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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부동산의 아메리칸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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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7-20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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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부동산 정책이 피곤한 강남 집 부자들 미국 아파트에 눈돌려… 가격 거품 우려에도 과감하게 현찰 구입… ‘환치기’ 악용 가능성도

▣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한국에서 떠돌고 있는 돈들이 요즘 미국의 주택에서 머물 곳을 찾았다.” 서울 강남에 사는 김아무개씨는 미국 동부 보스턴에서 방 2개짜리 아파트를 75만달러(약 7억원)에 사기로 하고 최종 계약을 앞두고 있다. 미국에서 유학 중인 아들의 집세로 매달 250만원씩 부쳐왔던 김씨는 올 초에 주거 목적의 해외 부동산 취득 송금 한도가 폐지되고 5월에 투자 목적의 해외 부동산 취득까지 허용되자 차라리 집을 사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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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서울 강남에 있는 해외 부동산 전문 중개업체 루티즈코리아를 찾아갔다. 미국 주택가격 거품이 지난해부터 꺼지고 있다는 경고가 계속 나오는 판이라 걱정도 됐지만, 최근 원-달러 환율 하락(원화 가치 절상)으로 상대적으로 싸게 집을 구입할 수 있는데다 나중에 달러 가치가 다시 반등하면 환차익도 기대할 수 있다는 판단에 생각을 굳혔다. 김씨는 아들이 대학을 마칠 때까지 5년 이상 보스턴 집을 갖고 있을 생각이다.


펀드 파는 중개업체, 설명회 여는 시중은행

지난 7월10일 미국 <월스트리트저널>에는 ‘한국의 돈이 미국 부동산에 물밀듯 들어오고 있다’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이튿날, 서울 강남에 있는 루티즈코리아 사무실. 40∼50대 중년 여성과 남성 15명 정도가 조그만 원탁 회의실에 앉아 설명을 듣고 있었다. 미국 텍사스주 휴스턴에 있는 아파트와 상가에 투자하려는 사람들이다. 투자 후보 물건은 휴스턴에 있는 에지우드 아파트 등 3가지로, 아파트를 직접 사려는 건 아니고 해외 부동산 투자 금융상품인 ‘루티즈클럽 펀드 1호’(총 모집금액 30억원)에 가입할 생각이다. “지금까지 이미 40여 명이 2억5천만∼5천만원까지 투자했습니다. 펀드 운용 기간은 3년이고 1계좌당 5천만원입니다. 한 사람이 다섯 계좌에 투자한 경우도 있습니다. 연 9∼12%의 임대수익에다 만기 때 처분이익까지 20∼30% 추가 수익이 기대됩니다.” 펀드에 대한 설명이 끝나자 한 중년 여성 고객이 질문을 던진다. “언론 보도를 보니 미국 부동산 가격에 거품이 많이 끼어서 지난해부터 값이 떨어지고 있다는데?”

기다렸다는 듯 루티즈코리아 쪽의 설명이 이어졌다. “미국 동부와 서부는 한 5년 동안 집값이 많이 올랐지만, 중부 휴스턴은 미국 평균 부동산 가격보다 약 27% 저평가돼 있습니다. 고용과 인구가 빠르게 증가하면서 휴스턴 지역의 아파트 수요가 크게 늘고 있어요. 법인세율도 낮아서 경제전문지 <포천>이 선정한 거대 기업들이 대거 진출하고 있는 유망한 지역입니다.” 루티즈코리아 쪽은 투자 후보 물건인 에지우드 아파트(386가구, 매매가격 1천만달러)의 경우 연간 예상수익률을 세전 15∼18%로 제시했다.

한국 부동산은 이제 매력 없다? 서울 강남의 한 해외 부동산 전문업체 설명회 자리에 참석해 이야기를 듣고 있는 사람들.

