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겨레21 ·
  • 씨네21 ·
  • 이코노미인사이트 ·
  • 하니누리
표지이야기

‘삼성궁’ 가는 길은 지뢰밭

347
등록 : 2001-02-21 00:00 수정 :

크게 작게

이재용씨 삼성전자 입성으로 세습길 닦았으나… 소액주주 운동, 변칙 상속 문제 등 아직도 첩첩산중

사진/삼성그룹이 3세 경영세습을 시도하고 있다. 이건희 회장의 장남 재용씨가 삼성의 경영일선에 본격적으로 나설 태세이다.(이진홍 기자)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의 장남 재용(33)씨가 경영일선에 입성하기 위한 초읽기에 들어갔다. 첫 입성지는 삼성의 주력기업이자 국내 상장기업의 간판 중 하나이기도 한 삼성전자이며 기획담당 임원으로 등장한다는 소문이 삼성그룹 안팎에서 나오고 있다. 그래서 오는 3월9일 삼성전자 주주총회에 세간의 관심이 쏠려 있다.

삼성그룹 구조조정본부 관계자는 “아직 어느 기업 어떤 자리에 언제 발령을 받을지 확정된 게 전혀 없지만 하버드대 박사과정을 모두 마쳤기 때문에 더이상 머뭇거릴 이유가 없다”며 재용씨의 경영참여를 기정사실화했다. 그러나 그는 “본격적으로 경영에 나선다기보다 이제부터 실무 경영수업을 받는 것으로 봐달라”고 당부했다.

경영능력 평가없이 중심 진입


삼성전자는 지난해 매출이 34조원으로 그룹 전체매출 110조원의 31%를 차지하는 삼성의 주력이다. 당기순이익(세전 8조1천억원)만으로도 웬만한 그룹 전체매출에 버금간다. 또 삼성전기, SDI, SDS, 중공업, 물산 등 여러 계열사에 1대주주로서 지주회사 구실도 하고 있다. 여기에 이재용씨가 기획담당 임원으로 앉아 있으면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그룹 전체의 업무를 관장할 수 있다. 나머지 증권 등 계열사들은 이미 이재용씨 그늘에 들어와 있다. 삼성그룹의 또다른 지주회사인 삼성생명의 지분 19.3%를 삼성에버랜드가 보유하고 있는데 에버랜드의 대주주(25.1%)가 바로 이재용씨이다. 따라서 삼성전자에서 어느 정도 경영능력을 인정받으면 아버지로부터 삼성의 전체 경영권을 언제든지 승계받을 수 있다. 이 점에서 재용씨의 삼성전자 임원 발령은 삼성그룹 3세 경영체제 구축의 신호탄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애초 이재용씨는 e비즈니스 분야에서 경영능력을 보여준 다음에 주력계열사로 진입하는 수순을 밟을 것으로 예상됐었다. 재용씨 스스로 e비즈니스 분야에서 쌓은 경험을 그룹경영에 접목시켜 삼성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고 싶다는 희망을 여러 자리에서 밝혔다. 그래서 지난해 이재용씨가 60%의 지분을 확보하고 있는 e삼성을 통해 10여개의 자회사를 설립하며 e비즈니스쪽에 대한 신규투자를 대폭 늘렸다. 하지만 벤처거품이 꺼지는 바람에 이 분야에서 단기간에 경영능력을 입증한다는 게 쉽지 않게 됐다. 더욱이 일부 사업은 벌써부터 잘못된 투자로 접을 위기에 놓였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최근에는 이재용씨가 거느린 e삼성쪽의 사업이 각 그룹계열사의 e비즈니스화 전략과 마찰을 일으켜 누군가 교통정리를 해줘야 할 상황을 맞고 있다. 이런 그룹 내부의 여러 사정들 때문에 ‘외곽으로부터 중심에 진입’한다는 경영승계 전략을 수정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삼성전자로 곧바로 들어가면 모든 이들로부터 축복을 받는 ‘화려한 즉위식’은 포기해야 한다는 데 있다. 삼성전자는 참여연대가 주도하는 소액주주운동의 표적이고, 외국인들로부터도 국내 재벌개혁의 상징적 대상으로 되어 있다. 삼성전자에 대한 재용씨의 지분은 0.77%. 이건희 회장(2.10%)과 부인 홍나희씨(0.71%) 등 가족들 지분과 삼성물산을 비롯한 계열사 지분을 다 합쳐봐야 대주주 및 특수관계인 지분이 11.69%에 불과하다. 외국인 지분이 56%, 나머지 34%도 국내 기관과 소액주주들 몫이다. 따라서 ‘가진 것만큼 지배한다’는 자본주의의 기본철칙을 지킨다면 총수가 마음대로 경영권을 물려줄 수 있는 기업이 아니다.

