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조정 원칙 흔드는 특혜성 지원 논란… 밑빠진 기업에 돈붓기식 살리기의 허와 실 
   
 ‘누군 죽이고, 누군 살리고… 도대체 기준이 뭔가.’ 
  정부와 채권단이 현대그룹을 살리기 위해 팔을 걷어붙이고 총력전으로 나선 데 대해 금융시장 안팎에서 비난과 걱정의 목소리가 끊이지 않고 있다. 현대건설을 비롯한 현대계열사들이 국내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감안할 때 마냥 내버려둘 수 없는 현실을 인정하더라도, 지금처럼 진행되는 각종 특혜성 지원책은 지금까지 어렵사리 지켜온 기업구조조정의 원칙을 송두리째 깨는 내용으로 후유증이 클 것으로 우려된다. 
  워크아웃(기업개선작업)을 비롯해 지금까지 기업구조조정 과정에선, ‘대주주 및 기존경영진의 손실분담’과 ‘부실화에 대한 책임묻기’가 필수전제조건이었다. 채권단의 자금지원이 이뤄지기에 앞서 해당 기업의 경영진이 물러나고 대주주의 자격은 박탈되는 게 상례였던 것이다. 그렇지만 현대에 대한 지원에선 이런 장치가 전혀 작동하지 않고 있다. 
  더 문제인 것은, 구조조정의 틀을 깨는 이런 지원책에도 불구하고 현대그룹이 온전한 모습으로 거듭 태어난다는 보장도 없다는 사실이다. 현대건설 등 현대계열사에 대한 어두운 전망이 쉽사리 사그라지지 않고 있는 금융시장의 현실에서 이를 엿볼 수 있다. 
   
 
무작정 지원해도 현대 회생 보장 없어
  지난해 말 이후 강도를 더해가고 있는 정부 및 채권단의 현대 지원은 말 그대로 ‘가능한 수단은 모두 동원하는’ 총력전 양상을 띠고 있다. 회사채 만기연장 수준에 머물던 지원 방안에 신규자금 지원이 덧붙고 현대건설의 해외 수주에 대한 정부의 지급 보증까지 보태지고 있다. 
  현대에 대한 지원책의 대표적인 사례로, 지난해 말 마련돼 올해 들어 본격 시행되고 있는 ‘회사채 신속인수제도’를 우선 살펴보자. 
  이 제도는 만기에 이른 회사채를 스스로 갚지 못하는 기업에 만기도래분의 20%만 갚도록 하고, 나머지 80%는 산업은행이 신속하게 인수해 원리금을 지급하는 내용으로 돼 있다. 산은이 인수한 회사채는 나중에 투신사와 은행들의 채권담보부증권(CBO) 및 대출담보증권(CLO)에 70%를 떠넘기고 20%는 주채권은행이, 나머지 10%는 산은이 끝까지 보유한다. 
  언뜻 보기엔 기업체 일반을 대상으로 삼아 자금시장의 안정을 꾀하고 있는 듯 보이지만, 현대 지원책이라는 분석이 강했다.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에 이런 분석은 현실로 드러났다. 산업은행이 지난 1월9일 만기에 이른 현대상선 회사채 500억원 중 80%인 400억원을 인수키로 한 데 이어 2월중 회사채 신속인수 대상으로 현대계열사들이 무더기로 선정된 것이다. 산업은행을 비롯한 20개 채권금융기관은 지난 1월16일 정례회의를 열어 회사채 신속인수 대상으로 현대전자, 현대건설, 현대상선, 쌍용양회 등 4개사를 뽑았다. 이에 따라 2월중 만기도래하는 4개사의 회사채 6339억원 가운데 80%는 5071억원을 차환발행된다. 시중에 자금이 풍성함에도 기업으로 흐르지 않고 있는 실정에서 이런 조처는 대단한 특혜성이라고 볼 수 있다. 
  신속인수제도가 경제장관간담회를 통해 마련된데다 현대계열 위주로 대상이 선정됨에 따라 ‘정부의 현대 지원책’이라는 평가에 별다른 토를 달기 어려워 보인다. 정부와 채권단의 현대 지원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국민경제 볼모로 책임규명 없는 지원만 
   
