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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변두리 설렁탕집과 컴퓨터 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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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3-17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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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강남 설렁탕집은 각종 할인 혜택 주는데 변두리 집들은 정가로만 판매할까…델·휼렛페커드 등 고정비용 높은 산업은 생산량 늘려 가변비용의 비중 낮춘다

▣ 이원재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 timelast@seri.org

이주의 용어

총비용 total cost


고정비용 fixed cost

가변비용 variable cost

서울 강남 번화가 한복판의 설렁탕집에 들렀다. 식탁 위에 놓인 푯말에 눈길이 갔다. 설렁탕을 열 그릇 먹으면 한 그릇은 공짜로 준다는 홍보 문구였다. 여기다 수육 같은 비싼 메뉴를 시키면 카드에다 적립도 해준단다. 그런데 이 집뿐만 아니다. 근처 커피숍이나 식당들에서도 쿠폰, 적립, 할인 등의 행사를 하고 있었다. 할인혜택이 넘치고 넘친다. 강남이 이렇게 인심이 후한 곳이었나?

임대료 높으니 설렁탕 많이 팔아야

그런데 생각해보니, 우리 동네 변두리 설렁탕집에서는 한 번도 그런 서비스를 받아보지 못했다. 원래 동네 인심이 후하고 번화가 인심이 박해야 할 것 같은데, 거꾸로 아닌가. 왜일까? 변두리 설렁탕집의 마케팅 기법이 강남 설렁탕집보다 뒤떨어진 것일까?

사실 번화가 설렁탕집의 할인 공세와 변두리 설렁탕집의 꿋꿋한 정가 지키기는 나름대로 경제학적으로 합리성을 갖추고 있다. 고정비용(fixed cost)과 가변비용(variable cost)의 개념을 안다면, 왜 이들의 가격 책정이 합리적인지 이해할 수 있다.

상품을 만들 때 기업이 투입하는 총비용(total cost)은 고정비용과 가변비용의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임대료가 비싼 강남의 음식점은 할인을 해서라도 많이 팔아야 이익을 낸다. 고정비용과 가변비용의 차이 때문이다. (사진/ 곽윤섭 기자)

고정비용은 생산량과 관계없이 고정적으로 들어가는 비용으로 임대료, 공장관리비, 보험료 등을 포괄한다. 생산을 전혀 하지 않더라도 고정비용은 지출된다. 고정비용을 줄이는 유일한 방법은 사업 자체를 중단하는 것이다.

반면 가변비용은 생산량을 늘릴수록 늘어나는 비용이다. 반대로 생산량을 줄이면 가변비용은 줄어든다. 가변비용으로는 직접 원재료 구입비가 대표적이다.

설렁탕집의 경우, 점포 임대료는 대표적 고정비용이고, 고기 등 국물을 우려내는 데 직접 들어가는 재료값은 대표적 가변비용이다. 강남 번화가 설렁탕집의 설렁탕의 총비용을 계산하면, 아무래도 고정비용 비중이 변두리 설렁탕집보다는 높을 것이다. 점포 임대료는 강남 번화가가 동네보다 훨씬 비싸겠지만, 재료값은 사실 비슷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러니 번화가 설렁탕집은 할인판매를 해서라도 최대한 많이 파는 전략이 합리적이다. 설렁탕을 안 팔아도 어차피 나가는 고정비용 비중이 높고 한 그릇 더 팔 때마다 함께 늘어나는 가변비용 비중이 낮다. 하지만 변두리 설렁탕집은 다르다. 점포 임대료가 싸기 때문에 총비용 중에서 가변비용 비중이 높다. 너무 많이 깎아주면 오히려 손실을 보면서 팔 수도 있다.

번화가 설렁탕집은 한 그릇을 더 팔 때 가변비용의 비중이 낮으니, 가격을 좀 깎아서라도 최대한 많이 파는 것이 이익이다. 가격 책정에 관한 운신의 폭은 번화가 설렁탕집이 더 넓다는 이야기다.

그럼 언제까지 할인행사를 벌여 어느 정도까지 판매량을 늘리는 게 적정할까? 번화가 설렁탕집이 판매량을 늘려도 점포 임대료는 늘어나지 않으니, 점점 더 많이 팔다 보면 가변비용 비중이 점점 낮아진다. 가변비용 비중이 할인행사를 하지 않는 변두리 설렁탕집만큼 낮아지면, 계산기를 다시 한 번 두드려봐야 할 때다. 설렁탕집 주인들이 경제학적 합리성을 갖추었다면, 이때까지는 할인행사가 계속될 여지가 있다.

높은 고정비용, 창의적 마케팅의 원동력

변두리 설렁탕집 같은 처지에 놓인 기업이 미국 컴퓨터 회사인 델이나 휼렛패커드 같은 곳이다. 컴퓨터 생산 과정은 대부분 표준화돼 있다. 경쟁은 치열하고 차별화는 쉽지 않다. 그러니 모든 기업들이 비용을 낮추는 데 전력을 투구한다. 비용을 낮추는 것이 이익을 내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비용이 대부분 가변비용이다. 고정비용 비중은 매우 작다. 특히 CPU나 메모리, 하드디스크 같은 부품 구입 비용의 비중이 매우 높다. 이런 비용은 물론 한 대를 더 생산해 팔 때마다 늘어난다.

컴퓨터 회사들이 “컴퓨터를 한 대 사면 한 대 더 끼워드립니다” 같은 식의 마케팅에 나서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변두리 설렁탕집과 마찬가지로 가변비용 비중이 높기 때문에, 가격 책정에 관한 운신의 폭이 좁다. 적극적으로 깎아팔기나 끼워팔기를 하기 어렵다는 얘기다. 컴퓨터 회사들의 전략이 비용 절감이라는 하나의 목적에 포커스를 맞춘 단순한 것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전통적으로 경영학에서는 고정비용이 높으면 시장 상황에 따라 생산량을 조절하기 어려워지니 문제라고 여겼다. 생산량을 줄여도 비용이 줄지 않으니, 시장 상황이 좋지 않아 어쩔 수 없이 생산량이 줄면 울며 겨자 먹기로 적자를 감수해야 하는 상황이 올 수 있다는 우려다. 그러나 거꾸로 이런 비용 구조의 경직성이, 강남 설렁탕집에서처럼 창의적인 가격 설정과 마케팅 기법을 불러오는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퇴로가 없다는 게 오히려 동력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설렁탕집 메뉴판에 대한 경영학적, 또는 철학적 감상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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