그러나 ‘적법한 절차’를 중시하는 삼성그룹이 삼성전자를 3세 경영세습의 발판으로 삼으려고 했을 때는 이런 걸림돌(?)들을 감안하지 않을 리가 없다. 우선 이사회에서 경영권 세습에 대한 시비가 생기지 않도록 총수를 감시·견제할 수 있는 이사의 진입을 원천봉쇄해놓았다. 일찌감치 시차임기제를 도입해 주주총회에서 새로운 이사회를 요구하더라도 기존 이사의 3분의 1만 바꿀 수 있도록 해놓았다. 또 외부의 기관투자가나 소액주주가 힘을 모아 독립적인 사외이사를 선임할 수 없도록 집중투표제는 정관을 통해 배제시켰다. 올해부터 자산규모 2조원 이상의 상장기업은 전체이사의 절반 이상을 사외이사로 선임하도록 의무화되었지만 이미 빠져나갈 방법을 강구해놓았다. 삼성전자는 기존에 21명이던 등기이사 정원을 올해 주총에서는 14명으로 줄이기로 했다. 이렇게 되면 기존의 사외이사 6명 가운데 1명 정도만 바꾸고 2명의 사외이사를 새로 선임하면 된다.


힘얻는 ‘삼성 처벌 불가피론’

벌써 삼성전자 내부에서는 2명의 신임 사외이사 후보를 확정했다. 이갑현 전 외환은행장과 아이콘 미디어랩아시아의 요란 맘 사장이다. 참여연대가 추천한 전성철 세종대 세계경영대학원장(국제변호사)는 들어갈 자리가 없다. 이런 식으로 삼성쪽 구도대로 이사회가 구성되면 이재용씨가 임원으로 선임되는 것도 간단하다. 재용씨는 비등기임원으로 들어갈 예정이고, 비등기임원은 이사회에서 통과시켜주면 그만이다.

그러면 이런 삼성쪽의 치밀한 정지작업으로 이재용씨의 ‘무혈입성’이 가능할까? 전혀 그렇지가 못하다. 삼성전자 소액주주들의 표를 모으고 있는 참여연대의 반발이 만만치 않을 것으로 보이는데다, 일부 외국인 기관투자가들의 시선도 따갑다.

게다가 이재용씨에게는 변칙상속 문제가 그야말로 아킬레스건이다. 이재용씨는 94∼95년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현금 60억8천만원으로 삼성에버랜드, 에스원, 엔지니어링, 전자, SDS 등 삼성계열사들의 주식이나 전환사채(CB) 및 신주인수권부사채(BW) 따위를 헐값에 넘겨받아 현재 확보하고 있는 계열사 지분가치가 3조원대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 과정에서 이재용씨가 낸 증여세는 16억원에 불과하다. 삼성 나름의 상속·증여세법상의 ‘구멍’을 교묘하게 이용한 ‘적법한 상속’이지만, 참여연대를 비롯한 시민사회단체에서 끈질지게 제기하고 있는 비판여론을 잠재울 수 없다.