해외 부동산, 특히 미국 주택이 국내 집 부자들의 새로운 대체 투자처로 급부상하고 있다. 하나은행은 지난 6월 미국 캘리포니아 주택투자 설명회를 대대적으로 열었고, 미국 주택개발·관리 전문업체인 코우사가 6월27일 개최한 미국 주택투자 설명회에는 1천여 명이 몰려 대성황을 이뤘다. 업계에 따르면 이날 설명회 뒤 ‘꽤 많은’ 실제 분양 계약이 체결됐다고 한다. 8월 말에는 서울국제부동산박람회가 처음으로 열릴 예정이다. 외환은행 등 시중은행들도 프라이빗뱅킹(PB) 부자 고객들을 해외 부동산 전문업체와 연결해주는 서비스를 앞다퉈 시작했다.

사실 한국인들이 미국 주택시장 가격 급등에 한몫을 담당했다는 말은 진작부터 나왔다. 버지니아 페어팩스의 경우 옛날에는 깡촌이었는데 한국인 중·고교 학생들이 몰려들면서 집값이 급등했고, 로스앤젤레스(LA) 근처 어바인도 한국인 유학 열풍이 집값을 올려놓았다. LA의 주상복합아파트 선착순 분양 때는 새벽부터 줄 선 사람들 중 절반이 한국인이었다고 한다.

“양도세·종합부동산세 질린다”

그러나 지금은 사정이 다소 다르다. 미국에 거주하는 한국인들과 유학생의 주택 구입 붐이 아니라, 국내 거주 한국인들이 순수한 ‘투자 목적’으로 미국 현지에 집을 사고 있는 것이다. 미국 주택에 대한 투자가 급증하는 이유는 뭘까? 가장 먼저 꼽히는 건 한국 부동산 시장에 대한 매력이 크게 감퇴했기 때문이다. 루티즈코리아 김천석 이사는 “상담하러 오는 고객은 주로 10억∼20억원 이상 여유자금을 가진 1가구 다주택자들인데, 국내 부동산 정책과 부동산 세제에 대해 일종의 패닉 같은 상태를 보이고 있다”며 “양도세·종합부동산세에 피곤해하고, 국내에 마땅한 투자처도 없어서 미국 쪽 부동산을 보고 있는 것 같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미국 뉴스타부동산그룹 한국 본사의 양미라 실장은 “미국 주택투자를 염두에 두고 있는 사람들을 상담해보면 한국 부동산은 이제 희망이 없다, 미련도 없다, 정책이 확 바뀔 것 같지도 않다고 생각하고 있다”며 “정부가 해외 부동산 투자를 풀어줬는데 굳이 국내 부동산에 투자할 필요가 있느냐?”고 말했다. 뉴스타부동산에 따르면 미국 주택 취득 상담자는 대부분 국내 다주택자들인데, 거주 주택 외에 나머지 주택을 처분하고 대체 투자로 미국 쪽을 고려하고 있단다.

미국 주택투자 붐이 일고 있는 또 다른 이유는 ‘환율’이다. 비록 금리 인상 추세에 따라 미국 주택가격의 거품이 꺼지고 있긴 하지만, 원-달러 환율 하락에 따라 지금이 미국의 집을 사기에 좋은 타이밍이라는 것이다. 예컨대 1년 전에 100만달러짜리 미국 주택 구입에 원화 11억원이 필요했다면 지금은 9억5천만원만 있어도 된다. 게다가 나중에 달러 가치가 반등한다면 미국 주택가격 상승세가 둔화되더라도 환차익을 볼 수 있다. 또 미국 주택가격이 떨어지고 있기 때문에 싸게 구입할 수 있는 시점이기도 하다.

해외 부동산 전문업체 쪽은 미국 주택시장에 거품이 끼어 있다는 분석도 많지만 물건을 잘만 고르면 상당한 시세차익도 거둘 수 있다고 말한다. 양미라 실장은 “특별한 호재가 없고 인구 유입도 없는 곳은 거품이 꺼지게 마련이지만 ‘불패 지역’도 있다. 히스패닉 계열과 아시아 신흥 이민 인구가 계속 유입되고 있는 지역이 대표적이다”고 말했다. 루티즈코리아 김천석 이사는 “전세계적으로 연금 운용자산이 거대한 규모인데 수익·배당을 내려면 연금 기금을 운용해야 하고, 그래서 주식이든 채권이든 부동산이든 연금같은 대기 자본이 항상 있다”며 “거품이 끼었다 해도 그것이 정점을 뜻하는 것이 아니고, 얼마까지 더 오를지 누구도 알 수 없는 구조”라고 말했다. 예컨대 미국 플로리다주 콘도미니엄 가격을 보면, 2005년에 평균 11% 올랐는데 많이 떨어진 곳은 -53%, 반면 많이 오른 곳은 155% 폭등하는 등 지역별로 큰 차이가 있다. 미국에서도 인구 이동과 고용이 늘고 경기가 좋아지는 지역을 잘 고르면 거품 논란에도 불구하고 집값이 더 올라 상당한 시세차익을 얻을 여력이 아직 충분하다는 얘기다.

