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T&G 사태를 계기로 돌아본 적대적 인수·합병, 무조건 막는다고 될 일인가
경영권 방어 위해 법과 제도를 바꾸자는 주장은 다른 의도 때문이라는 의혹도 ▣ 김영배 기자 kimyb@hani.co.kr 미국 프린스턴대 출신의 ‘기업 사냥꾼’ 칼 아이칸(70)의 공세에서 비롯된 KT&G 경영권 공방은 그 결과와 무관하게 국내 기업 인수·합병(M&A) 역사에서 한 페이지를 장식할 것 같다. 외국 자본이 ‘적대적’ ‘공개매수’(장외시장에서 일정한 값에 주식을 사들여 경영권을 장악하는) 방식을 동원해 정서적으로는 아직 공기업으로 여겨지는 KT&G에 대해 인수·합병을 시도했다는 점에서다. 박정희 시절 자본시장육성법으로 보호
기존 대주주에게서 지분을 평화롭게 넘겨받는 ‘우호적’ 방식이 아닌 ‘적대적’ M&A의 국내 역사는 10년 남짓에 지나지 않는다.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법과 제도의 두꺼운 장벽 때문에 적대적 방식으로 한 회사를 인수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웠다. 이는 적대적 M&A를 ‘남의 기업을 뺏는 부도덕한 짓’으로 여기는 우리 사회의 뿌리 깊은 거부감을 반영하고 있다.
1990년대 초반까지 적대적 M&A를 사실상 불가능하게 한 것은 박정희 정권 시절인 1968년에 제정된 자본시장육성법이었다. 기업 공개를 촉진하기 위한 이 법에는 기존 대주주의 경영권을 튼튼하게 보장해주는 장치가 들어 있었다. 기업공개 당시 대주주가 아닌 사람이 지분 10% 이상을 인수하려면 기존 대주주에게서 매입하도록 하는 등의 내용을 뒀던 것이다. 이는 기업공개를 ‘소유권 박탈’쯤으로 여기는 기업주들의 정서 때문이었다. 정주영 당시 현대건설 사장이 남긴 일화에서 기업주들의 이런 정서를 읽을 수 있다. 정 사장은 박정희 대통령을 찾아가 “내가 키운 알토란 같은 회사를 아무에게나 주는 것은 말이 안 된다. 기업공개 대상에서 제외해달라”며 담판을 벌여 승낙을 받아냈다고 한다.
자본시장육성법은 그 뒤 몇 차례 개정됐지만, 기존 대주주의 경영권을 보호하는 장치는 그대로 남아 있다가 1993년에야 없어진다. 1994년 한솔제지의 동해투금 인수, 동부그룹의 한농 인수 등 굵직굵직한 적대적 M&A 사례는 이런 배경에서 비롯됐다.
1990년대 M&A 사건 가운데 단연 눈길을 끄는 사례는 한솔의 동해투금 인수다. 본격적인 의미의 첫 적대적 M&A인데다, 승률이 낮은 공개매수 방식을 동원했다는 점에서다. 한솔의 동해투금 인수는 공개매수에 의한 적대적 M&A의 첫 사례인 동시에 아주 드문 성공 사례이기도 하다.
한솔제지가 동해투금에 대한 적대적 주식 공개매수를 선언한 것은 1994년 10월26일이었다. 당시 동해투금 주식 9.9%를 보유한 한솔제지는 11월9일부터 28일까지 45만 주를 주당 3만8천원에 공개매수 청약을 받겠다고 공시했다. 한솔 쪽이 제시한 가격은 시장가격의 2배 수준이었음에도 11월13일까지 단 1주의 청약도 없다가 14일 처음 3만10주, 26일까지 46만180주가 몰려 예정했던 45만 주를 넘겼다. 이에 따라 동해투금의 경영권은 지분율 25%의 한솔제지로 넘어갔다.
