8조원 이상 늘어나는 등 유동자금이 풍성함에도 실물(기업)부문으로 돈이 원활하게 흐르는 길이 막혀 있어 기업들이 아우성이다. ‘신4대 그룹’(삼성, LG, SK, 롯데)을 빼고는 정상적으로 자금을 끌어오기 힘든 실정이라고 금융시장 관계자들은 전한다.

은행대출 창구는 꽉 막혀 있고 회사채 발행 등을 통한 직접금융 조달도 대부분 기업들엔 그림의 떡이다. 이런 중에 회사채 만기도래 물량은 층층이 몰려 있어 부담을 더하고 있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8월 한달 2조7천여억원을 비롯해 올해 말까지 만기에 이르는 회사채 규모가 무려 23조원을 웃돈다.

서울은행 자금부 서종한 부부장은 “회사채 지표금리는 9% 초반대에 머물러 있지만 이른바 신4대 그룹을 빼고는 대부분 11%대, 심지어 12%대에서 자금을 끌어쓰고 있는 실정이며 그나마도 쉽지 않은 상황”이라고 말했다.

왜 이런 현상이 오랜 기간 계속되고 있을까. 금융분야와 기업부문 두 측면에서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이 두 가지는 서로 밀접하게 연결돼 있기도 하다.

우선 금융분야. 은행을 비롯한 금융기관들은 돈이 남아돌아도 쉽사리 꿔줄 수 없는 실정이다. 특히 은행들의 경우 공적자금을 수혈받은 곳을 중심으로 오는 9월쯤 경영평가를 받게 돼 있어 몸을 사릴 수밖에 없다.

금융지주회사를 중심으로 통합하거나 합병하는 일이 현실화될 수 있는 것을 감안하면 이는 지극히 자연스런 대응이다. 떼일지도 모르는 업체들에 돈을 퍼줬다가 부실화될 경우 구조조정 과정에서 불리한 처지에 설까 두려운 것이다. 꿔준 돈을 떼이는 결과에 이르지 않더라도 당장 국제결제은행(BIS) 비율이 떨어지게 되므로 당분간 소극적인 자세를 지켜야할 상황이다. BIS비율이 은행의 우량도를 재는 유일한 척도인 양 인식돼 있는 마당이어서 이런 태도는 쉽사리 바뀌지 않을 것이다.

평화, 광주은행이 몇개 지방은행을 더 끌어들여 금융지주회사 아래로 뭉치겠다고 나서는 등 은행 구조조정 바람은 점점 현실감을 더하고 있다. 정부는 여기에 조흥은행 같은 덩치 큰 은행도 가세시켜야 금융지주회사로서 ‘의미’를 가진다는 의견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은행권의 눈길은 온통 여기에 쏠려 있다.

국민, 주택 등 이른바 우량은행들은 은행 구조조정 바람에서 약간 비켜서 있어 다소 여유가 있지만 기업자금난을 풀어주기에는 힘이 미치지 못한다. 이들 은행의 경우 수신이 크게 늘고 BIS비율도 높으나 소매(가계)금융에 주력하고 있을 뿐이어서 기업에는 별 도움이 되지 않고 있다.

은행권의 자금이 소매금융에 강점이 있는 곳에 편재돼 있는 것도 문제지만 은행권 내에서도 고유계정에만 맴돌고 있으며 투신, 종금 등 2금융권에선 자금이 계속 빠지고 있는 게 더 큰 문제다.

금융권 몸사리기… 정부가 나서도 소용없어

(사진/한국은행에서 돈을 펑펑 찍어내봐야 금융기관과 기업간 돈줄이 막혀 시중 자금경색이 해소되지 않고 있다)
투신사는 비교적 위험성이 높은 장기 회사채 투자나 주식투자 등을 통해 기업들이 시장에서 자금을 조달할 수 있는 길을 터준다. 또 종금사도 공격적인 자금운용을 통해 중견기업이나 신생기업들의 주요 자금조달원 노릇을 해왔다.

지금은 투신, 종금이 이런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 투신은 대우채권 편법편입, 일부 펀드매니저들의 주가조작사건 연루 등으로 일반투자자들의 신뢰를 잃었다. 문을 닫는 종금사가 잇따라 생겨나고 있는데다 내년부터 예금보장이 축소될 예정이어서 일반투자자들이 종금사에도 돈을 맡기지 않으려고 한다.