40만~160만달러 집값을 현찰로 구입

물론 한국보다 먼저 미국 부동산 시장의 거품이 빠지고 있는 시점이라서 투자 결정을 신중하게 해야 한다는 지적도 많다. 실제로 미국의 집값이 떨어지는 시점이라서 “정부가 또 부자들을 죽이려는 것 아니냐?”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이와 관련해 양미라 실장은 “미국 주택을 문의하는 사람 중에 ‘미국 부동산의 거품이 꺼지고 있다는데 정부가 해외 부동산 투자를 너무 늦게 풀어줘서 혹시 우리가 막차 타는 것 아닌지, 돈 있는 사람들을 해외에서 또 죽이려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는 푸념도 나오고 있다”고 전했다. 한국인들에게 인기 있는 뉴욕·LA·캐나다 밴쿠버 등은 이미 집값이 위험 수준에 달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또 구입한 미국 주택가격이 올라도 나중에 원-달러 환율이 오히려 지금보다 더 떨어지게 되면 ‘환차손’을 입을 수밖에 없다.

미국 주택이 한국 집 부자들의 새로운 투자처로 각광받고 있다. 지난 4월 미국 워싱턴 밴쿠버에 내걸린 신규 주택분양 팻말.

예컨대 미국 주택을 사서 연간 8∼9% 정도 집값이 상승했다고 치자. 미국 현지 금융기관에서 모기지론을 받을 경우 현행 대출금리가 6.9%인데 관리비·보험료 등을 빼고 나면 남는 수익은 거의 없다. 또 30만달러짜리 주택의 경우 30% 다운페이먼트(자신이 직접 내는 돈)로 9만달러에 주택을 구입하고 나머지는 모기지론을 받았다고 하자. 주택 구입 이후 월세를 사는 것처럼 다달이 원금과 이자를 내야 하는데, 만약 주택가격이 10%(3만달러) 떨어지면 투자 원금 대비 33% 손실을 보게 된다. 융자가 많기 때문에 집값이 하락하면 손실이 그만큼 큰 것인데, 모두 현찰로 집을 사야 수익을 낼 수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일까? 지난 6월부터 뉴욕 뉴저지 해안에 분양 중인 호화 아파트 ‘허드슨 클럽’(344가구) 매입자 중 절반 이상이 한국인이라는데, 40만∼160만달러에 이르는 집값을 다들 현찰로 지불했다고 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허드슨 클럽만 해도 한국 정부가 발표한 전체 해외 부동산 취득 건수(6월 145건)보다 많다는 얘기가 된다. 이는 투자 목적이든 주거 목적이든 30만달러 이상 해외 송금은 국세청에 명단이 통보되는데 이를 피하려고 상당수가 환치기 등의 방법을 이용해 미국 주택을 구입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미국 주택 구입에 나서고 있는 사람들의 전형적인 모습은 ‘강남 거주 다주택 보유자이면서, 국내에서 부동산 투자로 쏠쏠한 재미를 봤던 부동산 자산가들’이다. 해외 부동산 중개업체 관계자는 “이들은 지금 미국 아파트를 사두면 2∼3년 안에 ‘투자 목적’ 해외 부동산 취득까지 완전 자유화돼 나중에 처분한 돈을 국내로 들여오지 않아도 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며 “미국 부동산 거품 경고에도 불구하고 미국 아파트에 베팅하는 데는 이런 계산도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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