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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미국은 농민의 재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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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5-03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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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제12회 총회 치르는 국제가톨릭농민운동연맹 허만 사무총장… 막대한 지원금 쏟아부어 싼 농산물 수출하는 그들만의 ‘free trade’

▣ 김영배 기자 kimyb@hani.co.kr
▣ 사진 윤운식 기자 yws@hani.co.kr

4월28일 오후 충남 연기군 전의면 정하상교육관 대성당에서는 세계 농민들의 대변인 구실을 하는 국제가톨릭농민운동연맹(피막·FIMARC) 제12회 총회가 개막됐다. 벨기에에 본부를 둔 ‘피막’은 한국가톨릭농민회를 비롯한 67개국의 주요 농민단체들을 아우르고 있으며 4년마다 총회를 열어 세계 농업 문제의 해법을 공동 모색하고 있다. 1964년 포르투갈 파티마에서 시작됐으며, 아시아 지역에서 총회를 열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식량주권’ 침해에 문제제기


총회 참석차 한국에 온 데이지 허만(47) 피막 사무총장을 만나 총회의 의미와 농업계 현안에 대해 들어보았다. 인터뷰는 총회 개막을 하루 앞둔 4월27일 서울 양평동 가톨릭농민회 사무실에서 이뤄졌다. 허만 총장은 벨기에의 조그마한 시골 마을 태생으로 여성운동에 몸담다가 결혼 뒤 피막 사무국에서 일하게 됐다. 사무국에서 교육·홍보 활동을 하던 그는 1998년 스페인 총회에서 임기 4년의 피막 사무총장에 뽑혔고, 2002년 총회에서 재선됐다. 허만 총장은 벨기에 산림청에 근무하는 남편과 세 아들을 두었으며 여섯 살 난 손자가 있는 할머니이기도 하다.

국제가톨릭농민운동연맹(피막)을 이끌고 있는 데이지 허만 사무총장은 "문화 분야처럼 농업의 다양성도 인정 돼야 한다"고 말한다.

-일반인들한테 피막은 그다지 알려지지 않다. 간단히 단체 소개를 해달라.

“유럽, 남미, 아시아 지역의 가톨릭 농민단체들이 농촌·농업 문제의 해법을 찾고자 만든 모임이다. 생긴 지 40년 정도 됐다. 처음 시작할 땐 스위스의 제네바인권위원회와 유엔교육과학문화기구(UNESCO) 프랑스위원회, 유엔식량농업기구(FAO) 이탈리아협회가 연대해 활동하는 형식이었다. 가톨릭 단체들의 연맹체이고 교황청의 인준을 받은 단체다.” 허만 총장은 피막의 역할을 크게 두 가지로 꼽았다. 하나는 세계 각 지역에서 회원단체들을 확보해 조직적인 지원을 펴는 것이고, 또 하나는 국제적인 로비를 통해 농민들의 목소리를 이슈화하는 일이란다.

피막이 내세우고 있는 깃발에 대해 허만 총장은 ‘식량주권’을 핵심으로 삼아 설명한다.

“자국에서 식량과 식품을 생산해 팔거나 소비하고 그걸 지키는 권리가 자국에 있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지금의 국제질서에서는) 식량주권뿐 아니라 자국의 주권도 침해받는 일이 많다. 이 부분에 대해서도 문제 제기를 하고 있다.”

-한국에서 총회가 열리게 된 배경은?

“지난번 총회 때 다른 대륙에서 하는 게 좋겠다는 얘기가 나왔다. 한국가톨릭농민회 쪽이 한국을 소개하면서 총회를 유치하게 됐다. 가톨릭농민회를 비롯한 한국 농민단체들의 활동은 국제적으로 크게 부각돼 있다.”

-농업 보호를 얘기하면 쇄국주의로 여겨지거나 개방 시대에 맞지 않는 시대착오적인 주장으로 몰리는 실정이다. 피막의 주의·주장도 그렇게 비칠 수 있지 않을까?

“무조건 자기 시장만 지키겠다는 게 아니다. 농민들과 충분히 의논하지 않는 문제를 꼬집는 것이다. 개방을 무조건 피하자는 게 아니다. 안정적인 생산 구조를 구축한 다음에 그런 얘기(개방)를 해야 한다. 강한 힘을 가진 미국과 세계무역기구(WTO)가 공정하지 않게 행동하기 때문에 반대하는 것이다.”

세계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점에서 불공정하다는 것인가?