외환위기 뒤 차단장치 사실상 폐기
한솔제지가 기존 대주주와 직접 거래하는 우호적 M&A 대신 출혈을 감수할 수밖에 없는 적대적 방식을 동원한 것은 동해투금의 지분구조 특성 때문이었다. 이는 적대적 M&A의 일반적인 배경이기도 하다. 동해투금은 부산 상공인들이 공동으로 출자한 여신기관이어서 뚜렷한 대주주가 없었다. 최대주주로 꼽히는 김도근 동양고무벨트 대표의 지분율도 10%에 지나지 않았다. 한솔 쪽과 협상을 벌일 만한 마땅한 주체가 없었던 것이다. 이는 곧 적대적 M&A 공격을 당했을 때 대응할 ‘구심점’이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한솔의 동해투금 인수 뒤 대구종금, 항도종금(부산), 경남종금 등 종금사들을 목표로 삼은 적대적 M&A(시도)가 잇따랐으며 외환위기 직전까지 M&A 사태가 꽤 많이 나타났다. 이는 기존 대주주의 경영권에 큰 위협으로 작용했다. 특히 1997년 1월 ‘미도파 사태’는 재계를 충격에 빠뜨렸다. 미도파는 재계 34위인 대농그룹의 지주회사 격인데다 대농의 박용학 회장은 대표적인 재계 원로여서 누구도 감히 손댈 수 없는 막강한 존재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미도파에 대한 적대적 M&A 시도는 외국인 투자자들이 동방페레그린증권을 통해 미도파 주식을 사들이면서 촉발됐다. 뒤이어 신동방그룹과 성원그룹 계열사가 미도파 주식을 매집한 것으로 밝혀진다.
신동방을 중심으로 한 적대적 M&A 세력은 대농그룹보다 많은 지분을 확보해 적대적 M&A 성사 직전까지 갔다. 이때 재계가 나섰다. 미도파의 신주인수권부사채(BW)를 매입해주고, 전경련이 나서 적대적 M&A를 용납하지 않겠다는 결의를 하기에 이른다. 결국 재계의 중재로 성원그룹이 매입한 주식을 대농에 넘김으로써 적대적 M&A 시도는 ‘실패’했다. 이 과정에서 경영권을 인수하려는 쪽이나 방어하려는 쪽 모두 엄청난 손실을 입었고, 외환위기와 함께 관련 그룹이 모두 붕괴되면서 적대적 M&A에 대한 거부감을 키웠다.
1997년 4월 개정 증권거래법(200조)에 의무공개매수제도를 둔 건 바로 이런 분위기가 반영됐던 것으로 풀이된다. 의무공개매수제도는 상장회사의 주식 25% 이상을 취득할 경우엔 반드시 ‘50%+1주’를 주식시장에서 공개적으로 매입하도록 하는 내용이었다. 대주주가 되려면 아예 지분 50% 이상을 사들이도록 강요해 인수자의 부담을 크게 늘리도록 하는 것으로, 기존 대주주의 뜻을 거슬러 경영권을 교체할 수 있는 길을 사실상 차단하는 조처였다. 다시 방패가 강화된 것이다. 이 장치는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 국제통화기금(IMF)의 요구로 결국 폐지되고 만다. 이는 외환위기 뒤 자본시장의 빗장을 연 조처와 맞물려 외국 자본에 의한 국내 기업 M&A 시도가 심심찮게 나타나는 배경으로 작용했다.
경영 효율화 꾀하는 순기능도
의무공개매수제 폐지 뒤 기존 대주주의 경영권을 방어할 법·제도적 장치로는 증권거래법상 ‘5%룰’이 거의 유일하다. 5%룰은 본인과 특별관계자의 소유분을 합해 공개기업의 주식을 5% 이상 보유할 경우 5일 안에, 보유주식이 1% 이상 변동할 때마다 5일 안에 금융감독위원회와 증권거래소에 보고하도록 하는 제도다. 기존 대주주가 적대적 M&A 분위기를 미리 감지해 대응하도록 ‘신호’를 주는 것이다.
5%룰 말고는 기존 대주주의 기득권을 보호할 만한 마땅한 장치가 없다 보니 재계에선 기존 대주주의 경영권 보호막을 두껍게 쳐야 한다는 주장을 펴왔다. 삼성전자가 외국 자본의 적대적 M&A에 휘말릴 수 있다며 금융·산업 자본의 분리를 규정하는 금융 관련법에 저항하는 움직임도 이런 맥락이다. 외환위기 뒤 외국인에게 자본시장의 문을 개방한 데 이어 소버린의 SK(주) 적대적 M&A 시도가 불거지고, KT&G에 대한 칼 아이칸의 적대적 M&A 움직임까지 나타나면서 재계의 이런 요구는 더욱 거세지고 있다.
회사를 국가에 견준다면, 적대적 M&A는 야당의 정권 탈환에 해당한다. 정권 탈환의 대표적인 두 가지 방법은 위임장 확보와 공개매수(TOB)다. 위임장 대결은 인수자 쪽에서 최소한의 지분만을 확보한 뒤 주요 주주와 일반 소액주주들을 설득해 주총 의결권 행사에 필요한 위임을 받아 의결권을 장악하는 방법이다. 소버린의 SK(주) M&A 시도 때 이 방안이 활용됐다. 한솔제지의 동해투금 인수 때 활용됐고, 아이칸의 KT&G 인수 시도에서 거론되는 공개매수는 장외에서 불특정 다수 주주들한테서 일정한 값에 주식을 사들이는 방식이다. 적대적 M&A에서 가장 흔하게 활용되고 있다.
