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록 로비 의혹’과 함께 떠오른 글로비스 설립과정의 ‘회사기회 편취’… 비자금 수사 뒤 처벌로 이어질 경우 정의성 사장 경영권 승계에 급제동
▣ 김영배 기자 kimyb@hani.co.kr
몇 년 전 사석에서 만난 현대자동차 직원이 재미있는 우스개 하나를 들려준 적이 있다. 그 직원은 웃음을 머금은 채 문제를 하나 내는 것으로 농담을 시작했다. “용장(勇將)보다 높은 단계가 지장(智將)이고, 지장 위에 덕장(德將)이 있다고 하는데, 덕장보다 높은 게 뭔 줄 아느냐?” 잠시 뜸을 들인 그는 “바로 운 좋은 ‘운짱’(運將)”이라고 말해 한바탕 웃었다.
“현대차 문제는 지류 아닌 별도의 나무”
그가 지칭한 최고 반열의 운짱은 바로 대주주인 정몽구 회장이었다. 운짱은 운송 수단(자동차) 회사의 최고경영자라는 뜻까지 담은 중의적 표현이었다. 당시만 해도 정몽구·몽헌 형제의 이른바 ‘왕자의 난’(2000) 여진이 남아 있던 때였고, 몽구 회장이 주도하게 된 현대자동차의 앞날에 대해 반신반의하는 시각이 적지 않았다.
현대그룹 창업자인 정주영 전 명예회장의 총애를 받은 쪽은 몽구 회장보다 동생인 몽헌 회장이었다는 말도 파다했다. 그 모임에서 운짱 농담이 나온 것도 그런 맥락에서 비롯됐던 것이다. 현대차 직원은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운 좋은 운짱 덕에 (회사 경영이) 잘될 것”이라며 농담을 마무리지었다.
그때 들은 우스개가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던 건 그 뒤 현대차가 실제로 승승장구했기 때문이었던 듯하다. 지난 2000년 정몽구 회장 취임 뒤 현대차는 매출과 순이익이 크게 늘고 주력 브랜드인 ‘쏘나타’는 세계적인 평가기관인 미국 JD파워에서 신차 품질 1위 평가를 받았다. 이런 실적에 힘입어 현대·기아자동차그룹은 삼성에 이어 재계 서열 2위 자리를 차지했다. 현대그룹에서 분리될 당시 5위에서 비약적으로 성장한 것이다.
현대차의 쾌속 질주를 이끌어온 운짱의 운세가 한계에 다다른 것일까. 현대차그룹이 격랑 속에 휘말리고 있다. ‘김재록씨 로비 의혹’ 사건에 그룹 계열사(물류)인 글로비스가 단단히 얽힌데다 현대차에 대한 검찰의 비자금 수사가 벌어지고 있다. 글로비스 비자금 문제가 거론될 초기엔 현대차그룹에 대한 수사는 ‘지류’라는 게 검찰의 설명이었지만, 현대차 비자금으로 수사망을 확대하겠다고 밝힌 3월29일부터는 분위기가 확연히 달라졌다. ‘김재록 로비 의혹 수사’와 ‘현대차 비자금 수사’ 투 트랙(두 갈래) 수사로 진행한다고 검찰은 밝혔다. 현대차 문제가 김재록 사건의 ‘가지’가 아니라 별도의 ‘나무’라는 뜻이다.
현대차 수사를 두고 재계 안팎에서 관심을 집중시키는 대목은 정몽구 회장에서 아들인 정의선 기아자동차 사장으로 이어지는 경영권 승계에 어떤 영향을 끼칠까 하는 점이다. 국내 재계는 재벌이 움직이고, 재벌은 오너 일가가 좌우하는 실정을 감안할 때 재계 서열 2위 그룹의 권력이동은 경제 전반에 파장을 일으킬 사안이다. 삼성을 비롯해 상당수 재벌 가문이 현대차그룹처럼 2세에서 3세로 경영권을 넘기는 과정을 밟고 있다는 점도 관심을 높이는 요인으로 꼽힌다.
참여연대 “불법적 이득을 반환하라”
김재록 로비 의혹이나 현대차 비자금 수사가 그룹 경영권과 얽혀 해석되는 것은 첫 번째 수사 대상으로 떠오른 글로비스가 정몽구 회장에서 정의선 사장으로 이어지는 승계 구도의 핵심 고리이기 때문이다.