   정부는 지난 2월1일 긴급 경제장관간담회를 열어 현대건설 유동자금 문제 해결을 위해 회사채 신속인수제도와는 별도로 진성어음 결제용 대출 3600억원, 해외차입 지급보증 5천억원 등 모두 8600억원에 이르는 신규자금 지원을 추진키로 했다. 이렇게 될 경우 현대건설에 대한 올해 신규자금지원 규모는 회사채 신속인수(1조6천억원)까지 포함해 총2조4600억원에 이르게 되는 셈이다. 
   현대투신에 대한 지원도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미국 AIG사가 현대투신에 대한 공동출자를 제의하자 정부가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는데, 이는 그동안의 투신 구조조정 원칙에서 크게 벗어나는 행태다. 
  물론 정부와 채권단으로서도 나름대로 명분은 있다. 현대건설 등 현대계열사들을 시장논리에 따라 곧이곧대로 처리할 경우 자금시장 전체가 불안해지고 국민경제에 더 큰 피해를 끼칠 수밖에 없어 방치할 수 없다는 것이다. 
  현대건설의 예를 들어보면 이는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 현대건설의 협력업체는 대략 하도급 1천개, 자재납품 2천개 등 모두 3천개사 안팎에 이르고 있다. 고용효과로 따지면 모두 4만2천명에 이른다. 현대건설을 다른 부실기업들처럼 부도처리할 경우 일어날 파장을 가늠할 수 있는 대목이다. 
  뿐만 아니다. 외환은행 설명에 따르면 현대건설은 지난해 해외에서 45억달러에 이르는 신규수주를 따냈다. 국내 건설업체들의 해외 주 60억달러 가운데 74%에 이르는 규모이다. 현대건설은 지난 한해 국내에서도 7조원에 이르는 신규수주를 받아내 전체 건설시장에서 13%의 비중을 차지했다. 여기에 현재 진행중인 현대건설의 공사현장이 국내 420개, 해외 110개 등 모두 530개에 이르고 있다. 현대건설이 파산처리될 경우의 충격이 메가톤급이란 지적은 과장된 말이 아닌 것이다. 
  현대건설에 이어 또다른 골칫덩어리로 떠오른 현대전자 역시 부채규모가 11조원을 웃도는 큰 덩치여서 함부로 다루기 어렵다. 이같은 현대의 비중으로 보아 자금시장, 나아가 국민경제 전체에 끼칠 수 있는 악영향을 차단하기 위해 편법을 쓸 수밖에 없는 어려운 처지임은 분명하다. 
  또 현대쪽의 자구노력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니다. 지난해 3월 이른 바 ‘왕자의 난’ 이후 극심한 어려움에 빠진 현대그룹은 그간 무려 다섯 차례에 걸쳐 구조조정 계획을 밝힌 데 이어 나름대로 자구노력을 추진해왔다. 정주영 명예회장의 현대자동차 주식 2.7%(616만주)를 매각한 대금을 현대건설에 출자하고 현대건설 보유 현대상선·현대자동차 주식을 처분했다. 또 인천철구공장 터, 방글라데시 시멘트공장을 비롯한 해외투자자자산, 분당 하이페리온 등 사업용 자산을 팔았다. 이를 통해 현대건설은 지난 한해 1조2928억원의 자구실적을 기록했다고 밝히고 있다. 자구계획 1조5175억원의 85.2% 수준이다. 
  현대로선 ‘이만하면 할 만큼 했다’고 항변할 법도 하다. 경기침체기에서 부동산이나 유가증권 등 자산의 가치가 뚝 떨어지고 거래도 얼어붙는 실정임도 감안돼야 한다. 
  그럼에도 여전히 문제는 남는다. 우선, 현대쪽의 자구(자체 구조조정) 실적이 여전히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서울 계동 사옥 매각, 정몽헌 회장 보유주식 매각 등 아직 미결로 남아 있는 구조조정 계획이 적지 않은데다 이런 방안들이 이른 시일 안에 성사될 것을 기대하기도 어렵다. 또 현대쪽이 실적으로 잡은 것 중 매듭지어지지 않은 부분도 적잖이 섞여 있다. 
   