적대적 M&A가 기존 대주주와 경영진에게는 결코 반갑지 않은 ‘손님’이겠지만, 경제 전체적으로는 기업 권력(경영권)의 신진대사를 촉진해 경영의 효율화를 꾀하는 순기능도 있다는 게 증권가의 상식이다. 교체되지 않고 머물러 있는 정치 권력이 부패하듯 경영권을 뺏길 수 있는 길이 완전 차단돼 있는 상태에선 회사 경영을 잘할 의욕이 줄어들고 경영이 부실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적대적 인수·합병의 먹잇감은 거의 예외없이 느슨한 경영으로 주가가 실제 가치보다 낮게 형성돼 있다는 사실이 이를 방증한다.
창과 방패의 균형이 이뤄져 있는가
아이칸의 KT&G 인수 시도를 놓고, ‘기업지배구조 개선을 열심히 했더니 되레 M&A 먹잇감이 된다’는 식의 푸념이 간혹 나왔지만, 이는 실상을 호도하는 것이다. 한국개발연구원(KDI) 국제정책대학원의 김우찬 교수는 “지금까지 이뤄진 기업지배구조 개선은 사외이사를 두어 부당 내부거래 같은 명백한 불법 행위를 막도록 하는 것이었던 반면, KT&G가 M&A 대상으로 떠오른 것은 유휴자산 처리 등에서 안일한 경영을 해온데서 비롯된 것”이라며 “KT&G 사태는 그동안의 기업지배구조 개선과는 전혀 무관하다”고 말했다.
KT&G 경영권 공방에는 자본의 국적, 자본이득 과세, 자본 수익의 장단기성 등 여러 논란거리가 복잡하게 얽혀 있는데,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적대적 M&A 자체를 죄악시하기는 어려운 시대에 와 있다는 점이다. 문제는 창과 방패 사이에 법·제도적 균형이 이뤄져 있느냐 하는 대목일 것이다. 국내 재벌의 경우 5%룰이라는 제도적 장치 외에 계열사들을 동원한 우호지분을 통해 실질적으로는 든든한 경영권 방어 장치를 갖고 있다. 이런 상태에서 방패 쪽의 방어막을 지나치게 두껍게 하는 쪽으로 법과 제도를 바꾸자는 주장은 다른 의도(공정거래법, 금융관련법 무력화?)를 가진 것이란 의심을 살 수밖에 없다.
경영권 방어 위해 법과 제도를 바꾸자는 주장은 다른 의도 때문이라는 의혹도 ▣ 김영배 기자 kimyb@hani.co.kr 미국 프린스턴대 출신의 ‘기업 사냥꾼’ 칼 아이칸(70)의 공세에서 비롯된 KT&G 경영권 공방은 그 결과와 무관하게 국내 기업 인수·합병(M&A) 역사에서 한 페이지를 장식할 것 같다. 외국 자본이 ‘적대적’ ‘공개매수’(장외시장에서 일정한 값에 주식을 사들여 경영권을 장악하는) 방식을 동원해 정서적으로는 아직 공기업으로 여겨지는 KT&G에 대해 인수·합병을 시도했다는 점에서다. 박정희 시절 자본시장육성법으로 보호
기존 대주주에게서 지분을 평화롭게 넘겨받는 ‘우호적’ 방식이 아닌 ‘적대적’ M&A의 국내 역사는 10년 남짓에 지나지 않는다.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법과 제도의 두꺼운 장벽 때문에 적대적 방식으로 한 회사를 인수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웠다. 이는 적대적 M&A를 ‘남의 기업을 뺏는 부도덕한 짓’으로 여기는 우리 사회의 뿌리 깊은 거부감을 반영하고 있다.

KT&G 경영권 공방은 3월17일 주주총회에서 판가름나게 된다. 서울 대치동의 KT&G 본사 빌딩.(사진/ 연합)


동방페레그림증권 창구를 통한 1997년의 미도파 인수 시도는 기존 대주주의 경영권 보호장치를 강화해야 한다는 재계 쪽의 공세적 주장을 낳았다. 왼쪽은 SK(주) 주총에서 경영진에게 공세를 펴고 있는 소버린자산운용 쪽 인사들.(사진/ 김종수 기자)