글로비스는 정몽구 회장 부자가 공동 출자해 차린 물류회사로 정의선 사장은 글로비스의 기업 공개 뒤 수천억원대의 평가 차익을 거두고 있다. 재계 안팎의 해석으로는 여기서 거둔 종자돈을 바탕으로 기아자동차 경영권을 장악하고, 나아가 현대차그룹 전체를 장악하는 게 정 회장 일가의 복안이다. 이는 현대차의 소유 구조에서 자연스럽게 추론되는 필연적인 절차이며, 실제로 정 회장 부자는 이런 방향으로 한 발씩 움직여왔다.
현대·기아자동차그룹의 소유 구조를 보면, 정몽구 회장(7.93%)이 현대모비스를, 현대모비스(11.22%)가 현대자동차를, 현대자동차(38.67%)가 기아자동차를, 기아자동차(18.19%)는 다시 현대모비스를 지배하는 식으로 뱅글뱅글 돌아가는 순환출자 구조로 돼 있다.
여기서 아들인 정의선 사장이 그룹 전체를 장악하려면 어떤 전략을 써야 할까? 1차 목표를 기아자동차로 삼는 게 필연적이다. 현대자동차는 워낙 큰 덩치여서 개인 지분으로 지배할 수 없다. 또 현대모비스는 이미 정몽구 회장이 일정 지분을 확보하고 있다. 따라서 남는 한 고리는 기아자동차이며, 실제로 정 사장은 지난해부터 계열사인 본텍 주식 매각대금 등으로 기아차 주식 690만4500주를 사들여 지분율을 1.99%로 늘린 바 있다. 글로비스 주식(32%)을 처분하면 정 사장은 기아차 지분을 대략 10% 안팎으로 늘릴 수 있고, 이를 바탕으로 그룹 전체를 쥘 수 있게 된다.
문제는 경영권 승계작전의 핵심 고리인 글로비스를 둘러싼 끊임없는 구설이다. 정 사장이 아버지와 함께 글로비스를 설립해 차익을 거둔 과정에 대해 참여연대를 중심으로 한 개혁 진영에선 계열사의 사업기회를 가로채 가문의 배를 불리는 ‘회사기회 편취’이며, 엄밀하게 판단하면 상법 위반임을 지적해왔다.
참여연대는 오는 4월6일께 현대자동차를 비롯해 재벌 가문에서 회사기회를 편취한 대표적인 사례들을 공개하고 이를 금지하는 입법청원서를 낼 계획이다. 한편에선 정 회장 부자의 글로비스 설립 과정에서 얻은 이득을 회사에 반환할 것을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하는 움직임도 일고 있다.
96%의 주주들은 반대로 손해본 셈
글로비스를 매개로 하는 현대차그룹의 3세 승계 프로젝트에 대한 비판은 그동안 ‘삼성 문제’에 가려 여론의 큰 호응을 얻지 못했다. ‘회사기회 편취’ 같은 까다로운 용어가 등장하고 비상장 상태인 글로비스가 상장회사로 둔갑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복잡한 자금거래 내역도 일반의 관심을 끄는 데 걸림돌이었다. 글로비스와 현대차 비자금에 대한 검찰 수사는 이처럼 미적지근한 여론의 분위기를 크게 바꿔놓을 개연성이 높다. 신종 대물림 수법으로 등장한 회사기회 편취는 이중대표소송과 함께 새해 들어 참여연대의 두 가지 주요 활동 목표 가운데 하나로 상정돼 있던 터다. 검찰 수사가 경영권 승계를 겨냥하든 않든 결과적으로 정 회장 부자의 승계 작업을 문제 삼는 참여연대 활동에 힘을 실어주는 분위기로 흐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글로비스를 매개로 한 현대차그룹의 경영권 승계 작업은 어떤 문제를 안고 있을까?
정몽구·정의선 부자가 자본금 50억원을 들여 글로비스를 세운 건 지난 2001년이다. 물류 부문 거래를 독식하며 한 해 1조5천억원의 매출을 올릴 정도로 고속 성장을 거듭했다. 이에 힘입어 글로비스는 지난해 상장 뒤 주가가 치솟아 지분 32%의 정의선 사장은 한때 7천억원 안팎의 평가 차익을 기록하기도 했다. 이는 물론, 현대차그룹 계열사들의 물량 몰아주기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매출 가운데 80%가량이 현대차그룹 내부 거래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됐을 정도다.