  소유·지배 구조 개편은 엄두도 내지 못해 
   
  이보다 더욱 큰 문제는 현대건설에 대한 시장의 평가가 얼마나 달라졌느냐 하는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아직은 떨어진 신뢰를 되찾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지난해 하향조정된 신용등급이 여전히 제자리에 머물러 있으며 주식시장에서도 아직 그다지 좋은 평을 얻지 못하고 있다. 신영증권은 최근 분석보고서를 통해 “현대건설의 경우 오는 5월까지 서산 땅 및 계동본사 매각 등 전체 자구계획 7485억원 가운데 5218억원의 실현여부가 집중돼 있어 최대 고비를 맞고 있다”고 지적했다. 정부와 채권단의 지원에 힘입어 유동성 위기에선 벗어났다 하더라도 투자리스크는 여전히 크다는 평가이다. 현대건설에 이어 현대전자가 금융시장의 또다른 돌출변수로 떠오르고 있는 사실 또한 현대그룹 구조조정 실적의 의미를 크게 떨어뜨리는 요인이다. 
  현대에 대한 금융시장의 평가에 앞서 더욱 근본적인 문제는 채권단의 무차별적인 지원에 상응하는 소유·지배 구조의 개편이 전혀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기업구조조정의 원칙을 깨는 금융지원 과정에서 정부는 스타일을 구겼으며 채권단은 떼일지도 모를 곳에 자금을 끝없이 쏟고 있다. 이에 반해 현대건설 등 현대계열사의 기존 경영진이나 대주주는 온전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정몽헌 회장은 지난해 5월 3부자 동시퇴진 선언 뒤 잠시 물러났다가 12월 들어 정부당국 및 채권단의 종용하는 형식을 빌려 경영일선에 복귀까지 했다. 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일각에선 이와 관련, 정부가 현대의 대북사업에 엮여 이리저리 끌려다니고 있다는 추측까지 나돌고 있다. 
  소유·지배구조를 바꾸는 게 능사가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외환은행 황학중 상무는 “현대건설에 대해 신규자금을 지원하거나 출자전환을 한 것도 아닌데 정부나 채권단이 경영진을 바꾸고 소유구조를 개편할 수는 없지 않느냐”고 말했다. 황 상무는 또 건설업의 특성상 경영진을 교체한다고 해서 나아진다는 보장도 없다고 덧붙였다. 
  이런 견해는 그러나 모든 경영상태가 정상적인데 외부여건 탓에 일시적인 자금난에 빠져 있는 기업에나 적용될 수 있다. 지난해 이후 줄곧 자금시장 전반에 먹구름을 드리우고 있는 현대건설 문제가 과연 일시적인 유동성 위기의 차원일까. 정부가 나서 해외수주에 대해 지급보증까지 하겠다고 나서고 있는 상황이지 않은가. 
   
  기업의 도덕적 해이 막을 장치 필요하다 
   
  국책연구기관의 한 연구위원은 “자금시장이 극도로 경색돼 있는 지난해 말 상황에서 신속인수제도 같은, 다소 무리가 있어보이는 정책을 편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으나 경영자의 책임이나 손실분담 원칙은 지켜져야 한다”고 말했다. 현대라는 기업 살리기와 대주주 및 경영진의 자리보전은 별개 사안으로 분리돼야 한다는 견해로 이해된다. 
  연세대 이두원 교수(경제학)도 “금융지원이 이뤄지기 전에 책임소재를 명확히 밝혀놓아야 도덕적 해이를 막을 수 있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이 교수는 “현대건설에 이어 현대전자에 대해서도 채권단의 지원이 이뤄져야 할 상황인데 부실에 대한 책임을 지우는 선결과제를 거쳐야 한다”고 말했다. 
    김영배 기자 kimyb@hani.co.kr 
 
 
 
 
 
 
 
 
  

사진/정부의 현대에 대한 끝없는 특혜를 놓고 뒷말이 무성하다. 그럼에도 현대그룹은 온전하게 되살아날 조짐을 보이지 않고 있다.(이정용 기자)
무작정 지원해도 현대 회생 보장 없어

사진/국가경제의 골칫덩어리. 현대건설 정몽헌 사장이 자구안을 발표하고 있다.(이정용 기자)

사진/경영개선 계획안을 발표하는 현대전자 박종섭 사장(오른쪽).(김봉규 기자)

사진/현대에 대한 무차별적 금융지원이 기업구조조정 원칙을 깨뜨리고 있다. 외환은행 김경림 행장이 현대의 자구안 평가기자회견을 하고 있다.(김정효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