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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강원도 목욕탕의 영리한 할인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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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5-11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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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주민 우대는 이윤 극대화와 사회공헌이라는 ‘두 마리 토끼’ 잡는 전략…고객마다 다른 1급·구매 수량에 따른 2급·고객 세분화하는 3급 가격 차별

▣ 이원재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 timelast@seri.org

이주의 용어

1급·2급·3급 가격 차별(first-degree/second-degree/third-degree price discrimination)

지불 의사(willingness to pay)


어느 주말, 친구를 따라 강원도 한 온천을 찾아갔다. “몇 번만 들락날락하면 피부가 뽀얗게 변한다”는 친구의 너스레에 속는 척하면서 입구에서 요금을 치르려고 지갑을 꺼냈다. 순간, 친구가 가로막으며 말했다. “내가 사면 더 싸다니까.” 친구가 받아온 입장권에는 4천원이라고 쓰여 있었다. 입구에는 분명히 8천원이라고 쓰여 있는데 말이다. 그건 열 장씩 묶어 파는, 지역 주민용 할인 입장권이었다. 친구는 강원도민이었다.

1급 가격 차별은 전문 서비스 영역

온천 쪽이 지역 주민에게만 목욕값을 깎아주는 이유는 뭘까? 얼른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은 사회공헌 활동이다. 알다시피 온천이 들어서려면 지역의 땅으로부터 물을 길어내야 하고, 엄청난 양의 하수를 매일매일 내보내야 한다. 지역 주민 입장에서 보면, 아무것도 없던 자리에 온천이 들어서면서 땅 속의 물이 폐수로 변해 흘러나오게 된 셈이다. 그 과정에서 생겨난 이익은 온천 주인의 주머니에 들어간다. 온천 쪽이 이익의 일부를 지역 주민과 나누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지역 주민을 위한 할인 혜택은 온천 기업의 사회공헌 활동인 셈이다.

고객의 최대 자불 의사에 따라 가격을 차별화하는 전략은 차별되는 정도에 따라 1급,2급, 3급으로 나뉜다. 한 쇼핑매장의 할인행사(사진/ 한겨레 김태형 기자)

하지만 이 할인 혜택의 배경에는 온천 기업의 사회공헌 활동뿐 아니라 이윤 극대화 전략도 숨어 있다. 지역 주민만 골라 가격을 깎아주면 ‘가격 차별’(price discrimination)이라는 전략적 효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가격 차별은 똑같은 제품이나 서비스를 제공하면서도, 고객에 따라 다른 가격을 받는 전략이다. 고객마다 다른 가격을 매길 수 있다면, 고객 마음속의 지불 의사(willingness to pay)에 가까운 가격을 받을 수 있으므로 기업의 이익을 극대화할 수 있다는 사실에 착안한 전략이다.

가격 차별에는 1급 가격 차별(first-degree price discrimination), 2급 가격 차별(second-degree price discrimination), 3급 가격 차별(third-degree price discrimination)의 세 가지가 있다. 가격이 실제로 차별되는 정도에 따른 구분이다.

1급 가격 차별은 기업이 고객 하나하나마다 다른 가격을 매기는 전략이다. 기업이 고객 마음속에 있는 지불의사를 모두 알 수 있을 때 가능하다. 수십 년 동안 낙도에서 근무해, 모든 가정의 주치의가 돼버린 의사라면 이런 전략을 채택할 수도 있다. 각 가정에 숟가락이 몇 개인지까지 소상하게 알게 된 이 의사는 이제 집안의 경제력에 따라 진찰료를 청구할 수 있다. 자식 없이 혼자 생활보호자 지원금으로만 사는 할머니에게는 진찰료를 전혀 받지 않고 진찰을 해주기도 하지만, 벌이가 괜찮은 이장집 식구들에게는 원가에 어느 정도 이윤을 붙여 청구하는 식이다.

현실에서 1급 가격 차별 전략을 쓸 수 있는 경우는 많지 않다. 기업이 소비자의 지불 의사를 완전히 알아내기는 거의 불가능한데다, 1급 가격 차별을 위해서는 특정 고객에 대해 완전에 가까운 독점력을 갖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1급 가격 차별에 가까운 가격 전략을 사용할 수 있는 업종은 컨설팅, 회계사, 변호사 같은 전문 서비스 영역이 거의 유일하다. 컨설턴트, 회계사, 변호사 같은 전문가들은 각 고객에게 가격을 얼마나 청구하는지 전혀 알려지지 않을 뿐 아니라, 고객의 내밀한 정보를 알 수 있는 지위에 있기 때문에 지불 의사를 상대적으로 쉽게 알아낼 수 있다. 전략컨설팅 회사가 청구하는 컨설팅 비용의 경우, 비슷한 프로젝트에서도 고객이 공공기관인지 사기업인지 등에 따라 공짜에서 수백억원까지 엄청난 차이가 나곤 한다.

2급 가격 차별은 구매 수량에 따라 가격을 달리 매기는 전략이다. 전기나 물의 경우 자원 보존을 위해 소비를 억제하려고 많이 쓸수록 가격을 높인다. 그러나 공산품의 경우 같은 제품을 반복해서 쓰면 소비자의 최대 지불 의사가 점점 낮아지게 되는 점에 착안해 많이 살수록 가격을 깎아준다. 한 장을 사면 3천원쯤 하는 공DVD가 50장을 사면 2만원밖에 하지 않는 가격 정책이 이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더 다양한 상품을 소비하고 싶은 성향을 갖고 있다. 그러니 똑같은 제품을 여러 개 한꺼번에 사면 최대 지불 의사가 낮아지기 마련이다. 이런 현상을 반영해 이익을 극대화하는 전략이 2급 가격 차별이다.

온천 가격 정책은 2급과 3급 혼합

3급 가격 차별은 장소나 고객을 세분화해 가격을 달리 매기는 전략이다. 이는 가장 널리 사용되는 가격 차별 전략이다. 현실에서는 원가는 같지만 ‘프리미엄’이라는 이름과 함께 열 배나 비싼 가격이 매겨진 와인, 노인이나 학생 할인 가격, 항공기 좌석에 따른 프리미엄 가격 같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강원도 온천의 가격 정책은 2급 가격 차별과 3급 가격 차별을 혼합한 형태의 전략이다. 지역 주민과 외지인으로 고객을 세분화했고, 지역 주민은 10장 단위로 할인권을 사게 해 수량에 따라 다른 가격을 매겼다. 지역 주민에게 혜택을 주는 동시에 이익 극대화까지 이루겠다는 계산이다.

온천이 지역 주민에게 더 싼 요금을 매기는 것은 물론 기업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사회공헌 활동이다. 온천에서 환경 문제가 생긴다면 그 피해는 지역 주민에게 가장 먼저 가기 때문이다. 지역 주민 가격 할인이 가져다주는 당장의 경제적 이익은, 이 정책으로 얻는 사회적 이익에 견주면 작은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회공헌 활동이 기업에도 직접적, 경제적 이익으로 돌아오도록 설계된다면,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더욱 강력하고 지속 가능한 것은 당연하다. 그 온천의 가격 정책은 그래서 혁신적이다. 두 마리 토끼를 잡는 포수가 가장 좋은 포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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