여기서 파생되는 문제는 정 회장 부자의 이익은 곧 현대차그룹 주력 계열사와 계열사의 다른 주주들의 손실을 뜻한다는 점이다. 예컨대 현대차를 보자. 상식적으로 보아 자체적인 물류 수요가 많은 현대차로선 내부 사업 부서에서 이를 행하든지 별도로 회사를 차린다면 현대차 자회사 형식으로 하는 게 마땅하다. 설사 이 사업을 포기하더라도 이사회 같은 합당한 절차를 거치는 게 상법 정신에 비춰 타당하다. 현대차가 이런 절차를 거치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결국 회사가 영위하면 돈 벌 기회가 될 것을 뻔히 알면서도 대주주 일가에게 땅 짚고 헤엄치기식 장사를 넘겨줬다는 비난을 피하기 어렵다. 현대차 지분을 보면 정몽구 회장은 4%, 정의선 사장은 0%(6743주)여서 나머지 96%의 주주들은 그만큼 손해를 본 셈이다. 건설회사인 엠코(정 사장 지분율 25.1%)나 종합광고회사 이노션(40%)에서도 이런 회사기회 편취 문제가 생길 가능성이 농후하다.
신세계나 SK도 포함될 가능성
회사의 유망한 사업기회를 회사에 귀속시키지 않고 대주주를 중심으로 한 특정인의 이익으로 돌리는 회사기회 편취 시비는 현대·기아차자동차그룹에 국한되지 않는다. △신세계그룹 정용진 사장의 광주 신세계 유상증자 참여를 통한 지분 인수 △최태원 SK 회장의 SKC&C를 통한 그룹 핵심 사업기회의 독점도 ‘사업 몰아주기’를 통한 ‘세금 없는 신종 대물림 수법’이란 비판을 받고 있다. 참여연대가 여론 환기용으로 곧 내놓을 회사기회 편취 사례에는 신세계나 SK도 포함될 것으로 보인다.
한누리법무법인의 이지수 변호사(참여연대 실행위원)는 “평가 차익 수치로 볼 때 정의선 사장은 ‘워런 버핏’을 뛰어넘을 정도로 주식투자의 귀재로 꼽힐 만하다”며 “이는 (계열사들에 의해) 보장된 사업에 뛰어들어 누워서 떡먹기식 사업을 하면서 현대차의 과실을 따먹은 결과”라고 말했다. 이 변호사는 “현대차가 얻어야 할 과실은 전체 주주들에게, 또 그전에 직원들에게 돌아가야 하며, 일부는 세금을 통해 국가에 귀속돼야 마땅하다”고 덧붙였다.
현행 상법만 엄격히 적용하더라도 이런 회사기회 편취는 막을 수 있다는 견해도 있지만, 우리나라 법원에선 아직 이를 단죄한 예가 없다. 정의선 사장이 글로비스를 통해 차익을 거둔 것을 원천 무효로 하기는 어렵다는 관측이 많은 게 이 때문이다. 다만, 여론의 흐름과 국세청의 의지에 따라선 세금을 매기는 것이 가능할 것으로 관측된다. 이를 감안할 때 정의선 사장의 경영권 승계는 애초 구도만큼 매끄럽게 진행되기 어려울 개연성이 높다. 자금줄 노릇을 해온 글로비스에 기대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검찰 수사 결과 비자금 조성과 로비 사실이 드러나면서 최고경영진까지 처벌받는 상황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가 지칭한 최고 반열의 운짱은 바로 대주주인 정몽구 회장이었다. 운짱은 운송 수단(자동차) 회사의 최고경영자라는 뜻까지 담은 중의적 표현이었다. 당시만 해도 정몽구·몽헌 형제의 이른바 ‘왕자의 난’(2000) 여진이 남아 있던 때였고, 몽구 회장이 주도하게 된 현대자동차의 앞날에 대해 반신반의하는 시각이 적지 않았다.

올 3월 기아차의 미국 공장 설립 조인식에 참석한 정의선 기아차 사장(앞줄 왼쪽)과 정몽구 회장(뒷줄 두 번째).(사진/ 기아차 제공)

비자금 파문에 휩싸인 글로비스는 현대·기아자동차 그룹 경영권 승계 작업의 핵심고리로 여겨지고 있다.(사진/한겨레 이종근 기자)


현대·기아자동차 그룹이 ‘김재록 로비 의혹’에 휘말려 곤혹스런 처지에 빠졌다. 서울 양재동 그룹 본부.(사진/한겨레 이종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