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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한전 민영화는 열려라 참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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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1-02-07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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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의 전력산업 구조개편 실효성 의문… 발전 부문별 실효성 높이는 결단 절실

사진/한전민영화를 둘러싼 논란이 새롭게 일고 있다. 정부쪽은 한전의 과다한 부채규모를 들어 민영화를 내세우는 반면 노조쪽은 경쟁력 저하를 들어 민영화를 반대하고 있다.(연합)
태평양 건너 남의 나라에서 일어난 단전(斷電) 사태가 공기업 개혁의 상징처럼 여겨지던 한국전력 민영화에 궤도수정 압박을 가하고 있다.

한전이 앞으로 겪어야 할 전력산업 구조개편을 이미 겪은 미국 캘리포니아주가 사상 최악의 전력비상 사태에 빠져 있는 현실로 인해, 거스를 수 없는 대세인 양 굳어져온 민영화에 회의적인 시각이 일고 있는 것이다. 지난해 12월 ‘전력산업 구조개편 촉진에 관한 법률’ 공포를 앞뒤로 한 당시만 하더라도 노조쪽의 민영화 반대 주장은 공기업 개혁에 대한 ‘반(反)개혁적 밥그릇 지키기’ 정도로 치부되던 분위기는 크게 달라져 있다. 이는 이미 통과된 법이긴 하나 시행을 무기 연기하고, 나아가 원점으로 되돌려 놓고 다시 검토를 벌여야 한다는 주장으로 이어진다.

캘리포니아주 단전 사태는 무엇을 말하나


물론 정부쪽은 애초 구상대로 한전 분할 및 민영화 방안을 밀고 나간다는 뜻을 굽히지 않고 있다. 여기에는 캘리포니아주와 한전은 사정이 전혀 다르다는 근거 제시가 덧붙는다. 산업자원부는 최근 마련한 ‘전력산업 구조개편 설명회 자료’에서 “캘리포니아주의 전력부족 사태는 근본적으로 수요증가에 대응하는 발전소의 건설이 이뤄지지 못한 데 따른 것”이라며 “구조개편 이전에도 전력회사는 이미 민영화돼 있던 상태여서 민영화로 인한 영향으로 볼 수 없다”고 못박았다. 캘리포니아 사태가 한전 민영화에 영향을 끼칠 아무런 이유가 없다는 지적이다.

서울대 이승훈 교수도 “캘리포니아주의 경우 원래 민간업자였던 발전회사들을 경쟁시키는 방식으로 시스템 운영을 바꾼 것일 뿐으로 민영화에 따른 부작용으로 볼 수는 없다”고 진단했다. 이 교수는 따라서 캘리포니아 사태가 일어나게 된 원인을 찾아내 우리 체제에선 그런 결점이 없도록 대처해야지, 민영화 자체를 반대하는 식으로 몰고 가서는 안 된다고 덧붙였다. 연세대 정갑영 교수도 “캘리포니아 단전 사태는 규제의 적절성과 관련된 사안일 뿐 민영화 여부와는 직접 관련이 없다”고 잘라 말했다.

민영화를 찬성하는 인사들이나 정부쪽의 이런 주장은 일면 맞지만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려운 구석도 있다. 전력산업 구조개편 이전 캘리포니아의 발전회사들이 형식상 민영이긴 했지만 정부의 엄격한 통제 아래 있었다는 점에서 실질적으론 국영체제였다는 점에서다. 민영화한 여러 개의 발전 및 판매회사들의 경쟁구도를 도입하고, 이들 사이의 입찰(경쟁)을 통해 전기 값을 결정토록 한다는 점에서 캘리포니아주 전기회사들이 ‘겪은 일’과 한전이 앞으로 ‘겪을 일’은 근본적으로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다.

사실 캘리포니아주와 우리는 다르다거나, 또는 같다는 식의 이런 논란은 소모적인 논쟁으로 흐르기 쉽다. 둘 사이의 다른 점도, 닮은 점도 찾자면 얼마든지 찾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전 민영화의 필요성 자체에 대한 논의가 필요해보이는 시점이다. 캘리포니아 사태를 아전인수식으로 해석하기보다 이를 계기로 왜 한전 민영화를 해야 하는지에 대한 깊이있는 재검토가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동안 줄곧 한전 민영화를 반대해온 전문가들은 이 점에 대한 불만을 많이 들고 있다. 정부가 ‘공기업 민영화=개혁’이란 등식에 사로잡혀 ‘민영화 반대=반개혁’으로 몰아붙였을 뿐 한전 민영화의 필요성에 대한 진지한 논의는 전혀 없었다는 지적이다. 심지어 정부가 공기업 민영화 실적을 올리기 위한 한건주의에 젖어 있다는 비난이 일기도 했다.