은행에서 돈을 꾸는 간접금융과 유가증권 발행을 통한 직접금융 모두 꽉 막혀 있는 형국이다.

돈이 기업으로 원활히 흐르지 못하고 있는 것이 구조조정을 앞둔 금융권의 몸사리기 때문만은 아니다. 기업 파트에도 문제가 있다. 이게 오히려 문제의 뿌리로 지적된다.

한국은행의 박재환 금융시장국장은 “지난 5월 새한이 워크아웃을 신청한 데 이어 국내 최대그룹 현대마저 자금위기를 겪자 도대체 믿을 기업이 없다는 인식이 금융권에 퍼져 있다”고 진단했다. 박 국장은 “이는 5대 그룹을 비롯한 기업들이 증자를 통한 몸집 부풀리기로 부채비율을 낮췄을 뿐 구조조정을 제대로 하지 않은 데서 비롯된 측면이 크다”고 덧붙였다.

정부는 금융과 기업부문을 연결시켜 돈이 흐르도록 나름대로 애를 쓰고는 있다. 지난 6월 자금시장 안정을 위해 10조원에 이르는 회사채전용펀드의 설정을 빼대로 하는 대책을 내놓았다. 투신사에 주식형 사모펀드, 비과세 상품 등을 허용한 것도 이런 맥락이었다.

이같은 방안은 그러나 아직 약발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회사채전용 펀드는 자금조성 단계부터 삐걱대고 있으며 조성된 자금도 대부분 국채, 통화안정증권 등에 투자돼 본래 목적에서 벗어나 있다. 투신 비과세 상품은 국회공전으로 근거법령이 마련되지 않아 차일피일 미뤄지고 있으며 7월 초 판매 예정이던 사모펀드 또한 제대로 설정되지 않고 있다.

금융권의 자금이 기업분야로 흘러가지 않는 현상이 오래 계속되는 데 따른 폐해는 불을 보듯 뻔하다. 기업은 투자 등 장단기 경영전략은 고사하고 당장 자금막기에 바쁜 하루하루를 보내야 한다. 실제 자금난을 겪고 있는 ㅅ그룹의 최고경영진은 만사제치고 단기자금 차입을 위해서만 동분서주하고 있는 실정인 것으로 알려졌다.

뿐만 아니라 멀쩡한 기업도 한계기업과 다를 바 없이 부도를 내는 지경으로 내몰릴 수도 있다. 피가 돌지 않아 조직이 썩는 것과 마찬가지다.

신용경색에 우량기업도 도산 위기 몰려

이런 신용경색 현상이 하루이틀된 문제가 아닌 만큼 이에 대한 많은 논의가 있었고 해결 방안도 어느 정도 제시돼 있다. 난국을 타개하는 길은 기업내용이 괜찮은데도 일시적으로 자금난을 겪고 있는 업체들을 한계기업과 분리시켜야 한다는 데서 공감대를 이루고 있다. 문제는 한계기업을 가려내야할 주체가 분명치 않고 정부나 채권단이 주도적으로 나선다고 하더라도 시일이 걸린다는 점이다. 박재환 한은 국장은 “원칙적인 얘기에 불과할지도 모르지만 한계기업을 가려내 과감하게 퇴출시키는 길밖에는 뾰족한 수가 없다”고 말했다.

금융연구원의 한 박사(대정부 관계 및 연구원의 방침을 들어 익명 요구)는 “(은행권에)기왕 투입할 공적자금이라면 빨리 집행해 우선 은행을 정상궤도에 올려놓은 뒤 채권단이 중심이 돼 살릴 기업과 퇴출시킬 기업을 가려 선별 지원에 나서야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기업구조조정기구(CRV) 등 제도적인 구조조정 장치를 서둘러 마련하는 등 정부와 채권단의 의지만 있다면 해결 가능한 과제라고 덧붙였다.

김영배 기자/kimyb@hani.co.kr


좋은 언론을 향한 동행,
한겨레를 후원해 주세요
한겨레는 독자의 신뢰를 바탕으로 취재하고 보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