“미국의 경우 자국 농산물을 제3세계에 팔려고 가격을 낮게 책정한다. 이는 낮게 생산돼서가 아니라 농민들한테 엄청난 지원을 해준 결과다. 남미는 본래 자급자족을 해왔는데, 미국이 이 지역에 농산물을 싸게 파는 바람에 농업이 피폐해졌다.” 허만 총장은 여기에 “미국이 농산물을 싼값에 공급하는 과정에서 유전자조작(GMO) 농산물에 따른 여러 가지 문제를 불러일으키고 있다”고 비판했다. “유전자조작 농산물의 안전성은 증명되지 않았다. 그에 따른 자연훼손도 심하다. 너무도 많은 잉여농산물을 만드는 과정에서 자연이 망가진다. 조류독감이나 광우병 같은 것도 그런 원인에서 비롯된다. 모든 것을 훼손하고 단지 이익을 꾀하려는 생각 때문에 생겨난 재앙이다.”

-미국과 WTO 주도의 국제무역 질서가 공정하지 않다면, 피막은 이에 갈음할 수 있는 대안적 질서를 갖고 있는가?

“세계 곳곳에서 작지만 의미 있는 시도들이 있다. 작게 시작한 대안적 운동들이 있다. 농업에 종사하는 이들이 자기가 생산한 게 어디로 팔릴 것인지 약속하고, 소비자 쪽에선 내가 먹을 걸 누가 생산하는지 알 수 있게 약속하는 시도들이 있다. 이런 게 얼마나 중요한지 사람들로 하여금 각성하도록 하는 게 우리의 과제다.”

-허만 총장의 설명이나 피막의 ‘식량주권’ 구호는 농업보호주의로 여겨진다. 그렇다면 이는 국제적 연대나 협력과는 모순되는 것 아닌가? 각국의 농업을 보호하면서 어떻게 연대나 협력을 할 수 있는가?

“세계화 추세를 부정하는 게 아니다. 거스를 수 없는 대세라는 걸 인정한다. 다만, 몇몇 힘있는 나라가 세계 농업정책을 좌지우지하는 게 공정하지 않다는 것이다.” 허만 총장은 “자국의 농산물을 보호하는 식량주권을 위해선 세계 농업정책을 결정하는 이들이 그런(공정하지 못한) 결정을 하지 못하게 국제적인 연대 활동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자급자족하고 남는 잉여농산물을 팔 거나 살 수 있지만, 공정한 가격에 따라야 한다는 게 허만 총장의 주장이다.

세계 농민들의 대변인으로 불리는 '피막'의 12회 총회를 알리는 포스터.

“국제적인 불공정 거래 때문에 국외 이주를 강요당해 제3세계에서 유럽으로 사람들이 쏟아져 들어오고 유럽에선 이들을 받아들일 수 없는 한계 상황에 몰리고 있다. 한국에서 어려운 처지에 빠진 이들이 도시로 밀려들면서 노숙자나 부랑아로 전락하는 양극화 현상도 다 그런 문제에서 비롯된다고 본다.”

-피막의 요구로 국제 농정의 큰 흐름이 바뀐 게 있었나?

“피막은 기금 지원 기구와 연계해 중간자 역할을 한다. 예컨대 ‘커피 캠페인’을 통해 인도 커피 생산업자들에게 지원해줄 후원금을 받아 연결해주는 식이다. 나아가 국제기구에 대표를 파견해 세계 농업계의 의견을 국제회의에 알리고 국제적인 압력을 넣는 일도 한다.”

다양성을 인정하는 FTA를

-한국에서 농업 관련 최대 현안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이다. FTA에 대한 피막이나 허만 총장의 견해는 어떤가?

“FTA의 ‘Free Trade’를 ‘Fair Trade’로 바꾸고 싶다. ‘자유무역’이 아니라 ‘공정무역’으로 가야 한다. 시장 개방의 대세를 전면 거부하지는 않는다. 개방하되 공정한 거래가 이뤄지도록 하자는 것이다. 문화적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처럼 농업의 다양성도 인정돼야 한다. 농업 문제는 농민들에 관한 얘기에 그치지 않고 식량을 소비하는 이들에게도 직결된다. 모든 사람들의 문제라는 것이다. 이를 널리 알려 생산자와 소비자가 함께 고민하고 문제를 풀어나가야 한다.”

인터뷰 막바지에 허만 총장은 피막 총회 개막 행사에 참석해 토고, 마다가스카르 등 아프리카 지역 대표들의 호소를 들어달라고 당부했다. 이들 나라가 식량주권은 고사하고 당장 먹고사는 문제로 고통받고 있는 상황을 듣고 널리 알려달라는 부탁의 말이었다. 이번 피막 총회는 5월13일까지 계속되며, 32개국 농민단체 대표 55명이 참석해 세미나와 토론회를 비롯한 갖가지 행사를 통해 농업의 위기를 성찰하고 국제적인 대응 방안을 모색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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