공공성과 효율성이라는 잣대를 적용하면…

사진/국회 산업자원위에서 신국환(오른쪽) 산업자원부 장관과 최수병 한국전력 사장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김경호 기자)
그렇다면 한전 같은 공기업의 민영화가 필요한지 여부에 대한 판단은 어떻게 내릴 수 있을까. 이에 꼭 맞는 정답은 없지만 전문가들의 견해를 종합하면 대략 두 가지 잣대로 요약된다. 공공성과 효율성이 그것이다. 다시 말해 공공성이 강한 상품(또는 서비스)을 생산하는 공기업일수록, 또 경영이 효율적인 공기업일수록 민영화 대상으로 적절치 않으며 민영화하더라도 순위를 뒤로 미뤄야 한다는 설명이다.

이런 잣대를 한전에 들이대면 어떨까. 우선 공공성 부분. 에너지 및 사회기반시설(SOC)은 일반적으로 공공성이 강한 부문으로 꼽히며 전기는 그중에서도 순위가 가장 앞선다는 평이다. 이들 공공재는 민간업자들간의 경쟁을 통해 품질개선을 기대하기 어려운 분야라는 특징을 갖는다. 다시 말해 전력회사는 현재에도, 미래에도 계속 ‘전기’라는 똑같은 상품을 생산할 뿐이란 지적이다. 경쟁이나 이윤동기를 통해 전기가 아닌 초전기가 개발돼 전력시장을 대체하거나 확대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워 민영화 대상으론 적절치 않다는 것이다.

효율성 잣대에서도 비슷한 결론에 이르게 된다. 일반적으로 주인없는 공기업은 방만한 경영을 일삼고 따라서 경영이 비효율적이란 인식이 굳어져있다. 이런 상황에서 공기업 민영화 반대 목소리는 개혁에 저항하는 시대착오적인 주장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었다. 한전 민영화에 대한 반대 의견도 마찬가지였다.

한전의 경영이 비효율적이란 일반의 견해와는 달리 생산성이 대단히 높다는 근거자료도 많다. 정부가 실시한 공기업 경영평가에서 한전은 종합성적 1위를 차지한 적이 여러 번이었으며 3위권 밖으로 밀려난 적이 한 차례도 없었다.

국내 공기업 가운데서 앞자리에 선 게 뭐 대수냐 싶겠는데, 세계적으로도 높은 경쟁력을 인정받은 근거도 많다. 한전은 지난 97년 전세계 246개 전력회사와 72개 관련기업이 가입된 세계적인 전력민간단체인 미국 에디슨전기협회가 주는 에디슨 대상을 수상했다. 에디슨 대상은 일본의 관서전력이나 프랑스의 EDF 등 세계 유수의 전력사들이 도전했지만 실패한 바 있는 권위있는 상으로 아시아에선 한전이 처음 받은 것으로 기록돼 있다.

서울대 기초공학공동연구소의 98년 연구결과에 따르면 한전의 생산성은 세계 주요 전력회사 가운데 4위로 평가됐다. 노동생산성(종업원 1인당 전력판매량)은 세계 최고 수준인 것으로 나타났다.

부채규모만으로 직원 생산성 말할 수 있나

공공성, 효율성 어느 잣대로 보더라도 한전의 민영화는 다른 공기업에 비해 최대한 뒤로 미뤄져야 한다는 해석이 가능한데, 현실에선 거꾸로 된 양상이 나타나고 있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정부쪽은 한전의 부채규모가 과다하고 민간기업과 비교할 때 직원들의 생산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분할·민영화를 통해 외자를 수혈받고, 경쟁요소를 도입해 생산성 향상을 꾀해야 장기적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한전의 부채규모가 30조원을 웃돌고 있다는 점에서 정부의 설명은 설득력이 있어 보이지만 회사의 덩치는 감안하지 않고 단지 부채규모만 따지는 것은 적절치 않다는 지적도 있다. 회사의 재무구조를 잘 나타내주는 것은 부채비율이라는 게 상식이다. 외환위기 이후 금융당국의 닦달에 따라 국내 기업들이 부채비율 200%를 맞추기 위해 혈안이 돼 있었던 사실에서도 이를 엿볼 수 있다. 한전의 경우 지난 99년 말 현재 부채비율이 111.5% 수준이다. 지난 96년까지 110%대를 유지하다가 외환위기 여파로 97∼98년 기간 중 급격히 악화됐지만 다시 호전된 것이다. 5대 그룹을 비롯한 국내 유수 기업들이 각고의 노력 끝에 달성한 것보다 훨씬 양호한 성적이다.