이재용씨의 세습과정에 법적 문제가 없는가에 대한 판단도 마무리되지 않았다. 특히 99년 2월 비상장회사인 삼성SDS가 이재용씨에게 신주인수권부사채(BW)를 헐값으로 배정한 사안은 요즘 법적 처벌 불가피론이 더욱 힘을 얻어가고 있다. 삼성SDS는 BW 321만주를 주당 7150원에 발행해 이 가운데 65%를 이재용씨를 비롯한 이건희 회장 자녀들에게 배정했는데, 참여연대는 당시 SDS 주식이 장외에서 주당 5만4천원∼5만7천억원선에 거래된 여러 가지 증거들을 토대로 이재용씨 등이 1600억원가량의 부당이득을 챙긴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이에 따라 참여연대는 SDS 이사들을 배임죄로 형사고발했으며, 법원에 삼성SDS의 BW발행에 대한 무효소송을 걸고, 국세청에는 탈루세액에 대한 추징을 계속 압박하고 있다. 이에 대해 삼성은 계속 “사법부의 판단에 맡겨야 하며 여론몰이식 비판은 기업경영만 위축시킨다”고 주장해왔다.

검찰이나 법원이 움직이는 방향도 삼성으로서는 난감하다. 지난해 11월 동방금고 비리사건 수사 때 유일반도체의 장성환 사장이 회사의 전환사채를 헐값에 배정받아 배임죄로 구속된 데 이어, 최근에는 부산의 맥소프트뱅크라는 비상장 벤처기업 대표이사가 장외거래가격이 2만5천원하는 회사 주식을 3천원에 살 수 있는 전환사채를 발행하고 스스로 인수했다가 기소된 사건에 대해 부산지법이 유죄판결을 내렸다. 이재용씨의 삼성SDS BW 헐값 인수도 똑같은 사건인데 만약 사법당국이 그냥 넘어간다면 ‘벤처유죄, 재벌무죄’라는 아주 창피한 법조문을 만드는 꼴이 된다.

“경영세습 자체부터 문제다”

참여연대는 이번 삼성전자 주주총회에서도 이 문제를 끝까지 추궁할 방침이다. 삼성SDS의 대주주가 삼성전자이고, 이재용씨가 헐값에 BW를 배정받아 주주사인 삼성전자에 손해를 끼쳤기 때문이다. 참여연대 김진욱 변호사(경제민주화위원회 부위원장)는 “이 밖에 이재용씨는 90년부터 삼성전자로부터 부장직함을 받아 회사돈으로 유학경비와 체재비를 쓴 사실도 있고 이런 식으로 회사에 이익을 주기는커녕 위법하게 손실을 끼친 인물을 임원으로 선임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주장했다.

이런 법적 시비 이전에 경영세습 자체에 대한 비판도 만만치 않다. 재벌개혁은 IMF 구제금융사태이라는 아픔을 겪으면서 절감하게 된 국가적 과제이고, 그중에서 투명경영과 책임경영이 가능한 지배구조 구축은 재벌개혁의 핵심이다. 또 재벌의 경영실패는 그 기업과 직접 관련이 없는 무수한 사람들에게 막대한 피해를 준다는 사실을 대우사태를 통해서 국민 모두가 뼈저리게 경험하고 있다.

방송대 김기원 교수는 “경영능력에 대한 객관적인 검증절차도 없이 경영권을 세습하는 행위는 경영실패의 위험을 높이든지 아니면 잠재적 발전가능성을 가로막는다”며 “국내 최대재벌인 삼성이 ‘총수가 자기회사를 자기 마음대로 하는데 무엇이 잘못되었느냐’는 식의 전근대적인 발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다”고 말했다.

박순빈 기자 sbpark@hani.co.kr


좋은 언론을 향한 동행,
한겨레를 후원해 주세요
한겨레는 독자의 신뢰를 바탕으로 취재하고 보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