“소수 발전사업자의 담합 가능성 높다”

사진/한전의 민영화 방안은 전력공급의 안정성을 보장하기 힘들다. 민영화에 반대하는 전력노동자들의 집회 모습.(박승화 기자)
삼성을 비롯한 민간기업과 비교할 때 한전 직원들의 근무 행태가 느슨할 것이란 점은 그렇다 치자(물론 이 또한 구체적인 물증은 없지만). 그렇지만 이런 사실이 한전 전체의 효율성을 판단해주지는 않는다. 한전의 비용 가운데서 인건비 비중은 5%를 밑돌고 있다. 나머지는 대부분 시설투자에 따른 비용이다. 한전의 효율성은 100% 전체를 놓고 따져야 올바른 결론에 이를 수 있는데, 단지 5%를 대상으로 분석할 경우 엉뚱한 길로 샐 수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런 원론적인 점은 제쳐두더라도 정부의 분할·민영화 방안이 안고 있는 위험성은 곳곳에서 드러난다.

정부는 한전의 분할·민영화를 통해 시장경쟁 및 이에 따른 가격(전기 값) 하락을 기대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겪어보지도 않고 단정할 수 없겠지만 정부의 이런 관측은 섣부른 낙관론일 뿐이라는 지적이 많다.

서울대 김태유 교수는 지난해 한국경제학회 정책토론회에 제출한 주제발표를 통해 “전력산업에서 경쟁이 유효하려면 다수의 사업자가 있고, 총설비가 충분해 시장진입 및 퇴출이 자유로우면서도 공급 안정성에 문제가 없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김 교수는 “(정부 방안대로 대여섯개 정도) 소수의 발전사업자들만이 경쟁에 참여한다면 이른바 협조적 경쟁 또는 묵시적 담합이 이뤄질 가능성이 높다”고 덧붙였다.

이는 민영화에 따른 가격인하는 기대할 수 없다는 주장으로 이어진다. 경쟁으로 값이 떨어지려면 ‘유효한 경쟁’이 이뤄져야 하는데 조절된 경쟁 또는 경쟁구조로 가장된 담합이 이뤄지는 마당에선 기대난망이란 설명이다.

현재 우리나라 전기값이 일본의 40%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현실에 비춰볼 때 분할·민영화는 오히려 전기값을 올리는 요인이 될 것이란 분석도 덧붙는다.

가격 문제보다 더욱 중요한 점은 전력공급의 안정성이다. 전력은 현실적으로 대체재가 거의 없는 필수재여서 안정적인 공급이 보장되지 않을 때 중대한 사태에 직면할 수 있다. 미국 캘리포니아의 경우 비상사태 때 그나마 이웃 주에서 전기를 사올 수 있고, 우리보다 앞서 전력산업 구조개편을 단행한 영국은 프랑스에서 사올 수 있는 체제를 갖췄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이런 비상책을 쓸 수도 없는 실정이다. 분할된 민영 발전회사들은 단기적인 이윤극대화에 주력할 것이므로 (전력예비율을 낮게 잡아) 전력공급이 불안정해질 것이란 추정은 대단히 현실적이다.

그렇다면, 한전은 건드리지 말고 가만둬야 하는 개혁의 무풍지대인가?. 물론 아니다. 한전 역시 개혁돼야 할 공기업이다. 다만, 제대로 방향타를 잡은 상태에서 개혁이 이뤄져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분할·민영화=개혁이 아니라, 경쟁력을 높이는 게 진정한 개혁이라는 것이다.

아직은 하드웨어 개혁 말할 때 아니다

사진/전문가들은 한전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발전 부문별 독립을 추진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사진은 영관 원자력 1,2,3,4호기.
대안의 하나로 원자력, 화력, 가스 등 발전 부문별로 독립적인 사업부제로 나눠 별도 회사처럼 회계처리를 하고 경영 효율에 대한 엄격한 인센티브제를 실시하는 방안이 제시되고 있다. 이를 통해 바깥으로 내보이는 요란한 ‘하드웨어 개혁’이 아니라 내부 효율성을 높이는 ‘소프트웨어 개혁’이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다.

굳이 회사를 분할하겠다면, 정부 방안처럼 지역별로 나눠 한 회사가 화력, 가스 등 발전 전 분야를 아우르도록 하기보다 발전 부문별로 쪼개 전년에 비해 효율성을 높이도록 유도해 부문간 ‘기록경쟁’이 이뤄지도록 하는 게 바람직하다는 지적이다. 백번 양보해서 민영화가 절대선이라고 하더라도 전력설비가 확충되고 전력수요가 정체상태에 들어가는 훗날로 미뤄야 한다는 것이다.

김영배 기자 kimy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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